PART 9. 65-61-32
이 앨범은 단 한 번도 CD로 발매된 적이 없다. 나중에 나온 그의 베스트 음반인 『김수철 힛트 모음』(1989) CD엔 이 앨범의 ‘노래’만이 실렸다. 이 앨범에 있는 연주곡 2곡은 이 CD에 들어있지 않다. 나는 「별리(경음악)」가 그 2곡 중 하나에 속했다는 사실이 여전히 뼈아프게 느껴진다. 이 곡은 단순한 연주곡이 아니다. 이 곡은 (‘별리’의 멜로디를 모티브로 한) 장장 10분여의 ‘전위’ 음악이었다. 김수철이 만든 가장 도전적인 ‘소리’가 그 한 곡에 다 들어있다.
『작은 거인』(1982)이 김수철을 뛰어난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부각했다면, 이 앨범은 김수철을 뛰어난 가수(이자 작곡가)로 부각했다. 물론 (『작은 거인』의 살인적인 앨범 레코딩 작업을 의욕적으로 임했던) 그는 이 앨범 또한 의욕적으로 만들었지만, 그의 ‘사정’은 이 앨범을 만들 때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쓴 곡 중에서 ‘잔잔한’ 곡을 그러모아 이 ‘(은퇴) 기념 앨범’을 만들었다. (유재하의 작업에 앞서) 그는 이 앨범의 편곡까지 직접 맡았다. 그러나 이는 기실 자신의 음악을 자신의 손으로 완전하게 끝맺고 싶다는 그의 마음이 반영된 자의적인 ‘선택’이었다.
이 앨범의 첫머리에 있는 곡이자, (요즘엔 소위 ‘역주행곡’이라 일컫는) 당대가 이 앨범을 ‘재평가’하게 만든 「못다핀 꽃 한송이」는 이 앨범이 지닌 정조와 로직(Logic)을 청자에게 분명히 들려줬다. 김수철은 이 곡이 품은 동양적인 정조에 (스트링 연주를 비롯한) 서양 음악의 요소와, 록 사운드를 절묘하게 결합했다. 김수철이 만든 이 ‘단단’한 사운드는 이 앨범 전체에 흐르는 ‘모놀로그’적인 성격 덕분에 앨범 전체의 격조와 운치가 두드러졌다. 그래서일까. 이 앨범의 사운드는 때로 부조 조각상처럼 굳건하다. 그는 아마도 석상 만드는 심정으로 이 앨범을 만들었으리라. (물론 이 앨범엔 「다시는 사랑을 안할테야」 같은 ‘신나는 곡’도 들어있다.)
이 앨범의 수록곡을 부르는 김수철의 보컬은 꽤 섬세하고 부드럽다. 전작에서 한결 선명하고 명확하게 불렀던 그는 이 앨범에 이르러 한결 차분한 목소리로 이 앨범의 수록곡을 소화했다. 「못다핀 꽃 한송이」의 첫 벌스(Verse)를 부르는 그의 보컬은 이전의 그가 미처 살피지 못했던 서글픈 체념을 한가득 머금었다. 예전에 발표한 「세월」과 (블루스를 머금은) 「내일」을 나긋나긋한 보컬로 다시 소화하는 김수철은 해당 곡의 정조를 더욱 드높였다. (이러한 미덕은 「정녕 그대를...」이나 「두 보조개」에서도 충분히 깃들었다.) 그렇게 앨범 전체에 은은히 흐르는 ‘시간’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그는 쓸데없는 힘을 쭉 뺀 채로 불렀다. (비록 발매 직후에 명확한 반응이 없었을지언정,) 덕분에 이 앨범은 몹시 사무치게 들린다. (「다시는 사랑을 안할테야」 같은 업템포를 지닌 곡에서도 그는 ‘사랑이 괴롭다’라는 걸 ‘적극’ 토로한다.)
(어쩌면 김수철의 걸작 프로그래시브 록 앨범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이 앨범은 김수철이 그동안 고민했던 지점과 자신이 만들었던 모든 곡을 한 아름 엮고 제련하고 다듬어서 세상에 내놓은 ‘작별 인사’였다. 이 앨범의 ‘재조명’은 거의 우연에 가까운 해프닝이었지만, 소멸의 시간을 두려워하면서도, ‘꽃을 피우겠다’는 의지 하나만을 남기고자 한 그의 결심은 이 앨범의 음악과 더불어 여전히 빛난다. 이 앨범에 두고 ‘국악과 양악의 크로스오버’나, ‘고유한 정서의 리노베이션’ 같은 말은 이 찬란한 ‘빛’을 먼저 말한 다음에 말해도 결코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