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6일
세로 쓰기로 된 『황순원전집 1권 늪/기러기』를 헌책방에서 산 적이 있었다. 몇 페이지 읽다가 안구 뒤에 있는 근육이 위아래 방향으로 당겼다. 좌우로 눈을 움직이며 읽는 습관이 이런 참사를 낳았다. 나는 그 뒤로 그 책을 읽지 않았고, 읽지 않은 책의 운명이 늘 그렇듯, 어느샌가 내 책꽂이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하기사 『님의 침묵』의 1993년 영인본을 문학기행에서 들린 만해기념관에서 사서 보란 듯이 들고 다닌 대학교 1학년의 나는 어딘지 모르게 허세로 가득한 청년이었고, 교수님은 두고두고 다른 학생들에게 나에 대한 말을 내가 없는 곳에서 넌지시 꺼냈다. ‘기행 내내 『님의 침묵』을 들고 다니던 사람’이라고. 후배가 말하지 않았던들 영영 눈치챌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뒤로 5년이 지나, 복학생이 되면서 『원본 정지용 시집』을 샀다. 과 『정지용 시집』과 『백록담』,『지용시선』의 신작 시와 시집에 등장하지 않은 미발표시를 모두 영인(影印)하여 총망라한 책이었다.
『백록담』의「인동차」를 읽다가 찻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광경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잠시 손이 멈췄다. 세로 쓰기 또한 위에서 아래로 읽는 것이지 않던가. 시인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내 자의적인 해석인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새로운 감각에 눈 뜬 느낌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오장환의 『헌사』를 복사한 일이 있었다. 황무지라는 시의 ‘비뚜로’라는 문장이 다른 글과 달리 기울어진 것을 보고 복사가 잘못되거나 파본이 된 게 아닐까 하고 깜짝 놀랐다. 곧바로 인쇄 상의 실수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저 비뚤었다는 표현을 세로 쓰기에 맞게 표현했을 따름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지만, 때로는 자기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때가 있다. 나는『훈민정음 언해본』서두를 읽을 때마다 한자어에 우리말 토를 달은 문장이 맨 앞에 등장하고, 그 뒤에 우리말이, 그리고 그 밑에는 두 줄로 각 글자를 풀어쓴 주석이 등장하며 이와 같은 패턴이 책의 기본 구성이라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 파악한 사람 중의 하나다.
창제 당시의 ‘훈민정음’에서 ‘ㅇ’은 발음기호가 아니라 보충의 성격이 짙은 기호(물론 이건 제한적인 의미다)라는 것을 고등학교 때 배웠는데도 그랬으니...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엔 의외로 번역서보다 싼 원서 책도 많다. 가격에 혹한 나머지 언어를 모르는데도 가끔 원서를 한 두 권 산다. (내가 산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인간실격』은 핫핑크 바탕에 검은 글씨가 새겨진 겉표지가 인상적인 책이었다.) 나는 거기서『설국』의 일본어 원서 문고판을 집어서 몇 차례 페이지를 훑었다. 내 눈은 곧바로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머물렀다.
주인공인 시마무라[島村]가 헛디딘 발에 힘을 넣으며 일어나는 순간, 은하수가 소리를 내며 그의 안에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고 표현한 대목을 나는 세로 쓰기로 된 원서의 문장을 읽으며 감탄했다. 위로부터 솟구친 시마무라의 행동에 아름답게 아래로 떨어지는 은하수의 소리가 가로 쓰기보다는 세로 쓰기에서 더 드라마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혹한 나는 지금 이 책을 3권 샀다. 그때 바로 샀던 일본어 원서와 민음사의 번역본, 그리고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Edward Seidensticker)의 영문 번역본. 이렇게 세 권이다. '무릇 책이란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된다'라고 단언한 카프카도 이 사실엔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창우사에서 나온 김승옥의 1966년 단편집『서울, 1964년 겨울』을 대학교 4학년 때 한 번 복사한 일이 있었다. 전체 복사는 안 되기에,「환상수첩」과 「무진기행」을 비롯한 소설 몇 편을 복사했다. (백만 부 쯤 팔려서 출판사 사장님에게 폐 안 끼쳤으면 좋겠다는 후기를 보고 웃었다. 내가 알던 1960년대의 김승옥이었다.)
「환상수첩」을 나는 집에 가져와서 읽다가, 주인공의 수기 부분의 글씨가 살짝 작아지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워낙 미세한 차이였기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몰랐을 장치였다. 그것은 출판사의 의도였을까. 아님 김승옥의 의도였을까. 물어보고 싶다.
한동안 가로 쓰기로 써진 옛날 소설이나 책을 볼 때마다 이 책의 세로 쓰기는 어땠을까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인디자인의 새로 쓰기 기능을 이용해 몇 편의 글도 편집했다. 질문은 자연스레 '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갔다. 나는 여전히 이 질문을 고민 중이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잡아먹는 시대인데도 그렇다.
(다소 의외의 일이지만 사람들이 종이책을 꺼리는 이유는 종이책이 싫어서가 아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많이 물어봤지만, 대체로 종이책이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한다는 점을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요컨대 호오의 문제가 아니라 부동산 문제인 것이다.)
강화유리나 플라스틱이 손가락에 닿는 느낌보다 종이가 손가락에 닿는 느낌이 아직 친숙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둘 다 놓치기는 너무 아깝다.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는 건 한 마리 토끼라는 선택지조차도 없는 사람에겐 부러운 실패로 보인다.
내게 없는 책을 그리워할 시간에 내가 가진 책에 애정을 주는 수밖에.
지금 내가 가로 쓰기 책으로 가지고 있는 한국어 책 중에 가장 뿌듯한 책은 백석의 『사슴』영인본이다. 자루매기 방식과 한지를 고스란히 가져온 800부 한정판 영인본이다. (원래는 1000부 한정이었는데, 교정부호를 넣어가면서까지 800부로 고쳐 쓴 흔적이 간기에 남아있었다.)
백석의 초기작만 실린 시집이라 후기작을 읽기 위해 다른 시집을 사야 했지만, 나는 지금도 군대 휴가 때 이 시집을 산 내가 대견스럽다. 책값으로 쓴 20,300원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지게 쓴 20,000원이었다.(나머지 300원은 적립 포인트로 지불했다.) 비록 복귀 후에 면사랑 냉동 크림우동과 유어스 슈넬치킨을 거진 한 달 동안 PX에서 못 사 먹는 불상사(?)를 겪었지만, 그게 뭔 대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