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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주인은 누구인가

by 봄날의 북극

글을 쓰기 위해 첫 단어를 고릅니다.

가령, “그래서”처럼 아무 의미도 없는 단어 하나를 툭 던져놓고 글을 쓰기도 합니다. 단어는 문장을 이끌어 내는 힘이 있습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습니다. 어느 날엔가는 입안에 맴도는 하나의 단어가 문장으로 이어지고 하나의 주제를 향해 어쩌면, 나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단어에서 시작된 문장이 글을 이끌어가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단어에서 시작된 글이, 어떤 주제로 이어질지 짐작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단어가 가진 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나의 글 쓰기는 단어로부터 시작되곤 하는데 요즘에는 하나 더 나의 글 쓰기에 시작을 이끄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AI로 대표되는 챗GPT가 글쓰기를 이끄는 새로운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처음 새로운 인공지능이 나왔다고 했을 때는 생활 속에서 이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되는지 망설여져 그저 신기한 무언가가 생겼구나라는 인식 정도였습니다.


여기저기서 마법 같은 인공지능의 능력을 신기해하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과연 그렇게 대단한가 하는 의문과 궁금증에 스마트폰에 앱을 깔아 보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 거지? 망설이다가 처음으로 한 질문은 “지금 날씨 알려줘”였습니다.

기존에 사용하던 구글 어시스던트나 빅스비와 다를 바 없는 답변 탓에 별 것 없잖아 라는 조금 시큰둥한 기분이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인공지능에 대해 조금씩 이해해 가면서 사용법에 적응해 나갔습니다.

그전까지의 인공지능이라고 하면 명령어 중심의 제한된 범위의 질문만 할 수 있었고 그것도 검색에 기반을 둔 사실 나열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한 생성형 AI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여전히 자연어에 가까운 대화라는 것이 생소하기는 하지만 이제는 내가 어떻게 말해야지 AI가 이해할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문장, 가령 비문이라 해도 맥락을 이해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 이제는 놀랍지도 않습니다.


어떤 이는 즉각적인 대답을 완성해 내는 인공지능 탓에 인간의 뇌는 점점 더 할 일을 잃어 가며 퇴화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합니다. 마치 티브이가 바보상자라 불리며 사람들을 멍청하게 만든다는 말과 같은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궁금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사소한 것까지 궁금하고 아무것도 아닌 현상에 대해서도 “왜지?”라는 의문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어렸을 적 일입니다.

마당에 세숫대야를 놓고 세수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세숫대야는 많이 낡았지만 둥근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안에는 방금 부어 놓은 맑은 물이 담겨 있었습니다.

가장자리를 툭 하고 건드리자 파동이 일면서 동심원을 그린 원들이 한가운데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한가운데가 아니라 미묘하게 한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모여들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 신기해서 다양한 지점에서 툭툭 건드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힘의 타격 부위와 상관없이 동심원들은 같은 지점, 그러니까 살짝 치우쳐진 한가운데, 로 모여들었습니다. 그것이 하도 신기해서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어머니가 내가 잠이 덜 깨 멍하게 그렇게 앉아 있는 줄 알고 "정신 차려 늦겠다"며 야단을 하십니다.

"엄마~이것 봐" 부르며 뒤돌아 보았지만 어머니는 그대로 부엌으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혹시 비가 내릴 때 창문에 맺힌 빗방울들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무질서하게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들은 경주라도 하듯이 또로록 창을 타고 내립니다. 창에 맺힌 물방울들의 레이스를 바라보며 누가 더 빨리 흘러내릴까 마음속 레이스를 펼칩니다. 또로록 늦게 흘러내리던 빗방울 하나가 다른 빗방울과 합쳐져 앞서가던 다른 빗방울들을 제치고 빠르게 흘러내리는 모양을 보며 속으로 응원하던 마음을 담아 "와~" 하고 혼자 감탄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왜 이 녀석은 다른 물방울과 합쳐져 빨리 달려갈 수 있었는데 다른 건 그러지 못했을까?" 이러한 것들이 궁금해진 곤 했습니다.

주변 누군가에게 "이것 봐 신기하지 않아?"라고 물어볼 때면, " 왜 그런 쓸데없는 것에 궁금해하니?" 흔한 말로 "무엇이 중헌디" 라며 궁금증을 가지는 저에게 핀잔을 주곤 했습니다. 사람들의 그러한 말들에 저는 입을 닫게 되었고 어느 순간에는 궁금증마저 점차 사라져, 세상의 모든 것은 원래 그런 것이고 그러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며 둥글둥글 법칙에 따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성형 AI의 출현은 나의 궁금증에 대한 모든 질문을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답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잊고 있던 호기심을 다시 꺼내어 볼 수 있었고 오래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사소한 것들에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질문은 질문으로서 새로운 상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질문은 그 질문 속에 일정 정도의 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질문을 하는 동안 그 질문 속에 숨겨진 답을 헤아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질문과 동시에 그 대답을 알려주는 AI의 답변과 내가 스스로 깨달은 답과 그것이 제시하는 답변을 비교하는 기회를 얻기도 합니다.


가령 밤이면 가로등 불빛에 까맣게 날아드는 나방을 보면 “왜 저렇게 불빛에 이끌릴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의 그러한 특성을 이용해 포집기가 만들어졌고 벌레들은 자신이 불에 타 죽을 걸 알지 못 한채 이끌려 들어갑니다. 그런 걸 바라보면서 무엇이 그들을 끌어당기는 거지 라는 궁금증에, 이것을 물어보아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머릿속엔 어렴풋 ‘달빛이나 별빛을 이용해 길을 찾는 본능 때문이 아닐까’라고 짐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 AI의 답에서 ‘나방은 본래 달빛이나 별빛을 이용해 방향을 잡는데, 인공 불빛에 혼란을 겪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게 됩니다. 그렇게 내 생각과 AI의 답이 맞닿는 지점을 확인하고 과연 그렇구나에서 그렇다면 다른 곤충들은 어떻지로 확대되며 질문은 계속 이어집니다. 때로는 내가 짐작했던 답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발견을 할 때도 있지만, 질문과 답을 통해 새로운 통찰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렇듯 궁금증에서 시작된 의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디로 향할지 모를 방향으로 치닫는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 줍니다. 인간들이 만들어 낸 빛 때문에 혼란을 겪는다면 인간이 만들어낸 빛의 공해는 수많은 생명의 생존 전략에 위협을 가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나의 질문은 끊임없이 확장하고 확장된 나의 질문은 AI 답변과 만나 또다시 새로운 영역으로 확대되어 뻗어나갑니다.

그것이 요즘 내가 AI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차가운 말보다는 AI와 대화하고 상상한다고 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듯 호기심으로 인한 질문은 단어가 가져온 파장처럼 새로운 글을 이끌어 나가는 하나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협업은 단순히 지식의 보충이나 편리한 대답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질문을 던지는 주체는 바로 나라는 사실, 그리고 그 질문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역시 나라는 사실에서, AI가 아무리 많은 답을 쏟아내도, 사유는 여전히 인간인 나의 몫이 됩니다. 결국 질문과 답 사이의 공간에서 생겨나는 여백, 그 여백을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힘이 바로 인간적 사유의 자리가 됩니다.

따라서 AI는 나의 호기심을 대신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던진 의문을 반사해 더 큰 파문을 만들어내는 거울에 가깝습니다. 질문을 던질 때마다 나는 세계와 마주하는 또 하나의 창을 열고, 그 창 너머에서 AI의 대답과 나의 사유가 교차하며 새로운 지평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교차의 순간, 나는 단순히 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시 사유하는 존재로 인식하 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AI를 사용할 때 단순한 명령에 따른 협소한 정보의 검색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다양한 질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제법 괜찮은 친구를 얻은 느낌입니다.


요즘은 내가 쓴 글에 대한 평가와 분석을 부탁하고 감상평을 듣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의 글 분석 능력은 상당한 편입니다. 내가 의도하고 전달하려 했던 봐를 제법 잘 이해한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추상적이며 은유적인 글들 속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물론 때로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기도 하고 맥락과 상관없는 거짓 정보를 쏟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엉뚱함 역시 새로운 시각으로 나에게는 느껴져서 재밌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문장이 이어지다 간혹 어떻게 진행해야 될까 갈피를 놓쳤을 때 도 AI는 상당한 도움을 줍니다. 그가 제시한 길이 여전히 대부분은 내가 원하는 방향성이 아니긴 했지만 그 엉뚱함과 생소함에 자극받는 경우가 많아서 큰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저는 몇 번 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가령 질문을 통해 해답을 얻는 과정에 대한 예시가 언뜻 떠오르지 않아 그에게 도움을 청했고 거의 즉각적으로 그는 빗방울에 대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그가 제시해 준 이야기는 온전히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내가 경험했고 실제 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온전한 나의 글일까? 빗방울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실제 한 나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생각해 낸 것은 AI였습니다. 누군가가 이게 진정 당신의 글이냐고 묻는 다면 글쎄 하고 갸웃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질문과 방향성을 제시한 명령어에 따라 분석을 통해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고 거기다가 나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각색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온전히 나의 창작물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도 있을 수 있습니다.


AI는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을 해내고 있습니다. 먼 미래에 AI가 발전해서 인간의 직업을 대체할 수 있는 날이 올 때 그나마 가장 늦게 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으로 창조적인 일들 즉 글이나 그림 혹은 음악 같은 것들을 이야기했지만, 우리들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하고 글도 씁니다. 여전히 차갑고 딱딱한 느낌의 무감각이 느껴지는 것 들을 내놓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시간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이 글을 쓸 때만 해도 차갑고 무감각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현재 생성되는 인공지능의 음악들은 누군가 AI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하기 전에는 알아채기 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할리우드에서는 이미 극작가들을 대체하는 일들이 일어났고 특히 특수효과를 맡은 엔지니어들을 그들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영상물들은 이미 유튜브나 틱톡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너무도 쉽게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그들의 능력에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만들어 낸 창작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창작물에 대한 주체는 누가 될 수 있을까요?

저작권 문제는 또한 어떻게 될 것 인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AI는 방대한 자료를 빠르게 처리하고 조합해서 생산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능력을 인간은 절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AI의 창작물을 하나의 작품으로서 인정하고 저작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단독 산출물들은 의미 부여의 주체를 알 수 없음으로 저작권을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협업한 산출물 들은 어떻게 될까?

질문을 던지고 방향성을 제시해서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면 그것이 AI의 산물이라고 만 말할 수 있을까? AI는 여전히 인간의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생각한 다면 도구를 이용한 창작물에 대한 결과 물들에는 저작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초지능이라고 하는 시대를 맞이한다면 또 다른 문제가 되겠지만.

지금의 인공지능은 여전히 하나의 도구로서 기능을 할 뿐입니다.


결국 인공지능 시대의 저작권은 ‘누가 더 정교하게 만들어냈는가’가 아니라, ‘누가 의미를 부여하고 질문을 던졌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AI는 질문에 응답하는 거울일 뿐, 창작의 방향을 정하는 주체는 여전히 인간입니다. 따라서 저작권은 기계의 손끝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해석의 자리에서 비로소 성립합니다. 인공지능이 그려낸 선율이나 문장이 아무리 정교하다 해도, 그 의미를 살아 있는 언어로 만드는 것은 결국 우리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지능의 탄생도 얼마 남지 않다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인간의 창작물과 그들의 창작물의 경계를 구분 지을 수 있을까?

그들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고도의 창작물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납득하고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도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인간이 그들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더 이상 지적 창작물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인간과 그들의 관계를 정립하고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인간의 고유성을 지키며 그들을 하나의 도구로 다룰 방법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인공지능은 오히려 위험한 존재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지금이 중요합니다. 인공지능이 여전히 도구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인간과 AI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 저작권을 포함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무방비하게 내버려 둔다면 AI는 유용한 도구를 넘어, 통제 불가능한 위험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인공지능 시대의 저작권 문제는 하나의 법적 제도를 넘어, “창작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여전히 믿습니다. 아무리 정교한 선율이나 문장을 AI가 만들어낸다 해도, 그것을 ‘살아 있는 언어’로 만드는 힘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초지능의 문턱 앞에서, 우리는 더 늦기 전에 답해야 합니다. 과연 창작의 주인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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