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날의 북극 Dec 26. 2024

기억에 대한 오해/카페에서의 인터뷰

커피가 알맞게 식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하얀 머그컵에 동굴 같은 짙은 어둠대신 향긋한 커피가 담겨져 있다.

그 어느 날 어느 지점에서 주머니에 있는 나의 모든 동전, 어쩌면 나의 전 재산이었을 동전으로 낡은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와도 같은 것이지만 그 맛과 향은 다를 것이다.


전재산이었을 동전으로 커피를 뽑고도 10원짜리 동전이 하나가 남았었는데, 그 동전은 어디로 갔을까?

자판기 동전 투입구로 잘그락, 잘그락 거리며 들어간 동전들은 따근한 커피 한잔으로 돌아왔지만 주머니에 남았을 그 동전은 그 후로 어떻게 되었을까?

그곳이라고 해도 10원 동전 하나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텐데.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기에도 10원 하나가 부족한 돈이다.


운 좋게 누군가가 전화를 걸다 남은 돈을  뒷사람을 위해  10원을 남겨뒀다면

내가 가진 10원과 함께 3분 정도 누군가와 연결되어 소통할 수 있는 쓸모가 있었을 텐데.


남겨진 10원 하나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쓸모없는 동전 하나는 주머니 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동전과 바꾼 따근한 커피를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자 몸 안에 작은 온기로 얼어 있던 몸에 조금씩 생기가 살아났다 .  따뜻한 커피는 내 몸에 온기를 넣고 텅빈 종이컵으로 남았다. 그러나 주머니속에서 쓸모를 찾지 못한 동전 하나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그리ㅣ고 지금에 와서야 나는 왜 궁금해하는 것일까.


잘그락, 멀리서 자판기 속으로 사라지던 동전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그래서… 소리를 내지 않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잘그락, 환청 같은 소리의 반향 같은 목소리가 테이블을 건너 나에게 질문을 한다.


"글쎄요,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자신의 필요를 타인에게 설명하고 그것을 조정하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는 어떤 필요나 무언가를 조정해야 되는 일들은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소통이라는 것 자체가 필요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가끔 무언가 필요한 것이 필연적으로 생기게 되더라도 그것을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와 같은 방식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도 알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곳 이 테이블에서 우리가 커피를 함께 하는 것처럼 제한된 자원의 무언가를 사용해야 될 일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내가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그것을 사용해야 될 일이 있다면 우리들 중 누군가는 어느 시간 어느 장소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조정을 위한 대화는 굳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필요성을 우리는 당연하게도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물 위에 던저진 작은 돌멩이가 물 위에 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이 반대편 물가에 닿듯이 우리의 마음에 일어난 생각의 파문들이 서로에게 닿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특별한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바람이 이쪽에서 불어와 저쪽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무척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가끔은 마음의 파문이 작은 틈들을 만나 사라지곤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고 그마저도 그곳에서는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습니다. 사라져서 닿지 않는 것은 그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라져도 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생각이었지 사라졌던 그들 혹은 그것들의 의지는 아니었을 거라는 게 지금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물론 그들 혹은 그것들의 의지도 아니었겠지만 그렇게 사라졌던 존재들은 어느 공간 어느 지점에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항변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그들을 잊었지만 아니 우리는 그 존재의 잊힘 조차 잊어버렸지만 그들은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알맞게 식은 커피를 든다. 하얀 머그컵과 대비되는 짙은 어둠에 내 모습이 어른 거린다.


유일한 희망처럼 내 전재산과 맞바꾼 커피잔 속에 비친 수염이 엉망으로 자라난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한 모금을 마시자 커피는 입안에 향을 남기고는 사라진다.

그날의 커피에는 향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생각이 그제야 떠올랐다.


"그날 그러니까 그 밤이라고 해야 될까요? 하루종일 하늘만 바라보다 별을 보고는 길을 나섰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떠나기 전 우리 중 누군가에게 기억을 맡겨 놓았다고 했었는데,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기억을 맡겨 놓는다는 것 그것은 은유로서의 말인 것인지 아님 실체적으로 당신의 기억을 떼어내 맡길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우리 중 누군가에게 기억을 맡겨 놓았다.'

나는 그 말의 실체성을 느끼기 위해 입으로 따라 해 보았다.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의 실체성이 구체화되지는 않았다.


나 역시 그 부분이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것은 거짓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중 누군 가라고 했지만 우리의 존재를 지금도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그것을 외부에 형상화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우리가 기억을 매일 같이 닦고 떠올리며 마룻바닥의 틈으로 사라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는 말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저의 기억은 당연하게도 온전히 저에게 있습니다."


"물론 완벽하게 모든 기억이 남아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누구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자가자신의 기억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들은 차츰차츰 쇠퇴하기 마련이고 중요치 않은 기억들은 마룻바닥의 틈이 아니라도 스스로 소멸하거나 잊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중요성과 필요성은 기억에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쩌면 무작위적인 선택일 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잊혀진 기억의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하거나 원망스러운 것도 사실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사라져야 할 것은 사라져야 되고 살아남은 것은 이렇게 살아남아 실체의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존재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알 맞게 식은 커피는 이제 차갑게 식어버렸다.


어느 공간 어느 지점에서 나에게 온기를 더해주던 커피가 몹시 그리워졌다.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던 그곳

죽음 같은 추위 속에서 그날.

나에게 남은 10원짜리 동전 하나가 무겁게 느껴졌었는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이곳에 내가 있음을 알리고 싶었지만

동전 하나로는 그 마저도 불가능했던 그곳 그 지점에서

나는 당신도 거기 있지 않았냐고 물었었다.


대답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나는 기다렸다.

목소리를 내지 않더라도 소통을 할 수 있던 떠나온 그곳이 그렇게 그립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우리 중 누군가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났습니까?"

"아니 우리 중 누군가와의 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중 누구를 만난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죠?"

"그래서 우리 중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이 났습니까?


"그래요 우리 중 누군 가를 저는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맞습니다. 대화의 내용은 아무리 생각해 보려 해도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우리 중 누군가를 만난 것은 확실합니다."


"그 지점 그곳에서 동전 하나가 부족해서 당신에게 연락할 수 없었지만 우리 중 누군가는 바로 당신이었지요."


"당신이 우리 중 그 한 사람이라는 것을 저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테이블 너머 그(그녀)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본다.


"그런데 당신 누구십니까?"


그 물음을 끝으로 그(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알맞게 식은 아니 이제는 차갑게 식은 커피잔에도 나의 거친 얼군은 비치지 않는다.

멀리서 잘그락 거리는 동전소리가 자판기 구멍 속으로 들어가 사라진다.

잘그락 거리는 소리도 끝내 사라지고 주머니에 남은 10원 동전 하나는 당연하게도 사라지고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