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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림 Aug 29. 2024

오 선생님과 박 선생님

사회복지사, 그중에서도 '장애인복지'한다,라고 하면 꼭 따라붙는 말이 있다.

'좋은 일' 하시네요.

그리고 그다음 이어지는 말은 사람을 아주 난처하게 만드는데 그게 바로 이와 같은 문장이다.


"그런 데는 '좋은 사람'만 있을 테니…."

뒤에 이어지는 말은 굳이 적진 않겠어요. 결코, 절대, 네버에버 아닙니다. 아니에요.


복지관도 사람 모여사는 곳, 조직이고 사회이기 때문에 별별 사람이 다 있다. 

똑같다. 당신이 속한 그곳, 그 조직, 그 사회와 다를 게 하나 없다.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말을 하나 싶고, 하루 종일 거기 앉아 뭘 하고 있나 싶고,

'너는 어디 가서 사회복지사라 하지 마라.' 같은 말이 드릉드릉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게 물꼬를 터 놓고 나니, 갑자기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글이 갑자기 쏟아진다.


매일 저녁마다 이슬 한두 병을 꼭 마셔야 하는데 젊은 여자 직원을 대동해야지만 술이 넘어가는 

딸 바보 아빠와 그러면서 술값은 1/n 하는 공사 구분이 확실한 인간 계산기, 

전체 회식을 매우 사랑하는 나머지 누구 하나 얼굴 하얗게 앉아있는 꼴을 보면 

입에 가시가 돋는 박애주의자, 근무 시간에 야구 중계 시청과 주식, 코인 거래하는 멀티 태스킹의 귀재부터 

나는 되고 너는 안 돼,를 매 순간 시전하는 내로남불에 이르기까지.

복지관이고, 사회복지사이고, 아무 관계없다. 

여기 있다 보면 다 똑같은, 정말 별별 인간군상을 다 만나볼 수 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냐? 글쎄, 왜 알고 있을까요.

별별, 변태 같은 인간과 변태 같은 짓거리를 더 쓰고 싶으나, 지면이 아까운 관계로 이만 줄이겠다.




아주 최근 한 동료에게 들은 말이 있다. 

얼마 전 모 복지관을 나와 일 년간 세계 이곳저곳을 찾아다닐 계획이라 했던 동료, 

그는 상사와 뜻이 맞지 않아 여러 번 부딪혔고, 어느 순간부터 서로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다.

매월 25일이면 '따박따박' 들어오는 급여, 순서가 되면 당연히 얻게 될 직급과 권한, 

업(業)으로서 나쁘지 않은 이미지, 말 그대로 안정적인 자리였고 미래를 보장받을 있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뚜벅뚜벅, 자기 걸음으로 그곳 문을 열고 나와야만 했다. 

사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문제의 그 상사를 이렇게 옹호한다.

그 사람 입장에서 바로 아래 직원에게 '무시' 당함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사에게 그 점은 미안하고 잘못했다,라고. 

동료의 이 말은 이십여 년 전 우리 아버지가 했던 또 다른 말과 한 묶음인 양 

또 다른 장면을 가볍게 건져 올렸다. 


아버지는 한 사람을 평가할 때, 여러 각도에서, 여러 측면으로, 다양하게 두루 살펴봐야 한다,라고, 

아무리 밉고 싫고 이해가지 않는 작자라도, 그렇게 함이 옳다,라고, 

어린 나를 앉혀놓고 꽤나 장황하게 설명하고 했다.

 

사실 동료의 말을 듣는 그 순간까지 나는 어느 누군가를 평가절하했고 비난했고 '무시'했다. 

그가 지금 그 자리에 있기까지, 나름대로 노력을 했을 텐데, 

썩고 곪고 터진 마음에도 늘 웃는 얼굴을 하고 버텨왔을 그 노고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했는데,

그간 나는 그 점에 대해 참 미숙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좀 미안하다. 아니 많이 미안하다. 

아주 면전에 대고 무시하진 않았지만 분명 티가 났을 것 같다. 

웃는 얼굴 뒤론 그 사람을 매우 무시하고 저주하고 내적 꼽(?)을 주는, 

비겁하고 수준 낮은 비아냥 거림을, 아무 생각 없이 되뇌곤 했던 나를 고백한다.

더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다. 

존경까진 솔직히 아닌데요. 그래도 그간 쏟은 시간과 '나름'의 노력에 대해서는, 존… 중해요.

 



올해 정년 퇴임을 앞둔 오 선생님, 선생님은 복지관에서 차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일을 담당한다.

헌 차부터 새 차까지, 복지관 소속 차량부터 외부에서 들어오는 차량까지, 

차란 차는 모두 오 선생님 손과 발과 눈을 거쳐야 한다. 

차량을 안전하게 유지, 관리하고 시간마다 순환 차량 운전하는 일이 오 선생님의 주요 일과였다. 

오 선생님은 근속 기간이 십 년이 넘었으며, 그 십 년을 매일같이 왕복 서너 시간 되는 거리를 출퇴근한다.

그럼에도 늦는 법 없다. 오히려 일찍 오는 편.

비 오는 날은 물 새고 들이치는 곳은 없나, 싶어 일찍 출근하고

(건물이 낡고 오래되어, 여기저기 손 볼 곳이 많다.)

오는 날은 복지관 비탈에 쌓인 눈을 쓸어 놓아야 하기에, 일찍 출근하고.


나는 종종 오 선생님과 나란히 걸어 출근했다. 

출근 시간이 엇비슷했기 때문인데 나이 차이가 스무 살 넘게 났음에도, 

선생님과의 출근 토크는 매번 편안하고 유쾌했다.

그리고 몇 년 전 그날, 나는 횡단보도에서 만난 오 선생님으로부터 꽤나 충격적인(?) 말을 듣고 만다.

 

"선생님, 아침 출근 시간이 얼마나 걸리세요?"


스몰 토크 강박(?) 같은 있는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두어 시간 걸리네요. 그래도 지하철 끝 역이라서 편히 앉아와요."


듣던 나는 "힘들진 않으세요?"라며, 역시 특별한 의도 없이 되물었는데 이 질문에 오 선생님은 


"선생님, 저는 '출근하기 싫다'라는 말을 딱 두 번 해봤어요. 

그 두 번 다 열흘 가까이 쉬다 나올 때였거든요. 그래서 딱 두 번. 저는 출근하는 게 좋아요."


나는 매우 큰 충격으로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사실 그날 아침에도 더운 날씨에 출근하기 싫다, 집에 가고 싶다, 누워 있고 싶다, 

휴가 쓸까? 같은 말을 들숨에 한번, 날숨에 또 한 번 하며 문밖을 나왔기 때문이다. 

충격 다음에 이어지는 감정은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는 넉넉잡아 편도 한 시간이면 출근할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고,

환승 없이 한 번에 오갈 수 있으며(물론 7호선 지옥철에, 매번 온몸이 다 찌그러진 상태로 하차해야 하지만)

부양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없고, 정말 나 하나만 잘 살면 되는 아주 마음 편한 사람인데,

그럼에도 이 귀한 아침을 매번 징징대며 시작했네. 나란 인간은 아직 한참 멀었구나.


"차라리 출근해서 일하는 편이 나을 때가 있어요. 세상에는 계획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거든요? 

그런데 복지관 일은 그게 어느 정도 가능해요. 매번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그냥 맡은 일 하면 되잖아요. 하다 보면 조금씩 진전되고, 나아지고, 해결되고.

그런데 세상 일은, 가정 일은 그게 잘 안 돼요."


오 선생님은 지난 십 년 넘는 시간 동안 복지관 여러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왔고,

그 도움 덕에 살았으며, 그래서 틈만 나면 몸을 움직여 이에 보답하고 싶다,라고 했다. 

정말 오 선생님은 매일매일 차량 관리하고 운전하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복지관 텃밭과 화단의 잡초를 뜯고 약을 주고 물을 준다. 

땡볕 아래에서 온몸을 다 적셔가면서도 힘들다, 못하겠다, 한 적이 없다. 

"저는 머슴 팔자라서, 가만히 있는 게 더 힘들어요."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아침 일찍부터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이는 오 선생님을 보며 나는,

투덜대지 않고 징징 대지 않고, 기쁨과 감사로 매일매일을 꾸려가는 참 어른의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를 닮고 싶다.

물론 오 선생님 발치에도 가닿지 못할 것을 알고 있지만.




오 선생님이 좋은 남자 어른의 대표라면, 박 선생님은 좋은 여자 어른의 대표이다. 

박 선생님은 오십 대 중반, 다 큰 아들 둘이 있고 복지관 근속은 역시 십몇 년이나 됐다.

선생님은 우리 복지관 유일의 '상담심리사'이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상담을 전공했고 이십 년 넘게 청소년, 장애인 영역에서 심리상담을 하고 있다.


아마 이곳에서 함께 근무하는 사람 중에 선생님을 싫어하는 이는 없을 것 같다. 아니, 없다.

정말 모든 직원의 추앙을 받는 분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모두의 존경을 받는 박 선생님과 나는 종종 커피 한 잔 하는 사이이다. 

작년 여름에는 무려 박 선생님이 '먼저' 커피 탐방을 제안했다.


"선생님, 우리 점심 먹고 여기 앞에 유명한 카페로 커피 한 잔 하러 갈래요?"

박 선생님의 메시지에 나는 한치 고민 없이, '무조건' 갑니다, 가야지요,라고 자판을 눌러 답장했다.

그해 여름 나는 박 선생님, 그리고 또 다른 동료 선생님 한 분과 함께

'젊은 사람' 느낌 나는 세상 힙한 감성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했다.


박 선생님은 그런 분이었다. 

스무 살 어린 직원에게 커피 한 잔 해요,라고 먼저 묻는 사람, 

그리고 그 직원은 나를 포함하여 누구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무작정 따라나서게 하는 그런 사람,  포근하고 부드럽고, 

그래서 그분 주변에만 머물러도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사람, 박 선생님은 그런 어른이다.

이게 뭐 특별하냐, 싶은 사람도 있을 테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보세요. 자, 주변에 자기 보다 스물몇 살 많은 사람을 생각한다,

그 어른이 점심 먹고 커피 한 잔 하자, 제안했다, 그렇다면 당신의 반응은? 

기쁜 마음으로 따라나설 만큼, 존경하고 좋아하고 편안하며 닮고 싶은 그런 어른이

당신 주변과 당신이 속한 조직에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아주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저처럼요.


맑고 밝은 사람, 손익 계산하지 않는 사람, 어디 한 군데 꼬인 데 없는 사람,

오십 대 중반에도 때 묻지 않은 마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 박 선생님.

선생님의 그런 심성은 몇 년 전 겨울, 폭설 오던 어느 날 아침에 진가를 발휘했다.

우리 복지관은 올라오는 비탈이 매우 가파른 편인데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정말 답이 없다.

오 선생님은 눈 쓸 생각으로, 그렇지 않아도 일찍 오는 편인데도 더 일찍 나와 제설을 시작하는 분이라면

박 선생님은 출근하자마자, 한치의 망설임 없이 바로 나가 눈을 쓰는 분이었다.

그해는 특히 큰 눈이 많이 왔다. 그리고 그날 나는 (정말 솔직히) 눈 쓸러 나가고 싶지 않았다. 

춥기도 춥거니와, 아침에 할 일이 있어 평소보다 일찍 나왔는데 

와서 보니 눈이 꽤 두껍게 쌓여 있었고, 일찍 온 죄로 다른 사람보다 많은 눈을 쓸어내야 하는 게 

영 불합리하단 생각을 했다. 조금은 억울한 마음이 들어 조용히 투덜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천천히 올 걸.

오 분만 있다 나가야지, 사람 오는 것 좀 보고 나가야지, 하고 있었는데

곧이어 온 박 선생님, 선생님은 패딩 벗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짐만 대충 내려놓고서는 바로 장갑만 들고나가는 박 선생님을 보며, 순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하, 나란 인간…. 빨리 일어나라, 가서 거들어야지.


박 선생님은 어떻게 하면 고생하고, 어떻게 하면 손해 보고, 

이득이고 따위를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늘 그렇게 했으니까, 밖에 다른 동료, 선후배가 먼저 눈을 쓸고 있으니까, 

힘이 들 테니까, 단지 그 이유였다.


매해 겨울, 복지관 앞뒤 마당과 비탈 눈을 쓸 때마다 나는 그때 그 장면을 생각한다. 

닮고 싶다, 박 선생님이란 사람 자체를. 

그 맑고 밝음을, 따뜻하고 포근함을, 계산하지 않고 꼬아보고 꼬아 듣지 않는 박 선생님을, 

궂은일 앞에 직급과 나이, 다른 핑계 대며 사라지지 않고 매번 솔선수범하는 박 선생님을, 

나는 박 선생님의 아주 작은 일부라도 닮고 싶다.  




'우리 현장 사람'이라 하면 다른 사람 '복지'를 이루는 데 소명과 사명, 

어느 정도 '뜻'을 두고 이를 업(業)으로서 삼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안에 들어와서 보면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거기에서 거기, 특별할 게 하나 없다.

반복해서 하는 말이지만,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그럼에도,

이 엉망진창, 난리법석, 늦은 사춘기와 이른 갱년기로 매일매일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와중에도

우리 현장을 여전히 긍정하고, 아직 '우리 현장 사람' 중 한 명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바로 오 선생님과 박 선생님 같은 분 덕분이다.

사실 더 있다. 존경하고 좋아하고 닮고 싶은 어른, 나에게는 그런 분이 꽤나 많다.

다른 분야, 다른 직종과 비교하면 그럼에도 이곳이 조금, 아주아주 조금 더 나은 곳이라고,

물론 '정말 영 아니다' 싶은 사람도 있긴 하다마는, '조금 이상한데?' 싶은 사람 중 다수는

각자 자기 위치와 역할, 책임과 의무, 그간 겪어왔던 삶의 다양성 때문에 

나와 조금 맞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오 선생님은 큰 이변이 없는 한, 올해 말 정년퇴임한다.

가끔 한번씩 만나 출근 토크 나눌 있는 날이 반년도 남지 않았음을, 

더위가 한풀 꺾인 요즘에야 실감한다. 

나는 오 선생님에게 배운 게 많다. 


봄이 오면 은행나무 기위로 고개를 내민 작은 초록이 

우리가 아는 '은행잎'의 모양을 갖추어 과정을, 아침저녁으로 살펴본다.

오 선생님 덕에 나는 매미 울음소리만으로도 서로 다른 매미 이름을 알아맞힐 수 있는 사람이 됐다. 

매앰매앰, 이렇게 울면 참 매미고요. 

쓰릅쓰릅, 하면 쓰름매미예요. 쓰르라미,라고 하는 곳도 있더라고요.

잘 들어봐요, 분명 다르지요?

여름 더위가 한창일 때는 복지관 풀밭 한 구석에 핀 보라색 꽃이 '도라지'임을 알고 있고

가을에는 우리 복지관 단풍이 이전 같지 않아 매년 슬퍼한다.

겨울에는 부숭부숭한 솜털 깍지를 입고 내년 봄을 기다리는 목련 꽃눈에게 마음을 쏟곤 한다. 

봄을 기다리고 있구나, 나도, 나도 그래.

오 선생님이 떠난 다음에도 나는 오 선생님과 함께 했던 장면장면 덕에 

사계절을 꽤나 근사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오 선생님의 앞날을 전심으로 축복한다. 


언젠가, 이 글을 다듬어 오 선생님, 그리고 박 선생님에게 선물하고 싶다. 

한 가지 더 욕심을 내보자면, 

정말 정말 큰 욕심을 내보자면, 나도 이 두 분처럼 '우리 현장'의 좋은 사람,

좋은 선배, 참 어른으로 기억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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