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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림 Jul 25. 2024

복지관 '올드 걸'

작년 말 합정, 근 일 년간 함께 읽고 쓰고 공부했던 선후배, 동료와 오랜만에 만난 자리였다.

먼저 모인 사람끼리 그간의 근황을 나누었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평온한 듯, 평온하지 않은.


그리고 다음은 탁자 끄트머리에 앉은 한 선배 차례였다.

선배는 엊그제 전 직원이 함께, 어디 먼 곳에 다녀왔다 한다.

몇 년 전부터 MBTI 만큼이나 온갖 데에 다 갖다 붙여 활용하는, 

그 쓰임이 썩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세대차이'를 타파하기 위한 자리라고.

MZ가 어떻고, X는 뭐고. 

아무튼 서로 간 차이를 알고 포용하고 이해하자, 이런 취지였다.


사실 우리 현장에는 진작부터 '세대 차이'라는 사용되어 왔다. 주로 부정적인 측면으로 두루, 널리.

다만 한 사람을 출생 연도에 따라 거칠게 묶어 분류하고 

이 세대는 이런 특성이 있어, 저 사람의 언행을 보니 딱 그 세대답네, 하며 판단하는 게 조금 불편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쓰지 않으려 한다 만은, 

한 번 이런 마음이 든 이상 그 이전으로 아주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싶다. 


아무튼, 선배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 복지관 올드 걸 몇몇이 말이에요."

가만히 듣던 나는 풉, 하고 웃음이 났다

"올드 걸이요?"

더 들어보니, 이때 '올드 걸'은 한 기관에서 중간 연차즈음되는, 

주로 삼십 대 중후반 직원을 지칭한다.

그날 그 '올드 걸' 몇 분이 과음을 했고, 한바탕 눈물 바람이 몰아쳤고 이내 스르륵 사라졌단,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 알 것도 같다.

그 '올드 걸'이 그간 다른 사람 복지와 지역사회 복지, 조직을 위해 쏟은 힘과 시간, 마음, 노력과 희생을,

그렇게 했음에도 텅 빈 손과 통장 계좌, 기력이 쇠한 몸과 마음 밖에 남은 것이 없어, 

서럽고 서글프고 억울하고 화가 나서, 그렇게 울 수밖에 없었음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는 인물마다 메인 캐릭터가 다 다른데, 

캐릭터에 따라 인물의 주된 감정, 즉, 기본 감정이 결정된다. 예를 들어 주인공 라일리는 '기쁨 Joy'.

그렇게 치면 나는 기쁨과 슬픔이 각각 절반정도 섞인 캐릭터가 컨트롤 머신 앞에 있어야 함이 맞다.

그런데 최근에는 영 익숙지 않은 캐릭터가 자꾸 가운데 자리로 머리를 들이민다. 

바로 '짜증'이다. 

요즘 나의 주된 감정이 바로 이 녀석인 탓에 그간 감춰왔던 매우 예민하고 깐깐까칠하고

어느 순간 욱욱 분노가 치솟으며, 팔짱을 단단히 끼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웃갸웃하는,

'올드 걸'의 면모가 갑자기 발동되고 만 것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반년 전, 선배를 통해 알게 된 그 '올드 걸'이 바로 여기 있었구나.

그게 바로 나였구나, 세상에.


'올드 걸'이 아닐 이유가 없긴 하다. 

나이도 그렇고 경력도 그렇고, 지난 십 년 간 물불 가릴 새 없이, 손익 계산하지 않고 

일과 일터에 쏟아부은 힘과 시간, 마음, 그간의 애씀을 생각하면 

'올드 걸' 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을  '올드 걸'이다. 


이 말을 주변 동료에게 하니, 

"나는 선생님보다 나이가 좀 더 많잖아요. 그럼 '투 머치 올드 걸'인가?"라고 했고

또 다른 동료는 "올드 old라는 말과 걸 girl이라는 단어를 같이 쓰는 게 맞아요?"라며 반문했다.

뭐, 윗 말에는 웃고 말았으나, 

뒷 말에는 오, 그렇네. 그럼 올드 '걸'임에 고맙다 해야 하는 건가?, 하며 

괜히 의미 파악하는 척, 고민하는 척했다.(척만 했다.)


여기에 나는 한술 더 떠 앞에 몇 개 단어를 끼워 넣어가며, 

지금 나를 설명하는 최적의 표현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히스테릭' 올드 걸, 아니면 '크리티컬' 올드 걸? 아니다, '센서티브'? 아무튼 대충 이렇게.

지금 상태로 몇 년 더 흘러 마흔 살 즈음되면 정말 저 지경이 되어있을 것만 같다. 

위 동료에게 이 표현을 알려주며 "나중에 나이 더 들면 나를 이렇게 불러주오."라고 하니 

동료는 질겁하며 절대 그럴 수 없다 했고, 

'투 머치 올드 걸' 선배 역시 그렇게 될 리가 없다 했다. 

웃고 만다. 

정말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텐데. 요즘 자꾸 저 단어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안 되는데, 그냥 올드도 서러운데 '크리티컬' '히스테릭' '센서티브'하면 정말 답도 없지.




그렇다면 옳게 된 '올드 걸'의 덕목은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세 가지를 기준 삼아 옳게 된 선배, 옳게 된 '올드 걸'을 판단한다.

   

첫째, 주변 사람의 안부, 안녕을 살뜰히 살펴보는 선배.

"요즘 어떻게 지내요?" "마음은 어때요?" "괜찮아요?"라고 먼저 묻는 선배이다. 

지난 십 년 간, 그런 선배가 늘 곁에 있었기에 그 모습을 보고 마음에 깊이 담아뒀다. 

선배의 그 한마디는 꽤 큰 힘이 됐다. 

그렇게 물어왔을 당시 그 선배는 나와 팀이 같은 것도, 공유하는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이, 결혼 유무, 자녀 유무, 사는 곳, 처한 환경 등등 무엇 하나 같은 게 없다.

그런데 그렇게 물어오는 것이었다. 

한참 선배가 나 같은 사람에게, 나 따위 사람에게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구나, 나를 살펴봐 주었구나, 하는 감각.

그 덕에 나는 고단하고 막막막연하고, 울고불고 난리난리치면서도, 얼렁뚱땅, 우당탕탕하면서도 

아직 현장에 남아 자기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둘째, 자기 실천 바탕, 다시 말해 신념과 이론, 그리고 그간 해온 실천이 일치하는 선배.

쉽게 말해 실력, 능력 좋은 선배이다. 이때 실력, 능력은 일을 빨리 많이 하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일을 빨리, 많이 하는 건 사실 '하다 보면' 얼추 된다. 

나는 '일 머리'라는 게 없다시피 한 사람인데 이런 나조차도 해온 일의 양과 시간이 쌓여가다 보니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많은 일을 해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만일 같은 일을 십 년, 이십 년 했음에도 신념이랄 것도 없고, 

공부를 게을리하며 실천이 중구난방이면, 솔직히 좀 그렇지 않나. 멋이 없다, 멋이. 

('멋대가리'가 없다.)


사실 어떤 사람은 지난 나의 실천을 놓고 왈가왈부하기도 한다. 

"딱 최 선생 사업이네." 하는 식. 색깔이 있다, 개성이 있다,라는 말인 듯한데, 가만히 뜯어보면

"또 그 방식이야" "그때 했던 사업과 뭐가 달라?" 하는 비아냥이 섞여있을 때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주로 한 사람을 자주 깊이 만나 신뢰를 쌓고, 

적은 사람이 한데 모여 차 한 잔, 밥 한 끼, 책 한 권, 글 한 편 나누는, 

그런 류의 사업을 했고 또 할 예정이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알고 이해하며 응원, 지지, 칭찬, 위로한다. 

그리고 이게 사람 사는 맛, 사람 사는 멋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사업가로서 나의 주특기, 잘 도울 수 있는 일이면서 무엇보다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자기 색깔, 자기 개성만을 고집하진 않되, 자기만의 신념은 확고하며, 

틈틈이 이를 다듬어 점검하고, 때때로 유지보수하고, 

그리고 그 가운데 자기 실천을 부지런히 만들어 가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실력, 능력 좋은 선배라고 생각한다.


셋째, 할 말은 하는 선배. 사실 이게 제일 어렵다.

나이 들면 들수록, 경력 쌓이면 쌓일수록 더 많은 걸 듣게 되고 보게 된다. 

그리고 아주 최근에야 나는 '말은 해야겠다'라고 결심했다.

당사자와 대화할 때 '반존대'하는 직원에게,

당사자의 부름에 자리에 앉아 고개로만 까딱 응대하는 직원에게,

본인 보다 나이가 많은 당사자 이름 뒤에 '씨'를 붙여 지칭하는 직원에게,

그건 아니에요, 그렇게 하지 마세요,라고 말을 한다. 완곡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물론 말을 하기까지 엄청 고민한다.

관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진 않고 가만히 있자, 하니 또 거슬리고.

아주 미칠 지경이다. 

그럼에도, 할 말은 하는 선배가 되고 싶다.

우리 하는 일이 귀한 만큼, 우리 현장을 맑고 밝게 유지해야 함이 옳다 생각한다.

친밀함과 '예의 없음'은 다른 문제임을, 

당사자 장애유무와 관계없이 나이에 맞는 호칭과 존칭을 사용해야 함을, 

무엇보다 우리 하는 일의 귀함을, 그래서 더 고민해야 하고 조심해야 하고 세심하게 살펴봐야 함을, 

알려줘야 한다. 


이 주제를 놓고 나는 꽤 오래 고민했다. 지금도 그렇다. 

좋은 예 보단 좋지 않은 예가 너무 많았던 탓에 '나는 저렇게 나이 들지 말아야지.'를 초보시절부터, 

정말 수도 없이 되뇌곤 했다.

가끔 한번씩 좋은 선배를 만날 때면 그 모습을 보며 몇 번 복습했고 

때때로 이렇게 밝혀 말하기도 했다. 선배는 이런 점이 좋아요. 많이 배웠습니다. 고마워요.

그렇게 하면 열에 아홉은 손사래 치며, 

그렇게 말해주어 고마워요, 선생님 덕에 나도 많이 배웠어요,라고 한다.


옅은 기쁨으로 반짝이던 선배의 눈을 보며 나는 미래의 나를 상상했다. 

당연히 그와 같은 모습으로, 아니, 보다 나은 인품과 실력을 갖춘 진짜 선배, 참 선배의 모습으로.

시간은 쏜살같고, 벌써 나는 그때 그 선배 나이가 됐다. 

올드는 올드인데, 외양은 이미 매우 올드인데 내양은, 내실은?

나이 들어 '무르익음'일까? 물러 터져 '곪고 썩음'일까?

아주 온갖 데에 짜증이 나고 신경질 내는 나는, 그럴 만한 자질,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위 세 가지 기준을 내세우기 앞서 먼저 갖춰야 할 게 있다. 

일종의 단서조항.

선배로서 옳고 바른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너나 잘해." 같은 소리는 듣진 말아야 하지 않나.


나는 여전히 '좋은 선배' '멋진 선배' '닮고 싶은 선배'가 되길 소망한다. 

세 가지 기준에 맞춰,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긴 하나 아직은 한참, 갈 길이 멀다. 

후배가 겪는 어려움을 알아차려주고, 인정하고 지지, 응원하되

'예'를 벗어나는 후배에게 비난, 비판이 아닌 '조언'을 하는 지혜를 갖고 싶다. 


(다만 지금과 같은 '히스테릭 올드 걸'의 마음으론 될까, 모르겠다. 당분간 좀 자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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