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치 그리고 이치의 혈투
전라도 전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 후 집을 떠나 산중에 움막을 짓고 2년이 넘도록 아버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여느 날과는 달리 붉게 물든 하늘이 불길했고 따뜻했던 강토의 기운은 음산했다.
숨을 들이마실 때면 알 수 없는 서글픈 고통이 가슴을 찔러왔다.
그 순간 주위의 초목이 갈라지며 피가 낭자한 몰골의 사내가 튀어나왔다.
오래전 전주 만호로 복무하던 시절 나와 뜻이 통했던 부관이었다.
그는 처참한 몰골이 되기까지의 경위를 상세히 말해주었다.
내가 산속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왜적들이 부산포에 상륙한 뒤
경상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주상전하께서 계신 한성뿐만 아니라
경기도를 넘어 황해도, 강원도는 물론이고 함경도 까지 왜적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오직 여기 호남 땅만이 전란의 화마를 피했지만 이제 악랄한 왜적들의 창칼은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순찰사가 호남의 병사를 주축으로 삼도에서 모여든 수만의 병사들을 이끌고
왜놈들이 점거한 한성을 탈환하기 위해 거침없이 북상했다.
하지만 적과 조우도 하기 전에 탈영하는 이들이 속출했고 부대 자체가 와해되는 일이 빈번했다.
이 오합지졸의 군세는 도읍에 다다르지 못한 채 용인에서 왜적들의 기습에 철저히 무너졌다.
족히 10만에 육박하던 희망의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왜적들의 총탄을 피해 아래로, 아래로 모두 내려왔다.
그렇게 옛 부관은 혼돈의 용인을 벗어나 전주로 돌아와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3년의 시간을 온전히 지켜드리지 못한 불효에 눈물을 감추고 아버님께 마지막 큰절을 올리며
우리 땅, 우리 백성을 위해 움막을 정리하고 하산했다.
...
의병대를 일으키기 위해 부관과 함께 나와 연이 닿았던 이들을 온종일 찾아 헤맸다.
저마다 갖가지 사연이 몇 번이고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전주를, 호남을 지켜내기 위해 모두가 약속한 집결지에 모여들었다.
대부분 사람을 해쳐본 적 없는 농민이나 상인들이었고 제대로 된 갑주나 무기 따위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투지만큼은 관군들보다 뛰어났다.
용인에서의 패전 이후 충청도와 호남 북부는 그야말로 무인지대였다.
한성을 점거한 왜적들, 그리고 경상도를 유린하던 왜적들이
이곳 전라땅 전주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순찰사 이광 영감은 전주로 이어지는 요해처에 진지를 구축했고
경상도에서 밀고 오는 왜적들을 막아내기 위해 육십령, 부항령, 팔량치에 부대를 배치했다.
모든 요해처가 뚫리자 무주와 금산이 속수무책으로 적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군졸들의 사기는 대지를 뚫고 지하까지 처박혀 있었고 백성들은 모두 불안에 떨며 피란을 준비했다.
전주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
광주 목사 권율 영감의 지휘아래 많은 이들이 이치와 웅치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갔고
나와 의병들은 몰려오는 왜적들을 틀어막기 위해 웅치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김제 군수 정담, 나주 판관 이복남을 비롯하여 수많은 호남의 용사들이 수비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우린 비록 몇 백 되지 않는 조잡한 의병대로 보일 터였으나 그들은 우릴 자랑스럽게 반겨주었다.
수천의 왜적들이 남원을 향한다는 첩보가 있어 주력군인 동복 현감 황진이 군세가 남원으로 떠난 뒤
남아있는 병사들의 사기가 상당히 저하되었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웅치 고개 방어작전의 지휘관인 김제 군수는 우리가 정규군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손하게 대우해 주었고
조심스럽게 어디를 수비할 것인지 물어왔다.
오늘 길에 둘러보니 크게 세 군데의 방어선이 었었다.
난 즉시 대답했다.
"어디를 가든 이곳이 뚫린다면 어차피 죽음뿐이니 1진에서 가장 먼저 왜적들을 맞이하겠소."
물러섬 없는 나의 결단력에 군수와 판관은 감복하며 연신 고마움을 전했다.
옛 부관과 함께 지체 없이 우리의 자리를 찾아 1진으로 이동하니 웅치의 최전방에는 관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맞이하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드러났지만 그 누구도 물러서는 이 없이 자리를 지켰다.
그들의 대장인 오정달과 결의를 다졌다.
'왜놈들 단 하나도 이곳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리라..'
...
깊은 새벽,
웅치로 이어지는 소로를 따라 산새들이 모두 날아갔다.
사방이 풀벌레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해진 그 순간
육중한 발걸음 소리와 울려 퍼지는 고동 소리가 온 산천에 진동했다.
어둠에 몸을 숨기며 눈앞에 나타난 왜적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자
가장 먼저 활을 쏘아 선두에 있던 왜장의 심장을 꿰뚫었다.
하지만 놈들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계속해서 밀고 들어왔다.
다가오는 녀석들의 목덜미에 창칼을 박아 넣으려는 찰나 정신을 날려버리는 날카로운 굉음이 쏟아졌다.
괴성과 비명 사이에 놈들이 쏘아대는 총성이 지저분하게 뒤섞이며 전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목책 뒤에 몸을 가렸지만 사방에서 총탄이 뚫고 들어왔다.
지척까지 다가온 왜놈들이 장창을 쑤셔대고 날랜 놈들이 목책을 넘어와 무자비하게 칼날을 휘둘렀다.
소문만 무성하던 악랄한 놈들의 지독한 싸움이 눈앞에 닥치자
내 생각, 내 행동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무의식의 경계에서 그저 살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왜적들의 칼날이 팔, 다리를 지나쳤다.
스친 건지 잘린 건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다치는 대로 흉악한 몰골을 한 놈들을 베고 또 베었다.
괴성과 비명이 환호로 바뀌는 순간 왜놈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고작 선발대였다.
구풍은 아직 다가오지도 않았는데 한차례 소나기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동이 트자 놈들의 본대가 들이닥쳤다. 죽은 이를 애도할 시간도, 진지를 정비할 시간도 없었다.
터져 나오는 포탄과 총탄의 굉음 속에서 목책을 경계로 피가 난무하는 육박전이 시작되었다.
악전고투하며 왜놈 수 십을 베었지만 오히려 놈들의 숫자는 늘어만 가며 1진 전방의 목책이 하나씩 무너졌다.
압도적인 적의 기세를 버틸 수가 없었다.
물러나는 중에도 전선을 유지하며 쫓아오는 적들의 심장을 향해 우리의 칼 끝을 내밀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함께 결의를 다졌던 오정달이 적의 군세에 뒤덮이며 사라졌다.
살아남은 관군을 수습하여 함께 2진으로 후퇴했다.
2진의 수비대장 나주 판관 이복남과 함께 다가오는 적들을 도륙했으나 전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우리 병력을 가뿐히 초월하는 대 군세와 위력이 다른 병장기에는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어
웅치 고개 최후의 보루인 3진으로의 철수를 서둘렀다.
흉악한 왜적들이 우리 뒤를 바짝 쫓아오며 탄환을 날려대고,
의로운 용사들은 쫓아오는 왜적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대며
웅치 고개 최후의 진에서 호남의 운명을 걸고 혈투가 벌어졌다.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육신이 온전치 못한 수많은 시체가 곳곳에 널브러졌다.
산을 타고 올라오는 이도, 아래를 보며 막아서는 이도
누구 하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괴성을 지르며 서로룰 죽이기 위해 발악했다.
지휘관인 김제 군수 정담부터 아래의 말단 병사와 의병들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의 마지막 한 줌까지 짜내며 사력을 다해 자리를 지켜냈다.
...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된 지독한 싸움이 해가 질 때까지 처절히 계속되었다.
올라오는 놈들도, 막아서는 우리도 휘두르는 창칼에 힘이 사라졌다.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제 군수가 적진의 붉은 기 아래에 백마를 타고 있는 적장을 쏘아 죽이자
지옥불처럼 사납던 적들이 드디어 등을 보이며 물러났다.
처절한 전투에 잊고 있었던 호흡을 되찾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때 어둠 속에서 묵 빛의 갑주를 입은 놈들이 기세등등하게 튀어나왔다.
우린 매 순간 죽음을 곁에 두고 숨이 넘어가도록 싸웠지만
놈들에게는 싸우지 않고 기회를 엿보던 병사들이 넘쳐났다.
모두가 김제 군수에게 후퇴를 권했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고 꼿꼿이 서서 마지막 남은 화살을 날리며 말했다.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의 기세를 높일 수는 없네."
괴성과 비명이 넘쳐나고 폭음과 총성이 난무하는 이 아수라장에서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고 대장의 자리에 어 있는 훌륭한 사내의 정의로운 기개였다.
나 역시 이 전장에 남아 그의 곁에서 함께 하고 싶었다.
나를 따라 이 웅치로 달려와 외롭게 죽어간 이들을 위해서라도 이곳에 남으려 했다.
하지만 이 작은 등 뒤에는 나를 따르던 용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김제 군수도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며 단호하게 떠나라 명령했다.
아쉬움,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과 사명감 속에 여러 감정이 뒤섞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옮겼다.
퇴각한 우리들은 나주 판관의 군세를 따라 안덕원의 골짜기에 매복했다.
꽤 많은 왜적들이 웅치를 넘어 이곳까지 밀고 들어왔는데 그 어디에도 김제 군수의 병력은 보이지 않았다.
죽음을 곁에 두고 복수를 위해 마지막 전투에 몸을 떠미려는 그 순간
맹렬하고 저돌적인 기세의 군대가 거대한 돌풍이 되어 왜적들을 집어삼켰다.
황진 현감과 동복의 군세였다.
현감의 부대는 왜적들의 진중을 돌파하며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나와 나주의 군사들은 울분을 토해내며 왜적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정공의 분투를 짓밟고 넘어온 왜적들은 여기 안덕원에서 몰살되었다.
...
웅치를 향한 적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그보다 더 거대한 위협이 이치 고개를 향하고 있었다.
전주로 입성한 뒤 몸이 성한 이들은 절제사 영감(권율)을 따라 이치 고개로 진군했다.
영감은 나에게 웅치에서의 분전을 치하하며 후군장이 되어 선봉인 동복 현감의 뒤를 지원할 것을 명했다.
적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빠르게 접근해 왔다.
여러 부대가 교대로 공격하는 듯 쉬지 않고 매섭게 덤벼들며 우릴 향해 탄환을 쏟아냈다.
총포 소리가 온 산천을 시끄럽게 울려대며 우리의 정신을 흔들어 놓았지만
동복 현감은 나무 사이를 옮겨 다니며 놈들의 총탄을 피해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왜적들의 시체가 곳곳에 쌓이고 피가 넘쳐흘러 초목까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의 분전에도 밀려드는 왜적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현감을 향해 탄환이 비 오듯 쏟아졌다.
'탕, 탕, 탕'
최전선에서 용맹을 자랑하며 적들을 유린하던 현감이 탄환을 맞고 쓰러졌다.
왜적들이 삽시간에 들이닥치며 현감을 포위하려던 그 순간
나 후군장 황박이 적진의 한가운데로 뛰어들며 놈들을 도발했다!
웅치의 싸움에서 느꼈던 그 감각이었다.
왜적들의 칼날이 팔, 다리를 지나쳤다.
스친 건지 잘린 건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언가가 가슴을 뚫고 등 뒤로 날아갔다.
또다시 무의식의 경계에서 적들과 마주하며
그저 닥치는 대로 흉악한 몰골을 한 왜적들을 베고 또 베었다.
놈들의 피를 뒤집어쓸수록 숨 쉬는 방법을 잊어버리며
점점 눈앞이 어두워지고 희미하던 소리마저 사라졌다.
훤히 보이는 왜적의 목덜미에 칼을 휘두르려 했지만 이제는 움직여지는 것이 없었다.
육신의 힘이 다한건지, 팔이 없는 것인지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주위엔 오로지 공포에 짓눌려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는 왜적들 뿐이었다.
내 목숨 하나 바쳐 황진을 살려냈다면 그는 반드시 더 많은 이의 목숨을 구해낼 것이니
이것으로 되었다.
『웅치를 지키던 권율, 황진 그리고 황박의 분전과
금산을 노리던 의병장 고경명과 담양회맹군의 견제에
위협을 느낀 적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이치에서 물러나며
전국을 불태우던 왜적의 위협에서 호남을 지켜냈다.』
강력한 적과 맞서 싸워 전라도를 지켜냈지만 황박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