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억흡수 Aug 02. 2024

임진왜란 영웅전 [윤흥신]

부산 다대포의 수호신


바람을 타고 진득한 혈향이 다대진에 흘러든 순간 부산포를 시작으로 서평포에 불길이 치솟았다.

예삿일이 아니라 판단한 꿈틀거리는 직감이 온몸을 자극했다.


뒤늦게 몰운도의 수비병 하나가 급히 달려와 대마도에서 출발한 대선단이 절영도를 향한다고 말했다.


이때 서평포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내 서평진의 군관 하나가 피칠갑이 도망쳐 나와

넋이 나간 얼굴로 서평진의 상황을 마구 떠들어댔다.


부산포로 향하는 대마도발 대선단.

왜인들의 습격과 서평 만호의 전사.

그리고 서평진의 함락.


어떤 상황인지 명확해졌다.



즉시 다대포의 모든 병사들을 집결시켜 전투준비태세를 완벽히 갖추고 주변을 정탐했다.

그 순간 묵빛의 갑주를 입은 한 무리의 왜인들이

날이 시퍼런 칼을 들고 온몸에 피를 낭자한 우리와 마주쳤다.


'감히 우리 땅에서 사람을 해하다니..'


놈들과 마주쳤던 그 찰나의 순간, 앞장선 놈들의 머리 하나를 몸에서 분리시켰다.

뒤따르던 병사들 역시 놈들을 에워싸며 죄를 묻지도 않고 창칼을 휘둘렀다.

요란한 병장기 소리가 울려 퍼지자 주변에서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흩어져있던 왜인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살인에 익숙한 듯 우릴 향한 눈빛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살의 가득했고

사람을 향해 휘두르는 칼은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난전이 계속될수록 놈들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이 칼로 왜놈 여럿의 목을 베었지만 우리 병사들은 적의 칼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병사들과 함께 퇴각을 고민하던 순간 아우 흥제가 다대포의 병사들을 모아 합류했다.

안과 밖에서 협공하며 일시에 몰아치니 사납게 요동치던 놈들의 기세가 꺾이며 모두 우리의 칼날에 쓰러졌다.


힘든 싸움이었다.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었다.

잡스러운 왜놈 하나조차 이리 사나운데 서평진의 군관이 말한 대로 

수 천의 병력이 도사리고 있다니 생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부산포의 불길은 짙은 연기를 토해내며 더욱 거세게 타올랐고

되돌아온 척후에게서 경악할 만한 내용이 전해졌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군선에서 왜인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부산진성은 겨우 한 시진 만에 무너지고 첨사 정발을 비롯해 백성 모두가 살해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이길 수 있는 적이 아님을.


첩보를 전해 들은 부관들과 말단의 병사들까지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정신이 무너지고 있었다.

겁에 질린 모두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의 위치와 규모를 파악한 적이 대병을 이끌고 온다면

그땐 막아낼 도리가 없으니 당장 다대포를 버리고 피해야 하오"


시답잖은 말을 들은 나는 큰 소리로 이 자리의 모두에게 일갈했다.


"어디를 가든 우리 앞에는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막사 안에는 정적이 잠식했고 이내 장졸들의 눈에는 불꽃이 타올랐다.

급히 충원된 다대진의 병사 팔백을 불러 모아 승리를 다짐하며 용기를 심어 주었고

목책의 길목마다 쇳조각을 뿌리고 화포와 궁시를 모두 끌어모아 배치했다.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적을 기다렸지만 불안한 직감은 온몸을 들쑤시기만 했다.



어느덧 육중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적들이 눈앞에 다가왔다.

어림잡아도 우리 병력의 열 곱절은 되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흉악한 기운을 내뿜는 이가 턱을 위아래로 끄덕이자

수 천의 병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화살을 쏟아부었다.


선두에 있던 적들 수 십이 나뒹굴었지만 뒤 따라 달려오던 이들은 개의치 않고

한때 동료였던 이의 몸뚱아리를 짓밟으며 맹렬하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적들이 저마다 작은 총통을 들고 우릴 겨냥했다.


순식간이었다.

성벽 위에 있던 우리 병사들이 일시에 고꾸라지고

간신히 버티며 싸우던 병사들의 전의는 천둥 같은 총포소리와 함께 증발했다.


힘겨운 전투는 밤이 다 지나도록 계속되고

해자의 물은 점점 사라지며 포탄과 화살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상황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였다.


동이 트기 전 가장 어두운 새벽.

죽음을 초월한 용사 십여 명을 차출하여 성문을 몰래 빠져나와 방심하는 적의 측면을 타격했다.


그 자리에서 왜적 수 십을 처단하고 적을 후퇴시키며 기습을 성공시켰다.

허나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 다시 시작되는 적의 맹격을 막아내기 위해 서둘러 성벽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성벽을 지켜야 할 병사들은 우리가 기습을 준비한 사이 모두 달아났다.

오직 아우 흥제와 의로운 사수 몇몇만이 자리에 남아 손마디가 터지도록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살아남은 다대진의 용사들과 함께 성벽에 나란히 올라서서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마주하며 이 생에 남은 육신의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다.


...





『다대진 첨사 윤흥신은 모든 것이 열세인 상황에서

코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 제1번대의 공격을 온종일 막아냈지만

압도적인 병력과 철포의 화력에 이틀을 넘지 못했다.


윤흥신과 윤흥제, 그리고 다대진의 영웅들은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새끼를 잃은 산군의 포효와 같은 분노를 토해내며

왜적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임진왜란 영웅전 [황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