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명장, 조선 최악의 패장이 되다
쏴아아-
폭우가 쏟아진다.
그리고 왜적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수 천에 달하던 병사는 간데없고
오직 종사관 김여물만이 내 옆을 지켰다.
"살고자 하는가?"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할 사람이겠소."
그의 두 눈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에서 남긴 마지막 말을 가슴에 묻고 쫓아오던 왜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여진족 니탕개가 수만의 군사를 일으켜 북방을 어지럽혔다.
함경도 6진 대부분의 번호들이 배반하여 수세에 몰린 절체절명의 순간
온성부사 신립은 정예 철기병 오백을 이끌고 적들을 모조리 섬멸했다.
활을 쏘면 적장은 말에서 곤두박질치고
말을 타고 달리면 적들은 혼비백산했다.
신립의 전공은 신화 같은 영웅담이 되어 조정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 퍼지며 북방의 맹장, 조선의 명장으로 칭송받았다.」
해안 인근의 고을만 약탈하던 보잘것없던 왜구들이라 생각했는데
놈들은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경이로운 속도로 진격했다.
부산진 정발, 다대포 윤흥신, 동래 송상현, 밀양 박진, 상주 이일
팔도에서 내로라하는 명장들이었으나
귀신같은 왜적들을 상대로 모두가 쓰러졌다.
위협적인 놈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해 팔도의 장사들을 경기도로 불러들여
한강에 진을 치고 적을 격파하고자 진언했지만 철저히 묵살되며
충주에서 적을 막도록 명 받았다.
함경도에서 함께하던 용맹한 철기군을 남겨둔 채 소수의 장졸들만이 나를 따라나섰다.
이때 유성룡 대감이 징집한 경기도의 군대를 인계받았는데 그중에는 김여물이라는 호걸이 있었다.
문과 출신이었으나 그가 내뿜는 기운은 마치 대호와 같이 맹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병졸들은 난감할 정도로 싸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나마 전투 경험이 있고 말을 탈 줄 아는 이들을 모아 급하게 기병 부대를 구성했다.
적의 주력은 보병이며 조총 따위로 앞장선다 하니
날랜 기마병이라면 충분히 적의 선발대를 격퇴하고
후속부대까지 일망타진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성들, 조정 대신들, 그리고 주상전하의 열렬한 기대와 신임 속에서
공포와 두려움으로 병사들의 생기를 갉아먹는 미지의 적들을 쳐부수기 위해
우리의 발걸음은 충주로 향했다.
충주땅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고모산성에 진을 치려 했으나
왜적들은 잠도 안 자고 쉬지도 않고 오는지 어느새 문경을 넘어 지척까지 왔다는 보고가 있었다.
적이 먼저 산성을 점거했을 수도 있으니 위험을 무릅쓰고 무리하게 이동할 수는 없었다.
험난하기로 유명한 계립령과 조령을 장악하려 했지만
적의 진격 속도를 가늠할 수 조차 없어 고개를 선점하고 진지 편성이 가능할지 의문이었고
달천을 통해 적이 습격해 올 가능성도 높았다.
때마침 패전을 거듭하며 도망쳐온 순변사 이일이
조령에서 적을 정탐하던 조방장 변기와 함께 합류했다.
그는 귀신에 씐 것 마냥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왜적의 군세에 압도되어 전의를 잃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순변사를 비롯해 충주목사, 김 종사관. 변 조방장을 더불어 많은 제장들을 불러 모아 군의를 시작했다.
문경을 넘어오는 적들을 개활지로 유인하여 북방에서 위용을 떨친 궁기병의 기마 전술로
놈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구상하고 실현하려 했으나 제장들은 전원 강력하게 반대했다.
순변사는 한강으로 물러나 방어선을 구축하자 했지만 조정에서는 이미 그 전력을 허용하지 않았다.
휘하의 모두가 천혜의 요새인 조령을 집요하게 고집했고 기마를 활용하기보다 활을 선택했다.
적의 섬멸보다는 장기전을 유도하며 한성과 북방에서 병력이 모일 때까지 버티자고 말했다.
임관한 지 몇 해 되지 않은 젊은 군관조차 감히 내 앞에서 조령 방어를 내뱉기에 곤장을 쳐 내쫓았다.
물론 나 역시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바이다.
허나 출정길에 오르며 이 충주땅에 도착하기까지 우리를 지원할 부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한성에 주둔한 이양원의 방어군은 절대 이곳으로 지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상감과 조정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우리 군대는 그야말로 국운을 짊어진 최후의 군대였다.
이곳으로 몰아치는 적의 대병을 전부 격퇴하기 위해서는
불확실한 전장에서 불필요한 소모를 줄여야만 했다.
하물며 우리 군대에는 제대로 싸울만한 사람이 몇 없었다.
수천의 병사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든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제장들이 말하는 조령에는 실제로 써먹을 만한 산성이 몇 되지 않으며
험준한 산새를 자랑한다지만 오히려 포위된다면 식량과 물이 끊어진 채
이 험준한 곳에 우리가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을 것이다.
그리고 조령은 우회할 만한 샛길이 수 갈래 있었다.
곳곳의 성과 샛길을 지키기 위해 병력을 분산시키기에는 그들을 이끌 지휘관들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이미 순변사의 패장병들이 떠들어대는 악랄한 왜적들 소문에 병사들의 전의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요처마다 매복한 부대들이 왜적과 조우한다면
목숨 걸어 길목을 지키기보다 즉시 도주할 것이라 판단했다.
혹여나 출신을 알 수 없는 말단의 병사들이 변질하여
지휘관을 죽이고 물자를 챙겨 도주하리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 정도로 급조된 우리 부대의 사기와 규율은 엉망이었다.
그렇기에 그대들이 아무리 조령을 고집하더라도
나는 여기 달천의 평야를 주 전장으로 삼아
이곳으로 적을 끌어들여 모조리 격퇴하리라 마음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처참한 상황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조령을 넘은 놈들이 단월에 출현했다는 첩보를 받았다.
내가 이루어 놓은 것 하나 없는 이 전장에
믿을만한 조력자들이 없어 직접 말을 타고 달려갔지만 적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정찰을 나갔던 병사들 대부분이 돌아오지 않았고
첩보를 들고 오는 놈들은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북방을 떠나 이 생소한 땅에서 신뢰할 만한 사람이 없어
온 사방이 한 줄기 빛조차 들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 나 홀로 헤매듯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허위 보고를 하여 군율을 어지럽힌 군관 놈을 참수했다.
앞으로도 말도 안 되는 보고를 하는 놈들을 즉 참 할 것이다.
척후의 임무를 맡은 순변사와 목사의 소식이 끊어졌다.
더 이상 주변에 휘둘리지 않도록 귀와, 눈을 막았다.
*(이 시기 순변사 이일과 충주 목사 이종장은 왜군의 진격에 파묻혀 고립되어 있었다.)
단월 쪽 민가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과 조금 전까지 적이라고는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사악한 인간들의 무리가 나타나 큰길을 따라 산을 내려오는데
적들의 수많은 칼날이 햇빛에 번뜩이며 화려한 빛을 발산했다.
놈들은 수백리를 내달리고 수십 번의 전투를 치르면서도
지친 기색 따위는 보이지도 않고 귀신같은 안광이 번뜩이기만 했다.
우리 군사들은 간담이 떨어질 만큼 모두 경악하며 두려워했다.
허나 적의 형세를 자세히 살펴보니 행색이 초라하고 지쳐 보였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급하게 군사들을 독려하여 언덕을 내려왔지만
길이 협소하고 주변에 논이 많아 물과 풀이 뒤섞여 말들이 치달리기에 매우 곤란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교활한 적들이 풍우와 같은 기세로 튀어나와 우리 군사들을 난도질 해댔다.
기마대를 수습한 뒤 재차 적을 향해 과감히 달려들었지만 탄환과 화살이 순식간에 우릴 뒤덮었다.
선두가 쓰러져 가는 중에 충주성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우레 같은 조총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귀를 때렸다.
주변에 있던 정예 기마들을 불러 모아 급히 충주성을 향해 되돌아갔지만
이미 성벽을 장악한 왜적들은 우릴 향해 탄환을 마구 쏘아댔다.
모든 계획이 순식간에 무너지며 사방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충주성 앞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을 버려둔 채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단월의 전장에 복귀하려 했지만
사나운 기세를 미친 듯이 뿜어대는 왜적들에게 밀려 전열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적은 매섭게 추격해 오며 좌, 우에서 계속 튀어나와 일다경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터져 나오는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니 남한강에 가로막혀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다.
퇴로가 사라진 병사들에게 죽음의 공포가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만 있다면...!'
심기일전하여 전신에 업화 같은 전의를 두르며 다가오는 왜적들을 쳐부술 강력한 공격을 준비했다.
정예 기마대를 필두로 반월형태를 취하며 늠름한 자태로 매섭게 달려갔다.
-탕, 탕, 탕, 탕, 탕, 타타다다탕탕!
...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수 천에 달하던 병사는 간데없고
오직 종사관 김여물만이 내 옆을 지켰다.
'쏴아아-'
폭우가 쏟아진다.
그리고 왜적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살고자 하는가?"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할 사람이겠소."
그의 두 눈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에서 남긴 마지막 말을 가슴에 묻고 쫓아오던 왜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삼도순변사 신립은 손가락이 꺾이고 살이 터져나가도록 활시위를 당겼고
종사관 김여물은 서슬 퍼런 도끼를 들고 지척까지 다가온 왜적 수십을 쳐 죽여
온몸의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불태운 뒤 남한강에 장렬히 투신하였다.
경상순변사 이일은 지옥 같은 탄금대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아
실체를 알 수 없는 왜적의 수급을 들고 선조와 조정대신들 앞에서 전투의 전말을 보고했다.
그 후 이일은 선조의 신임을 받고 수많은 전투를 지휘했다.
왜군 1번대 대장 코니시 유키나가는 전장이 적지임에도 냉정하고 과감한 판들을 내리며 신속히 행동했고
지독하게 심리전을 걸어대며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신립을 격파한 뒤 일사천리로 수도 한성을 점령했다.
탄금대 전투 불과 이틀 전 조방장 유극량은 죽령에서 카토 키요마사 군의 진격을 저지했고
경상우방어사 조경과 부장 정기룡은 추풍령으로 향하는 왜군 3번대 쿠로다 나가마사의
선봉을 격파하며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나 신립은 천혜의 험지 조령을 포기했다.
훗날 신립의 아들 신경진은 김여물의 아들 김류를 보좌하며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패군지장 불가이언용
敗軍之將 不可以言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