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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꿈글 Jul 27. 2016

소박해서 행복한 너의 날을 기억해

#일상이 나에게 - 내 친구 '빨간 머리 앤'을 다시 만난 날


 딸아이가 방학한 지 주말 빼면 이제 겨우 삼일 짼데, 나의 멘탈에 뻥을 좀 과하게 치자면 족히 30일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나에게 이런 타임슬립(?)을 제공하신 주인공은 세상모르게 꿀잠을 주무신다. 히죽히죽거리면서.

틈만 나면 심심하다더니 꿈에서는 뭐 재미난 거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딸 하나라 편하시겠어요."

라고 하셨던 분들. (제가 기억력이 좋아 다 기억합니다.)

그럼 너님도 하나만 키우시지 왜 그러셨어요. 제가 둘, 셋 낳으라고 한 거 아니잖아요. 라고 하고 싶지만 '키워보지 않았으면 말을 마세요.' 라고 머릿속으로만 중얼댄다.


방학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에겐 친구가 한 명 전학 왔다. 희한하게 낯이 익은 이 아이는 친구들과 놀때나 학원가는 시간 빼고 틈틈이 '심심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그리곤 나한테 뭘 자꾸 같이하잖다.


"엄마! (그렇다. 내 이름은 엄마다. 성도 없다.)나 심심해. 우리 파라오코드(보드게임 이름이다) 할까?"


그래 좋다. 그렇게 심심하다니 기꺼이 같이 해준다. 빨리 끝내려고 눈치 못 채게 엄청 아쉬운 연기를 해가며 가끔 져준다. 너무 대놓고 져주면 눈치가 빨라 금방 알아채니 섬세한 내면 연기가 필요하다.


"아유, 엄마가 졌네. 이번엔 진짜 이기고 싶었는데.."

"헤헤, 내가 원래 게임을 좀 잘하잖아. 엄마 미안."


이 친구는 또 어찌나 수다스럽고 호들갑스러운지 같이 있으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궁금한 건 또 뭐가 그리 많은지.



"엄마 내 친구 ○○이 있잖아, 걔는 나를 좋아하는 거 같아. 미술학원에서 나만 보면 자꾸 웃어.
그리고 나한테만 반짝이 색종이 줬다."

"엄마! 이 책에 여러 가지 빵 만드는 방법 나와있는데 같이 만들까? 진짜 재밌겠지? 슈가파우더는 어디에서 팔어?"


꼬마 친구와 같이 있다보니 어릴 때 읽고 또 읽어 표지가 떨어질 정도로 달랑달랑 매달린 책 속에서, 가끔 불쑥 튀어나와 함께 놀아주던 옛 친구가 떠올랐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웠던 그 아이!


오늘 딸과 함께 나의 오랜 친구를 만났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너무나 밝고 긍정적이었던,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알지만 상상력을 더해가며 행복한 미소를 지을 줄 알았던 그 소녀를.

앤을 만나는 동안 내 작은 친구는 그녀와 함께 깔깔거리고 글썽거렸다.



앤을 만나고 무엇을 느꼈는지,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애써 묻지 않았다. 작은 친구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을지 완벽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상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엄마들과의 모임에서 아이들 일기 소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주말에 캠핑을 가거나 무슨 계획을 세우느라 피곤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나역시 할 수만 있다면 아이를 위해 많은 경험을 하게 해 주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요즘 아이들은 풍요로움 속에서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딸아이가 일기 쓸거리가 없다고 투덜댔던 날 이렇게 말해주었다.


"너는 어제와 단 한 가지도 같은 것을 한 게 없어. 어제 저녁엔 미역국을 먹었지만 오늘 저녁엔 김치찌개를 먹었고, 학교 수업시간에 매일 같은 것을 배우지 않지? 친구들과 똑같은 얘기를 하고, 똑같은 놀이를 하지는 않잖아. 잘 생각해 보면 일기 쓸거리는 엄청 많아."


여름밤 아빠엄마와 함께 동네를 산책하다 돌아오던 길에 먹었던 팥빙수 한 그릇, 깔깔대며 했던 끝말잇기, 달빛 가득한 공원에서 누가누가 많이 하나 함께 했던 줄넘기, 그 후에 먹었던 꿀맛같은 아이스크림의 시원함기억하며 행복 할 수 있는 소녀로 커가길 빈다.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날이 아니라

진주알들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

- 빨간 머리 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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