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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Oct 20. 2024

'로봇(Robot)'의 아버지 카렐 차페크 (8)

마지막 남을  소수의  인류가  벌일 용맹한  항거에  관한  상상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헝가리와 독일에서도 혁명이  시도되는 등 사회적 대변동이 가득했던 시대에, 로봇들은  자본가들과 정부에 억압당하여 급기야 폭발 직전에 놓인 노동자들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카렐  차페크는  소설 <절대적으로 거대한 것>과 <도롱뇽 전쟁> 등으로 파멸적인 전쟁이나 전멸을 야기할 폭동이 벌어지는 불행한 미래상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곧 발발하려던 시대에  이렇듯 ‘전멸’에 바탕한 미래상은 전 세계의 독자들과 관객들  앞에  아주  시의적절하게 나타난  것이다.

<로봇 R.U.R.>의 제2막이 끝나기 직전, 기본적으로 무방비상태의 인간들은 압도적으로 많은  ‘무장한 로봇들’과 직면한다.

오늘날에는  이런 상황이 ‘너무나도 극적'이다.

하지만  현대 독자들이나 관객들은 러시아 혁명 당시  벌어진 내전 동안 무자비하게 학살당한 사람들, 즉 함정에 빠지고 무방비 상태에 놓였던 사람들, 예를 들어 러시아 황제와 그의 가족들 같은 사람들도  떠올리게 되리라.



 
 카렐은 어린  시절부터 ‘포위’와 관련한 모종의 공포증으로  고통 받은 것 같.  이는 그의 작품에서 ‘포위되는 장면’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카렐의 드라마 <강도>와 그의 가장 긴 소설 <크라카티트>에서 특히 확실하게 드러난다.

카렐은  자신의 작품에서 항상 포위당한 편에 섰다.  카렐은 심지어 압도적으로 많은 경찰들포위된 살인자를 동정해주기도 한다.

카렐과 같은 세대  사람 중 하나이자 번역가인 ‘마세시우스’는 카렐의 이렇듯 별난 관심에 관해서 흥미로운 발언을 남겼다.




  어느 날  카렐은  갑자기 멈춰 서더니  지팡이를 휘둘러댔다. 카렐은  어떤 사건으로 야기된 묘한 흥분에 빠져 있었다. 사건은 1912년 4월에 전 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었다.  은신처에 숨어있던 범인을 경찰이 포위한 사건이었다.

 그 당시 상황에 대해  내가  기록했던  걸  보면,  파리에서 활동했던 두 조직폭력배들이 프랑스  어느 마을의 창고에서 포위당했다.  그들은 거기서  자기들보다  훨씬 더 우세한 경찰들을 상대로  1시간  반  동안  싸웠다.

 카렐은 프랑스 신문들을 읽고서 그 사건의 자세한 전말을 알게 됐다. 심지어 나를 위해 그 당시 그 창고와 경찰의 포위  모습을 모래에 지도를 그려 설명해주기까지 했다.




  이렇듯  마세시우스가 증언한  바로는,  카렐은 그 사건과 비슷한 상황을 경계했다.

 카렐은 런던의 화이트채플에서 있었던 '살인자 몇 명을 경찰이 포위한  사건'이 실린 신문을 발견했을 때 아주 기뻐했었다.

  기사의  내용은 그 살인자들이 “경찰관  천여  명과  대포 3문으로 무장한 군 병력을  상대로  밤새도록 싸웠다”는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카렐은 자기가  쓰던 희곡을 위해서 자기가 용맹하게 항거하는 사람들 한 무리와 함께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 희곡의 첫 개봉 후 며칠 동안  카렐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인정하는 바이다.   

내가 그러한 이야기로 희곡을 쓰도록 유혹받았다는 사실을, 특히 그들의 삶의 마지막에서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 머리가 높은 곳에 매달리는 것'임을 알고 있던 한 줌의 사람들이 저질렀던 행위에 관한 (앞서 언급된) 그 두 가지 이야기들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웅주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고방식이다. 또한 영웅주의는 이러한 소재로 나를 유혹한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보이는 것이 문제가 되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이러한  아이디어에 충실히 머물러 있었다. …

나는 로봇에  관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관해서 생각했다. 만약 내가 그 희곡의 구성과 관련해서 철저하게 생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에서 등장한 6명 혹은 7명운명이다.

그렇다.

그것은 로봇들이 공격해오는 순간에 관객들이 어떤 가치 있는 존재가 혹은 거대한 존재가 말뚝을, 즉 인간을, 인류를, 우리를 향해 공격해 들어올 때의 기분을 느껴보기를 원해서였다.

그 ‘우리들’은 작업 전반의 진짜 일정이라든가 앞으로의 일과 관련한 창조적인 것들을 지휘해나간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나는 우리 ‘인간’가를 보여주기 위해 두세 시간 정도로 압축된 간략한 세계 안에서 어느 작은 무리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죽어가는 혹은 죽을 상황에 놓인 인간들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에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아직까지 인류 전체의 무덤 위에 서  있는 당신 자신을 상상한다는 것, 심지어 대부분의 극단적인 비관론자들은 이렇듯 인류가 전멸해버린 공간에 대한 비범한 의미가 확실히 현실화될 것이라 본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로봇)은 인간이 되려는 위대한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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