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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대기근

단편 추리소설 <레닌그라드 1942년, 소시지>

by 장웅진




“꼭 호랑이 사냥에 미끼로 나온 강아지 같군.”


어린아이 크기의 시커먼 무쇠 난로 위에서는 납작한 회색 주전자가 온몸으로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주전자에는 교외에서 채취한 솔잎으로 만들었다는 차가 가득 들었다.

나는 미묘할 만큼 떨떠름한 쓴맛과 풋내가 나는 따끈한 차를 홀짝거리며 쌍안경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베리야 대위는 낡은 양복을 입고 작은 챙이 달린 둥근 모자를 썼다.

굶주린 시민들의 눈에는 미국인이나 캐나다인 들이 보내준 치즈와 통조림햄을 먹어대는 군수공장 공장장으로 보일 것이다.

대위는 두 시간째 거리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천천히 왔다 갔다 했다.

곧 쉬러 들어오면 우리에게 좋은 소리를 떠들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위가 저러는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주었고 앞으로도 줄 모든 시련을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병신이 스스로 제 무덤을 팠죠.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에 지가 짓눌린 겁니다, 하사님, 하하하!”


조명탄 발사용 권총을 점검하면서 알렉세이가 낄낄거렸다.

대위를 납치하려는 놈들이 나타나면 나와 알렉세이, 그리고 다른 건물에 숨은 병사들이 조명탄을 발사한다.

그러면 각 건물 1층이나 지하로 내려가는 층계참에 숨은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그놈들을 체포, 일망타진한다는 것이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베리야 대위는 오른쪽 장화 속에 단검도 넣어두었다.


미끼는 베리야 대위만이 아니었다.

즈나멘스키 광장과 연결된 이 넵스키 거리에만도 네댓 명, 레닌그라드 전체엔 70~80명은 될 거라고 시티코프 소령이 말해주었다.

물론 진짜 임무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베리야 대위와 시티코프 소령, 나와 알렉세이, 그리고 시티코프 소령보다 높은 사람들뿐이었다.

나머지는 자신의 임무가 ‘시외의 파시스트들을 도와 혼란을 야기하려는 납치·살해범들 체포’로 알고 있었다.


“헌데, 왜 산 사람의 고길까요? 죽은 사람 고기 구하기가 쉬울 텐데요.”


“죽은 지 오래된 동물의 고기는 썩어서 냄새가 심하게 날 테니까. 특히 몸속에 고인 피는 쉽게 썩네. 예를 들어 돼지 잡을 때 말이지, 피를 재빨리 몽땅 빼지 않으면 고기가 쉽게 썩는다더군. 외할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길세.”


“허―, 그럼 이 짓을 벌이는 이유가 뭘까요? 금붙이며 보석이라도 모아 스웨덴으로 도망가려는 걸까요? 그렇듯 정성을 들여 ‘상품’을 만들다니, 이게 무슨 미친 짓인지?”


“낸들 알겠나.”


10여 분 뒤 병사 한 명이 찾아와서 이만 철수한다는 시티코프 소령의 명령을 전달했다.


‘올가와 재회하는 대신 지뢰밭을 걸어야 할 때가 가까워진 것인가!’


눈물이 났지만 알렉세이에게 보이지 않으려 손등으로 슬쩍 훔쳤다.

결국 소득 없이 귀대하여 삶은 감자 두 개와 돼지기름을 넣은 귀리죽 한 그릇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뱃속에 좋은 음식이 들어왔지만, 사형수가 받는 마지막 식사 같아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사건을 해결해야 할 때까지 몇 시간 남았나 생각하며 숙소로 걸어가다가, 알렉세이와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물론 진짜 이유는 초조함을 달래고 싶어서였다.

그와 나는 한 배를 탄 동지니까.

나를 향해 병사 세 명이 다가오는 걸 깨닫고 몸을 돌렸다.

세 병사 모두 나를 보자 경례했고, 나 또한 답례를 하면서 몸을 다시 돌렸는데…, 눈앞이 번쩍하면서 뒤통수가 심하게 아프다는 생각을 한 순간 모든 것이 새카매졌다, 마치 정전이 일어난 것처럼….






햇빛의 밝음과 따사로움이 눈꺼풀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여기가…, 이놈들의 기진가?’


정신이 수습될수록 피비린내와 고기 삶는 냄새가 더욱 격하게 진동했다.


“내가 지하실에서 쥐새끼들을 부려가며 이 작업을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마카로프 하사? 아니, 동아시아 프롤레타리아 영웅 나리? 아니, ‘마. 대. 산’이라고 불러드릴까?”


그는 얼굴을 가려주는 어스름 속에서 작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넓적하고 긴 칼의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차갑고 축축한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있던 나는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일어났다.

나는 그자를 마주보고서 가부좌를 틀었다.


“왜 날 안 묶었나?”


“글쎄, 뭐랄까? 자넬 무시해서 그런 건 아니니까 기분 나빠 하진 말라고. 아 참! 자네가 장화 속에 넣어둔 단검은 뺐네. 그런 건 불편하지 않나.”


그는 집게손가락을 세우고서 까딱거렸다.


“이러면 내가 협조할 거라 본 건가? 그렇다면 답은 빤하잖아!”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차차 알게 될 거야.”


“그럼 더 묻지 않겠네. 지금 난 자네에게 덤벼들 여력도 없으니까.”


시티코프 소령이, 알렉세이가 없어진 나를 찾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시간을 벌려고 했다.

구역질을 꾹 참고 코를 킁킁거리며 휘 둘러보니 고기 삶는 솥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고기라는 걸 알 수 없게 하려는 거라고 판단했다. 사람고기를 삶으면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삶을 때와는 다른 기름이 뜬다고 누군가가 말해줬다고 외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침착해야 한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 잘 차리고 있으면 산다고 외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잖아!’


나는 스스로에게 당부하며 태연하게 입을 놀렸다.


“그런데 내가 자네와 함께하건, 아니면 저 솥에 들어가건 간에…, 그 전에 이 사건의 담당자로서 실상을 알고 나서 죽고 싶네.”


그자는 눈을 번뜩이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 또한 그자의 눈을 바라봤다.

예전에 모스크바 외곽에서 고장 난 전차를 회수하다가 마주친 독일군 장교의 눈에서 느낄 수 있었던 잔인함과 경멸, 서늘함…, 그런 분위기 뒤에…, 뭐랄까? ‘흔들림’이 있었다.

그자가 강의를 시작했다.


“군인의 통통한 몸통은 소시지감으로 최고지. 특히 여군의 살맛은 말이지…, 고기를 제공한 년이 예쁘면 예쁠수록 말이지…, 소시지 맛이 좋다고 고객 분들이 감탄을 하더군. 나는 한 조각도 먹어본 적이 없어. 그런데도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좀 으쓱해지는 거야. 소시지 장인으로서의 자부심이랄까?”


히죽히죽 웃어대는 그자를 노려보면서 나는 머릿속에 스멀스멀 떠오른 올가의 벌거벗은 이미지를 짓뭉갰다.


“끌려오자마자 도살되는 사내놈들과 달리 계집들은 죽을 때까지 귀여워해준다네. 물론 그년들도 죽고 나면 소시지가 되지. 그래서 이 일에 협조를 해준 녀석들이 여럿 있어. 먹는 문제가 해결되니 그 짓에 관심이 생기는 거 아니겠나. 그런 게 인간의 본능이야. 뭐, 이 도시 여자들이 하도 굶주려서 새파랗게 어린 것들도 할망구가 된 탓도 있지만 말이지.”


“정말 지독하군.”


내 대구에 그자는 오히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적반하장’ 한 마디가 떠올랐다.

그자의 반응이 탄식조로 이어졌다.


“지독하다? 물론 오입질이 고파서 일하는 놈들만 있는 것도 아냐. 수도의 방위를 위해 이 도시에서 생산된 무기마저 비행기로 공출해가는 위대한 영도자 스탈린 동지께서 다스리시는 이 땅에서 ‘실수’를 한 덕에 말이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일하는 친구들도 있어. 그중에는 자네가 이미 여러 번 만났던 사람들도 있을 걸세, 하사.”


거북한 이야기와 더러운 냄새가 어우러져 속이 우글거렸다.

하지만 차마 토할 수는 없었다.

그런 추한 모습을 보이면 저자는 비웃거나 화를 낼 테고, 그 다음에는 저 고기 삶는 솥으로 들어간 뒤 잘게 썰려 내 피며 소금과 섞여 내 창자에 넣어진 다음 한쪽에 매달리고서 먹어 줄 사람을 기다리게 될 테니까…. 차라리 계속 대화를 나누면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수 있으리라.


“군인이 사라지는데 아무도 눈치 못 채다니….”


“전쟁 중이잖아. 독일놈들이 시내로 진입하진 않지만 매일매일 폭탄과 포탄이 떨어지고 건물이 불타거나 무너지지. 기회만 있으면 빠져나가려고 안달이니, 이놈 저년 없어진들 신경 쓰지도 않을 소련 수뇌부가 아닌가. 어차피 누구 말대로 이 나라에는 군인이 되어 죽어갈 병신이 넘쳐나니까 말이야. 지금도 이 도시 주변에서는 스탈린의 측근이기도 한 고위 장교들의 무책임한 명령으로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씩 죽어나간다는 걸 자네도 잘 알잖아!”


“도대체 자넨 왜 먹지도 않으면서 이런 걸 만들어 파나? 굶주린 시민들에게서 한밑천 뜯어내서 스웨덴 같은 중립국으로 도망가려는 건가?”


그는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노기 띤 목소리로 자백하기 시작했다.


“난 우크라이나인이야. 이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대지의 아들이자, 그 수확물을 노린 악마의 희생자이기도 하지. 정확히 10년 전에, 감자를 심으려 할 때 그들이 들이닥쳤어.”


숨을 들이키려고 그자가 말을 멈췄을까?

아닌 것 같았다. 그자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으니까.

나는 뱀과 눈이 마주친 개구리처럼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내가 잔뜩 긴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만족했는지 그자는 말을 이었다.


“씨감자는 물론 집에 있던 식량이며, 난로 위에서 삶아지던 감자까지 냄비 째 가져갔지. 위대한 영도자 스탈린 동지의 농업 집단화 정책을 따르지 않고, 자기 토지를 자기가 계속 가지고 있으려 한다는 이유를 들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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