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를 그리며
나도 사랑을 잃은 적이 있다. 정신 나간 상태로 1주일 내내 집 옆 저수지에 나가 미끼없는 낚시를 던져 놓고멍하니 물만 바라봤다. 물멍. 물을 보니 위로는 커녕 더 슬펐다. 시간이 흐르니 그 물에서도 무언가 보이는게 있었다. 갇혀 있는 물이 신기한 것이 그 물이 그 물인 것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다는 것. 물은 갇혀 있는 그 안에서도 돌고 돌고 돌아다닌다는 것. 그 오묘한 자연의 현상을 보고 내린 결론. 사랑을 잃은 것이 아니라 놓아준 것이라는 것. 그래도 후유증은 컸다. 사랑을 잃고 나도 썼다. 탈출구는 그 길 밖에 없었다.
40여 년 전, 공적이지도 그렇다고 사적이지도 않은 자리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함께 자리했던 그의 친구이자 내 친구는 "저 머리 긴 애 있지. 기형도야. 너도 알지? 그 '안개'라는 시 "라고 안개처럼 속삭였다. 기형도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1989년 3월, 신문에서 우울한 모습의 기형도를 보았다. 종로의 한 허름한 극장. 숨이 막히는 어두운 공간에서 기형도는 잠자듯 쓰러졌으며, 새벽 극장을 청소하는 아줌마가 이미 사늘하게 식어버린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슬픈 부고기사였다. 그의 나이 겨우 스물아홉.
문학평론가 김현은 3월9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기형도가 죽었단다.아니 이게 왠일이야.한 달 전에 그와같이 술을 마실 때의 그의 표정이 떠오른다.울고 싶은 듯,찡그리고 싶은 듯,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묘한 표정이었다.아니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자리를 옮긴 것이 그렇게 가슴 아팠단 말인가. 집에 들어가기 싫어 혼자 영화를 보다 죽다니!'
광명 '기형도 문학관'에 다녀왔다. 기형도의 시 '안개'에서 묘사됐던 그 안양천변의 슬픈 풍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 와 본 사람은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라고 했지만 안개의 강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늙은 여공들이 깔깔거리며 지나가던' 천변 위엔 거대한 도로가 조성돼 수많은 차들이 안개대신 매연을 뿌리며 달리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을 겨누'듯한 공장의 굴뚝은 사라지고 대신 고층 아파트들이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더 이상 이곳은 안개도시가 아니다.
생전 단 한 권의 시집도 없이 유고시집 한 권만 남긴 시인치고 문학관은 알차게 꾸며져 있었다. 기형도가 중앙일보에 첫 출근하던 날 입었다는 빛바랜 양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문학관이 생기고 기형도의 삶이 신비화되면서 기형도의 열기는 식지 않고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기형도라는 나무의 뿌리는 더욱더 견고하고 잎사귀는 이제 하늘을 가릴 만큼 풍성하다. 지칠 법도 한데 유고시집 '잎 속의 검은 입'은 스테디셀러 반열에 오른 지 오래다. 검은색은 줄기차게 내리쬐는 빛을 견디지 못해 퇴색하면서 마침내 하얀 백지가 된다. 하지만 기형도는 한 올의 흐트러짐이 없이 그 검은빛을 30년 동안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마침내, 그의 고향 광명에 아름다운 문학관이 생겨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들이 꾸역꾸역 찾아오는 이 놀라운 현상을, 나는 '기적'이라고 믿는다. 시골 옥수수밭에 야구장을 조성해 밤마다 야구가 열리는, 그리고 그 야구 경기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영화 '꿈의 구장'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도, 첫사랑도 모두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형도에 대한 기억은 문학관으로 인해 더욱 또렷하게 우리들 기억 속에 살아 숨 쉴 것이다.
기 형! 어둡고 금간 그 두려운 빈집보다 훨씬 더 큰집에 이렇게 혼자 있으니 어떠시오. 더듬거리며 잠글 문이 더 많은데. 여전히 내것이 아닌 열망같소. 아니면 크기만 달라졌을 뿐, 아직도 빈집에 갖혀 있는 그런 기분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