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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낙타 Sep 10. 2024

자기혐오 벗어나 구도의 길 걸었던

 송기원을 애도하며



  

  문단 데뷔는 시끄러웠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불면의 밤에’가 당선도 그렇거니와 74년 중앙일보 신문문예에 소설 ‘경외성서’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회복기의 노래’가 동시에 당선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신춘문예 역사상 각각 다른 신문에 소설과 시가 동시에 당선된 건 그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누구나 부러워하던 메이저 언론이다. 그러니 거칠 것이 없었다. 신춘문예 지망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으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당연했다. 소설과 시의 만남처럼, 작품 속에 깔려 있는 비장미에 서정성까지 더해지니 작품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문단 일부의 시각은 냉정했다. 그의 뛰어난 재주가 오히려 문학적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문단의 질투심이라고 생각했다. 우려는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탐미주의에 심취하는 등 지독한 허무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자기혐오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유가 있었다. 가족의 죽음. 처절한 가족사. 항상 '죽음'을 머릿속에 담고 살았다. 극단적 선택이 미수에 그쳤다는 소문도 있었다.  홀연히 월남전에 뛰어든 것도 이때였다. 

  

 다시 돌아온 문단. 77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월행’은 이념의 갈등 속에 문단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고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과 함께 한국단편문학의 백미 중 하나로 꼽히기까지 했다. 문단이 그에게 '두드러진 자기혐오의 감정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라고 평가했다. 


 '월행'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구름사이로 달이 빠져나오자 반짝, 개천이 드러났다. 살얼음이 낀 개천은 달빛을 받아 무슨 시체처럼 차갑게 반짝거리며 아래쪽 미루나무 숲으로 사행(蛇行)의 긴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바로 그 미루나무 숲 언저리로부터 한 사내가 개천 둑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200자 원고지 70매에 자로 잰 듯 정확하게 계산해 완벽한 기승전결의 양식을 보여주는 '월행'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첫 구절이나 숨 막히는 서술구조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서술구조를 닮았다. 읽는 내내 숨 막히는 것도 똑같다. 그럼에도 그의 삶은 자꾸 꼬여 들어갔다. 글이 써지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는 79년 화성군 팔탄면 월문리로 이사 오면서 ‘월문리에서’ 연작을 발표한다. 그리고 다시 침묵. 문학지에 간혹 시 몇 편과 소설 한 두 편을 발표했을 뿐, 오랜 문학적 칩거에 들어간다. 대신 사회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작가회의의 전신이자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저항한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에 적극 참여했던 그는 고은·윤흥길·이문구·황석영·이시영 등 자실 회원 30여 명과 함께 1974년 자실 결성식에서 김지하 시인의 석방 등을 촉구하는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했다. 19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휘말려 옥고를 치렀고, 1985년에는 '민중교육 필화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서울 서대문 로터리 부근에 있던 낡은 목조건물 2층으로 소설가 송기원을 찾아간 건 1987년 3월이었다. 소설을 쓰지 않은지 3년이 넘어 “이젠 소설가라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던 그는 여러 번의 인터뷰 요청에 손사래를 쳤다. 간곡했지만 단호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실천문학사는 사무실이라기보다 평범한 서재를 연상시켰고 벽에는 최근 실천문학사가 출간한 책들의 표지가 10여 장 붙어 있었다. 그는 달변이었지만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 송기원을 만났다. 회사 부근이라며 연락이 왔다. 깜짝 놀랐다. 첫 만남이 인상적이었다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수원 북문의 허름한 선술집에서 같이 소주를 마셨다. 합석한 문인이 한 명 있었는데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당동까지 직통 버스가 있어 마지막 차가 올 때까지 우리는 취하도록 마셨다. '송구라'라는 별칭답게 입심이 셌으나 변함없이 자신의 삶에 부정적이었다. 슬픈 가족사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대화도중 파안대소가 터졌으나 어딘가 쓸쓸하고 우울했다. 


 그는 자신의 오랜 침묵에 대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금의 문학적 침묵이 장차 큰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진통기인지, 아니면 내 문학생명이 완전히 끝났기 때문인지 나도 잘 모른다. 분명한 건 지금 나는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그는 시를 쓰면서 생긴 ‘정확한 문장 사용하기’가 자신을 단편소설 밖에 쓰지 못하는 작가로 전락시켰다고 괴로워했다. 완벽한 문장을 써야 한다는 부담으로 중, 장편소설을 쓰는 게 솔직히 힘에 겨웠다는 것이다. 작가의 이런 고백을 듣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화성 월문리로의 귀향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80년대 상황을 소설로 쓰려고 했는데 사방이 절벽으로 막혀있는 것 같은 무력감이었다. 그걸 벗어나는데 뜻밖에도 서해안의 한촌 월문리가 큰 힘이 되어주었다. 건강한 농촌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돼 있는 것이 마음의 위안을 주었다. '월문리에서' 연작이 탄생한 것도 농촌의 건강성이 바탕이 되었다"


  아주 오랜기간 그와의 연락이 없었다. 그가 인도에서 여러 해 요가를 체득했고, 평택의 한 사찰에서도 탁발수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구도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그의 부고 소식을 들려왔다. 가슴이 먹먹했다. 호탕한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오래된 수첩을 뒤져보니 그때 우리의 만남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와 나눈 이야기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많았다.  

   그는 지금 달 길과 은하수 길을 건너 저 멀리에 별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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