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만도 못하다, 같은 말을 누구라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도 동물이라는 말도. 그러나 인간은 짐승만도 못한 동물 주제에 다른 동물과 자신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며 삶을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말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비단 문명이 없었던 과거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자신의 부모를 병원에 버리고 죄책감 하나 가지지 않는 요즘 시대의 사람들은 과연 이 영화를 보면 무슨 말을 할까.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버드아이뷰로 겨울 산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감이며 척박하고 외로운 분위기의 산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이 산은 영화에서 중요한 의미로 상징되며 후에 엔딩 시퀀스에서도 겨울 산을 등장시키며 수미상관 구조로써 하나의 순환처럼 보이게 만든다. 겨울 장면은 초반부에 잠깐 등장하며, 곧 봄이 다가오는데 이 또한 원초적인 ‘새싹’이라는 것으로 표현한다. 영화 속의 캐릭터들은 본능에 충실하며 성욕과 식욕에만 몰두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소변을 보는 여자를 훔쳐보는 데에 거리낌이 없고, 산 아무데에서나 성행위를 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감독은 그런 본능적인 욕구를 하는 캐릭터들을 보여주고 인서트컷으로 짝짓기를 하는 동물이나 곤충을 보여줌으로써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인 인간과 동물의 밀접성을 표현한다. 곤충이 다른 곤충을 잡아먹는 것이나 짝짓기를 하는 개구리에게서 어떤 의도가 없듯, 아무 의미 없이 몸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캐릭터들의 모습을 통해 비문명화된 인간들의 순수악을 보여준다.
여기서 오린의 존재는 조금 다르다. 오린의 모습은 야만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명인처럼 보인다. 죽음이라는 동물의 본능적인 공포를 달관한 것처럼 자신의 죽는 날을 기다리며 당연한 순리처럼 받아들인다. 물론 오린과 정 반대되는 캐릭터도 있다. 아들 손에 묶여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버둥치다 굴러떨어져 죽는 캐릭터가 그 예이다. 오린은 이렇게 당연한 인간의 공포를 달관하고 산 정상에 올라가 기도를 드린다. 아들의 소원처럼 산에는 눈이 내리는데, 마치 오린이 정말로 산신의 곁으로 간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러나 오린 또한 자발적인 죽음이 아닌 것으로 보여지는데, 오린의 남편이 도망치고 마을에 부끄러운 일이 되자 자신도 아들에게 부끄러운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세뇌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오린은 마을공동체에 해가 되는 존재라면 임신한 손자며느리도 죽음으로 유도하는 등 어떻게 본다면 오린 또한 본능(공동체에 편승해야만 삶을 연장할 수 있다는)에 충실한 캐릭터로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리얼리즘 영화로 과거 일본의 오지 마을이라는 공간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오지 마을에 사는 오린이라는 캐릭터가 70세를 앞둔 1년을 보여준다. 사계절의 흐름 속에서, 죽음을 맞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며 과거 살인을 했었던 타츠헤이의 고백도 드러난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 마을에서는 전혀 큰 일로 그려지지 않는다. 남자아이라는 이유로 논밭에 가져다 버리고, 도둑질을 했다고 생매장을 한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길가에 개미가 죽어있다고 해서 길을 가던 토끼가 울지는 않는다. 그냥 하나의 섭리, 순환으로 흘러간다. 영화 중 오린이 하는 말도 마찬가지다. ‘내가 죽으면 새로 태어날 아이로 태어날까 싶다’는 오린의 말은, 사람이 죽어 땅에 비료가 되어 새싹이 나고 열매가 나듯, 죽음은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 속 인물들이 자연스럽고 동물과 같다고는 인정 못 하겠다. 오히려 지능이 있기에 동물들의 세계보다 더 끔찍했다. 두 눈으로 보지도 못한 신을 들먹이며 생니까지 빼가며 죽음을 간절히 원하게 하고, 성폭행을 하려던 남자를 죽여 저주가 걸렸다고 마을 남자들에게 성관계를 하라고 유언을 남기는 모습은 동물들의 그것보다 더 부자연스러웠다. 아마 이때부터 인간들은 동물과 다른 자기들만의 ‘문명’을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많은 시간이 지나도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듯, 인간의 존재는 사라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