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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09. 2024

악녀의 계략 - 1

세두는 지나를 보고 재빠르게 의자를 빼주었다. 

“높으신 민 여사님께서 비천한 저를 만나자고 하시다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근데 금 사장님이 보시면 오해할 수도 있어요. 다행히 저는 같이 차를 타고 오진 않았지만요.” 

세두는 의미심장한 말로 빈정거렸다. 

“봤어?” 

“대충, 확실히요.” 

“누구보다 영리한 조 실장이니, 나발 불 지는 알아서 결정해. 앞으로 어느 줄에 설 건가를 생각해봐."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두 가지만 알면 돼.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건 당연하죠. 그런데 왜 저를 부르셨어요?” 

“조 실장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지금 치우가 만나는 여자가 누군지, 또 그 주변을 조사해 줘. 특히 금전관계에 대해 철저히.” 

“역시 제 판단이 맞았네요. 근데 금 사장님은 알고 계신가요?” 

“가능하면 조용히 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래서 조 실장을 몰래 부른 거야.” 

세두는 감을 잡고 구미가 당기는지 입맛을 다셨다. 

“그럼 저에게 떨어지는 보상은요?” 

“이제 조 실장도 독립할 때가 되지 않았어? 그동안 금 사장님 밑에서 충분히 배운 것 같은데?” 

그녀는 밑밥을 던졌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가장 중요한 자금이…” 

“그건 걱정하지 마. 이번 일을 해결해 주면 내가 밀어줄게. 나, 은혜는 잊지 않는 여자야.” 

“정말요?”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최대한 빨리 연락드릴게요.” 

“이건 발품비야. 일이 끝나면 멋지게 술 한 잔 살게. 그때 조 실장 사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자고.” 

지나는 핸드백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세두 앞에 던졌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저놈이 치우라면 얼마나 좋을까.” 

봉투를 열어본 세두는 입술이 늘어졌다.

'하긴, 나도 이 계통에서 도사가 됐으니 독립할 때가 왔지. 근데 엉뚱하게도 원수 같은 녀석이 날 도와주네.'


치우는 놀이공원 입구에서 혜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초등학생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야?”

“우리 늦둥이 혜성이야. 오늘이 혜성이 생일이라서 축하해 주려고 같이 왔어. 혜성아, 인사해. 누나의 남자친구야.”

그가 악수를 하려 다가가자, 혜성은 빠르게 그녀의 뒤로 숨었다. 치우는 순간 당황했지만, 멋쩍은 분위기를 바꾸려 장난스레 말했다.

“내 인상이 그렇게 더럽나? 다들 호감형이라고 난리인데.”

“아니야, 치우 씨. 사실 우리 혜성이가 자폐증을 앓고 있어. 나와 아빠 외에는 자기의 마음을 좀처럼 열지 않거든.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과 친해지기가 쉽지 않은 거야.”

그녀는 눈에 눈물이 고였다.

주변을 둘러본 치우는 완구를 파는 손수레로 달려갔다. 조립 로봇을 주었지만 혜성은 여전히 피했다. 혜원이 대신 건네자 그제야 받았다.

세 사람은 놀이공원으로 들어가 벤치에 앉았다. 보통 아이라면 로봇을 조립할 텐데, 혜성은 부품을 나열하는 행동만 반복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혜성이와 소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폐아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나오고 싶어 하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우리가 그 세계로 들어가야지.”

“아, 그렇구나. 자폐 증상은 어떤 거야?”

“왜 물어?”

“앞으로 혜성이와 친해지려면 그걸 알아야 하니까.”

“자폐아는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그래서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게다가 의사소통 능력이 부족해서 말이나 표정, 몸짓으로 자신을 잘 표현하지 못하지. 대부분 지적 장애가 있고, 심한 충격을 받으면 간질 발작 증세를 보이기도 해.”

“강의가 살아 있네! 더 없어?”

치우는 그녀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추임새를 넣었다. 

“상세히 말하자면, 상황에 맞지 않게 웃거나 사람들이 포옹하는 것을 싫어해.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지. 특정 사물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고, 주변 환경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일반 아이들과는 다른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란 거야.”

그는 편의점에서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서 혜성에게 건넸다. 먹고는 싶지만 받을지 망설이는 그에게 혜원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혜성은 눈을 내리깔며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우리 함께 놀이기구 타지 않을래? 저거 엄청 재밌어.” 

치우는 바이킹을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경계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진 혜성은 천천히 일어났다. 두 사람은 혜성을 가운데에 두고 바이킹이 왕복할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1인용 놀이기구에 탄 혜성을 바라보며 그녀는 눈물을 닦았다.

“엄마가 혜성을 낳다가 돌아가셨어. 혜성을 보면 엄마가 떠올라. 아기 때부터 엄마의 사랑을 받았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서 혜성에게 늘 미안해. 나와 아빠가 있는 동안은 괜찮지만, 앞으로 혼자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생각을 하면….”

치우는 흐느끼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우리 혜원이 힘들었겠네.”

“아니야, 아니야. 우리 집에는 혜성보다 힘든 친구들이 많아. 나는 혜성이가 저 정도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해.”

“무슨 말이야?”

“나중에 우리 집에 오면 알게 될 거야.”

그녀는 밝게 얼버무렸다.

“근데 혜성이의 병은 고칠 수 없는 거야? 미국은 우리보다 의술이 발달해서 가능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한국보다는 낫겠지. 완치는 힘들겠지만, 미국에서 자폐증 치료에 널리 이용되는 응용행동분석 치료는 언어와 인지 능력을 발달시킨다고 해. 그래서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 일반 학교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나 봐.”

“그럼, 미국에서 치료받으면 되겠네.”

“우리 형편으로는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어. 내가 간호사라서 아는데, 미국의 병원비는 정말 비싸. 부자들은 민간 의료보험 덕분에 치료비 걱정을 하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아프더라도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해. 다른 건 몰라도 의료복지만큼은 한국이 미국보다 훨씬 잘 되어 있어. 한두 달 휴가를 내서 한국에서 치료받고 돌아가도 미국 병원비에 비하면 항공료와 체류비를 빼고도 남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 우리 병원에는 재미 교포들이 자주 찾아오곤 해.”

그는 자신의 경솔한 발언에 미안함을 느꼈다. 혜성이 과자를 집어 치우의 입에 넣어주었다.

“고맙습니다!”

그가 벌떡 일어나 코믹한 음성으로 외치자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치우가 그의 입에 과자를 넣어주자 혜성이도 따라 했다.

“혜성이가 자기를 좋아하나 봐. 다른 사람이 나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질투를 하거든.”

“혜성이가 사람을 볼 줄 아는 거지. 내가 원래 매력덩어리잖아.”

그는 어깨에 힘을 주며 우쭐거렸다.

“피, 내가 뭔 말을 못 해요. 이럴 때 보면 치우 씨는 꼭 아기 같아.”

“그건 내가 혜원이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뜻이지.”

“무슨 소리야?”

“남자는 여자의 사랑을 받으면 아기가 되거든. 그래서 나는 영원히 당신의 큰아이가 될 거야.”

“그럼 엄청 속 썩이겠네?”

“아니, 효자이자 보호자 같은 큰아들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치우 씨, 혜성이 생일에 놀아줘서 고마워. 이건 혜성이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야.”

“이제부터 날 믿어. 오늘 혜성이에게 멋진 매형이 생긴 거지.”

“매형? 그럼 난 벌써 당신의 아내가 된 거네? 하지만 나는 정식으로 모두의 축하를 받는 결혼식을 하고 시작할 거야. 치우 씨도 그럴 거지?”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청년 고아잖아. 난 자발적으로 너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혜성이와 함께 살겠어. 날 쫓아내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 

“치우 씨, 말이라도 정말 고마워.” 

그녀의 목소리가 젖었다. 치우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재밌는 얘기를 하나 해줄까?” 

“무슨 이야기?” 

“한 달 정도 만난 남자와 여자가 있었대. 어느 날 밤, 여자의 집까지 배웅한 남자가 오늘은 꼭 키스를 해야겠다고 작심했대. 드라마처럼 벽에 손을 대고 ‘키스해 주기 전에는 절대 집에 못 들어가’라고 했대. 여자는 ‘안 돼. 집에 아빠랑 엄마가 계신단 말이야’라며 30분 넘게 실랑이를 벌였대. 그때 갑자기 대문이 열리면서 여자의 동생이 나와서 말했대. ‘언니! 아빠가 그냥 한 번 해 주고 빨리 보내래!’ 그리고 이어서 한 말이 뭔지 알아?” 

“모르겠어.” 

“아저씨! 제발 우리 집 인터폰에서 손 좀 떼 주세요!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잖아요!” 

“호호호….” 

“하나 더!” 

“또 있어?” 

“내 이야기는 원 플러스 원이야. 기말고사 미술 시험 문제가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한 작가가 누구냐는 거였어. 맨 앞자리 학생이 답안지에 ‘로댕’이라고 썼대. 다음 학생이 그 답안지를 훔쳐보다가 잘 안 보여서 ‘오뎅’이라고 적었대. 세 번째 자리의 맹구는 똑같이 쓰려다 커닝으로 의심받을까 봐 이렇게 적었대. 그 답이 뭘까?” 

“글쎄?” 

“덴뿌라!” 

“까르르….” 

그녀는 목련꽃 봉오리가 터지듯 웃었다. 

“어디에 있든 지금처럼 항상 웃어야 해. 그 웃음소리로 널 찾을 수 있게.” 

“별소리 다 하네. 내가 가면 어딜 간다고. 근데 왜 그렇게 쳐다봐?” 

“눈에 담는 거야.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보려고.”

 치우의 멘트에 그녀는 감정이 북받쳤다. 인생을 살다 보면 사소한 일로 상처받고 이별하기도 하지만, 사소한 일로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혜원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두 사람의 한쪽 손을 잡고 있던 혜성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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