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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08. 2024

악녀의 유혹

도로에 갓 출고된 외제 스포츠카가 정차해 있었다. 차 키를 건넨 지나가 조수석에 앉았다. 치우는 망설이다가 운전대를 잡았다.

“자기는 꿈이 뭐야?”

“네?”

“밥을 먹는 이유가 뭐냐고?”

“…”

그의 무응답에 지나가 말을 돌렸다.

“이 차 멋지지? 방금 뺀 차야. 치우 씨에게 보여주려고 나 안달 났었어. 마음에 들어? 자기와 어울리는 스타일로 고르느라 힘들었어.”

치우는 그녀의 생색에 여전히 무관심했다.

“머리가 아프고 속도 안 좋은데, 우리 드라이브라도 갈까? 신선한 공기를 쐬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

“금 사장님 사무실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급한 건 아니야. 야외로 코스를 잡아. 빨리.”

“민 여사님 모셔다 드리고 곧 들어가야 해요. 할 일이 많아서요.”

“그 일 금 사장이 시킨 거지? 치우 씨에게 내 개인적인 일을 시켰다고 할 테니 걱정하지 마. 오늘 우리 멋진 추억을 만들어 보자. 어쩌면 돌아올 때 당신이 이 차를 갖게 될지도 몰라.”

“그, 그건 곤란…”

“내가 자기 입장이 난처하지 않게 해 줄게. 치우 씨, 그거 모르지? 금 사장 사채 사무실은 나 없이는 돌아가지 않아. 내가 지금이라도 자금줄을 끊으면 올 스톱될 걸. 그러니 그 인간은 무조건 내 말을 들어야 해.”

잠시 주저하던 치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금 사장님과 민 여사님의 관계가 특별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녀는 깔깔 웃다가 차갑게 말했다.

“무슨 특별한 관계? 서로 필요해서 공생하는 거지. 한마디로 악어와 악어새라고 할 수 있어. 근데 중요한 건 내가 악어라는 거야. 이번 기회에 금 사장의 그늘에서 독립하는 게 어때? 계속 그 밑에서 치다꺼리나 하다가 언제 돈을 모으겠어? 이 얼굴의 상처 좀 봐. 금 사장이 미워 죽겠어.”

“전 아는 게 별로 없어서…”

“그 걱정은 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치우 씨는 관리만 해. 처음에 금 사장도 구멍가게에서 시작했지만, 나를 만나서 이만큼 컸어. 단, 수익금은 반반이야.” 

지나는 ‘반반’을 강조하다 도리질을 했다.

“아니, 아니. 자기에게 다 줄 수도 있어. 이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데이트를 해 준다면 말이지. 내 제안이 어때? 사실 이 차도 당신에게 주려고 뺀 거야.” 

“그렇지만….”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차가 금문성 사무실에 가까워지자 치우는 속도를 줄였다. 

“그냥 통과하라니까!” 

지나의 신경질적인 고함에 그는 얼떨결에 액셀을 밟아 사무실을 지나쳤다. 

“미안해. 소리 질러서. 솔직히 나, 치우 씨를 좋아하고 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한 일을 하는 게 마음이 아파. 해결사로 일하다가 무슨 봉변이 생길지 모르잖아. 칼에 맞거나 감옥에 갈 수도 있어. 난 당신이 본래 모질지 않은 성격이라는 걸 알아. 환경만 바뀐다면 분명 다른 사람이 될 거야.” 

고백하던 그녀가 말머리를 바꿨다. 

“그래도 이 사채업이 돈을 모으기는 빠르니까, 일단 여기서 기반을 잡은 다음에 번듯한 사업을 해도 늦지 않아. 자기는 아직 젊잖아. 내가 그때까지 함께할게.” 

“왜 저에게 이런 호조건을 제시하는 거죠? 함께할 사람은 저가 아니어도 많을 텐데요.” 

“나는 치우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때문이지. 속내가 순수한 걸.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아. 그러니 왔을 때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잡아야 해.” 

지나는 그의 목을 당겨 귀에다 속삭였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할 거지?” 

‘그래, 이 기회가 나의 신분 상승에 마지막 행운이 될 수 있어.’ 

치우의 표정에는 갈등이 역력했다. 그러다 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것이 올가미가 되어 평생 이 여자의 노리개가 될 거야.’ 

그 순간 해맑은 미소의 혜원 얼굴이 떠올랐다. 돌연 그는 왔던 길로 유턴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저를 생각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왜? 금 사장이 무서워서?”

“그건 아니에요. 저는 금 사장님께 빚이 있어요.”

혜원에 대한 이야기는 차마 꺼내지 못하고 변명을 했다.

“무슨 빚?”

“제가 힘든 시기에 저를 믿어주신 분이에요.”

“아, 그 얘기구나! 금 사장이 자기의 인간성만 믿고 엄마의 수술비를 빌려줬다는 거. 그래서 치우가 자기를 절대 배신할 수 없다고 떠들고 다녔지.”

그녀는 벌써 알고 있다는 듯이 비웃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아는 금 사장은 ‘이 세상에 두 사람만 모여도 배신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야.”

“절대 그런 분이 아니에요.”

“설령 그렇더라도, 지금까지 충성으로 이미 그 빚을 갚고도 남은 것 아냐? 아니면 나를 믿지 못해서?”

“...”

지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애인이 있어?”

그는 혜원이 떠오르자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맞구나! 몇 살이야? 그 여자의 어떤 점이 좋은데? 나보다 돈이 많아?”

그녀는 흥분한 목소리로 끈질기게 물어왔다.

“천사 같은 사람이죠.”

“치우 씨는 아직도 순정소설을 읽는구나. 근데 그 여자는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어?”

지나가 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치우는 즉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천사 같은 여자라면 당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줄 텐데, 왜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해? 그거 모순 아냐? 나를 봐! 지금 자기의 전부를 포용하고 있잖아. 그럼 누가 더 나은 건데?”

그녀의 독설과 회유가 이어졌다.

“천사는 죽어서나 만나는 존재고, 현실의 사랑은 안정된 직장과 돈이 있어야 해. 근데 치우 씨는 아무것도 없잖아.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앞으로도 밑바닥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거지. 나는 자기가 한번뿐인 삶을 구차하게 사는 게 싫어. 멋지게 성장할 수 있도록 키워주고 싶단 말이야. 결혼하자는 것도, 그 여자와 헤어지라는 것도 아니야. 단지 내가 외로울 때 친구가 되어주고, 아플 때 위로해주는 연인으로 지낼 수는 없을까?”

지나의 목소리는 점점 애원하는 듯한 톤으로 변해갔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왜? 왜 안 된다는 거야? 그 여자가 나보다 예뻐서? 내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럼 그 여자는 치우 씨를 위해 뭘 해줄 수 있지?”

“저는 그녀를 실망시킬 수 없어요.”

“왜지?”

“그건 제가 민 여사님의 제안을 거절하는 이유를 민 여사님이 모르는 것과 같아요.”

“이렇게 사정해도 안 될까?”

“전 그럴 수 없어요.”

“자기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바보야!”

지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차는 금문성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민 여사님, 다 왔습니다.”

감정을 가다듬은 그녀가 속삭였다.

“당장 답을 달라는 게 아냐. 생각할 시간을 줄게. 생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니까. 이 차는 당신이 몰고 가. 벤츠도 한 번 타면 어차피 중고차야.”

지나는 기습적으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차에서 내려 빌딩으로 들어갔다. 치우는 차 키를 건네려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두 사람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더니 차 키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차 키를 줍는 사이, 지나는 빠르게 사라졌다.


사무실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세두가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둘이 언제부터 저런 관계였지? 금 사장은 알고 있을까?”

금문성 방으로 향하는 그녀를 따라 세두가 들어갔다.

“민 여사님, 스포츠카를 뽑으셨나 봐요? 멋지네요.”

“그건 내 차가 아니야. 친구 차인데 시승식 기념으로 태워 준 거야… 봤어?” 

“네. 우연히요. 그림이 좋던데요?” 

“그, 그래.” 

그녀는 금문성의 눈치를 보며 허둥거렸다.  

“민 여사, 큰 금액이 묶여 있는데, 돈을 더 융통할 수 없을까?” 

“저번에 줬던 돈도 아직 회수가 안 됐잖아. 사고났어?” 

“며칠 내로 해결될 거야.” 

“안 돼!” 

냉정한 지나의 거절에 그는 애걸하기 시작했다. 

“민 여사 주변에 전주들이 많잖아. 좀 안 될까?” 

“걔네들이 나를 믿고 주는 거지 금 사장 보고 주는 게 아니야. 만일 금 사장이 배째라 하면 내가 다 독박을 써야 해. 저번에 사고 났을 때 그년들이 얼마나 난리쳤는지 알아? 결국 내 돈으로 해결했잖아!” 

“그래서 민 여사가 이자를 더 챙기면서…” 

금문성이 볼멘소리를 냈다. 

“이번엔 꼭 며칠이야. 해 줄 거지?” 

“고민해 볼게.” 

그는 지나가 겉옷을 입는 동안 슬쩍 그녀의 엉덩이를 만졌다. 

“이러지 마! 나 오늘 그런 기분 아니야.” 

그녀가 손을 탁 치자 금문성은 무안해졌다. 나가는 지나의 등을 향해 그는 소리쳤다. 

“저녁에 만나!” 

“그때 바이오리듬 봐서.” 

'건방진 년. 네가 좋아서 이러는 줄 아냐? 다 돈 때문이지. 언제쯤 저년에게서 쩐 구걸을 안 하려나.’ 

금문성은 이를 악물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현관을 나서는 지나에게 관리인이 차 키를 건넸다. 

“어떤 젊은이가 민 여사님께 이 키를 주라고 맡겼어요. 차는 주차장에 있대요.” 

'개자식. 끝까지 무시해? 하지만 날 잘못 본 거야. 나는 한 번 물은 먹이는 절대 놓치지 않아.’ 

그녀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조 실장, 나 민 여사야. 내일 커피숍으로 나와.” 

이어 앙칼지게 중얼거렸다. 

“곧 너는 무릎을 꿇고 내게 살려 달라고 매달릴 거야. 왜? 갈 데가 없으니까.” 

지나의 눈빛에 악의가 서렸다.


여자들이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지나가 들어오자 손을 흔들었다. 식탁 위에는 고급 술과 화려한 안주가 놓여 있었다. 이미 몇몇은 술에 취해 볼이 붉어졌다.

“금 사장은 민 여사의 돈만 불려주고 우리에게는 별로 신경을 안 쓰더라.”

“그러게. 내 돈은 곰팡이가 슬 정도야.”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섬싱이 있는 거 아냐?”

여자들은 서로 맞장구치며 지나를 놀렸다. 상석에 앉은 통통한 몸매의 한 여사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다들 준비한 곗돈 내놔.”

한 여사가 식탁을 치며 말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계주인 그녀에게 쏠렸다. 여자들은 한 여사에게 돈을 전하며 아부했다. 지나도 시큰둥하게 곗돈을 건넸다.

“뭐, 내게 불만 있어?”

“아, 아니.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미모나 지성, 학벌보다 돈으로 서열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한 여사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식사가 끝날 무렵, 지나가 서둘러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 전부 얼마예요?”

“한 여사님께서 벌써 계산하셨습니다.”

체면을 세우려던 지나는 한 방 먹은 꼴이 되었다.

“역시 돈 많은 부자 사모님은 다르긴 하네.”

“그렇지. 오늘 꽤 나왔을 텐데.”

“저번에도 한 여사가 냈잖아.”

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여사를 추켜세웠다.

“다음에는 민 여사가 부자인가?”

“아마도 그럴걸.”

“2차로 나이트 가는 건 어때? 내가 쏠게.”

지나는 열등감을 극복할 기회를 노렸다. 한 여사를 제외한 모두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한 여사도 함께 갈 거지?”

“난 약속이 있어 안 돼.”

그녀의 냉정한 거절에 지나가 머쓱해졌다. 여자들이 한 여사에게 같이 가자고 간청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지못한 듯 승낙했다. 대기하던 기사가 한 여사와 여자들을 태우고 먼저 떠났다.

“한 여사 년, 나보다 어린 게 말끝마다 반말이야. 저팔계처럼 생겨서 거만하기까지. 아니꼽지만, 저년 보다 돈이 많아질 때까지는 참자, 참아. 그래도 큰돈이 아쉬울 땐 저년의 돈구멍이 필요하니까.” 

지나는 울분을 삭이며 씩씩거렸다. 달리는 모범택시에 홀로 탄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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