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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07. 2024

천사와의 인연

병원 입구에 서 있는 치우를 향해 그녀가 경쾌하게 달려왔다. 하얀 피부에 긴 생머리, 청순한 외모가 눈에 띈다.     

“이 상처는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 있었어?”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가 회사 계단에서 넘어졌어. 원래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못 하잖아.”     

치우는 은근슬쩍 둘러댔다.     

“무지 아프겠다. 내가 공짜로 치료해 줄게. 나, 이 병원 간호사잖아.”     

혜원의 손에 이끌려 병원 출입문까지 간 그는 주춤했다. 싸움의 흔적이 드러날까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실랑이 끝에 그들은 벤치에 앉았다.     

“자기 고집은 내가 못 당한다니까.”     

두 손을 들어 항복하는 제스처를 취한 그녀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오늘 응급실에서 난리가 났었어. 어떤 사람이 팔에 자상을 입어서 왔는데, 자기부터 치료를 안 해 준다고 난장판을 만든 거야. 경찰이 와서야 겨우 진정됐어. 몸에 문신이 엄청 많은 걸 보니 깡패 같았어. 치우 씨도 그런 사람 본 적 있어?”     

“아, 아니. 천만다행이네. 우리 혜원이 다치지 않아서.”     

“직원들은 무서워서 피했지만, 나는 그 사람이 행패 부리는 걸 휴대폰으로 다 찍었어.”     

“뭐 하려고?”     

“나중에 오리발을 내밀면 증거로 남기려고. 나 용감하지?”     

“응. 정말 대단해!”     

치우는 감탄하면서도 속이 뜨끔했다.     

“요즘 금융회사들이 구조조정으로 어수선한데, 자기 회사는 괜찮아?”     

“그, 그럼. 우리 회사는 그런 거 없어. 분위기도 좋고.”     

혜원은 그가 제2금융권에 속하는 캐피탈의 채권추심팀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1년 전, 치우는 병원 근처에서 교통사고로 다리가 골절되었다. 그때 혜원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깁스를 하고 한 달 정도 입원한 것이 그들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처음 병실에 들어온 그녀는 청초함 그 자체였다. 환자를 대하는 혜원의 나긋나긋함은 마치 백의의 천사인 나이팅게일 같았다.     

그는 링거를 핑계로 말을 걸었다.     

“약이 너무 빨리 들어가는 것 같은데요?” 

“천천히 들어가게 해드릴게요.”      

이슬방울이 은쟁반 위를 굴러가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녀의 따스함이 치우의 마음에 사뿐히 다가왔다.       

'그래. 심장이 이끄는 대로 직진하는 거야!‘      

치우는 혜원과 가까워질 방법을 고민한 끝에 인터넷에서 유머를 찾아 진료 시간에 이야기해주곤 했다. 그때마다 그녀와 병실의 환자들은 웃음이 터졌다. 드디어 그의 계획이 성공하여 환자와 간호사 사이의 관계를 넘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마음을 정하기 힘들면 운명에 맡겨보세요.”      

첫 데이트를 신청하며 치우가 한 말이다. 그녀에게 쏜 큐피드의 화살이 잘 꽂히기를 바라며… 다행히 마법이 통했는지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사랑은 선택하는게 아니라 다가오는 거래요.”      

이렇게 시작된 만남이 연인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데이트에서 혜원은 그의 직업에 대해 물었다. 치우는 차마 자신의 일을 말하지 못하고 그렇게 둘러댔다. 어차피 빚을 받아내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요즘 경제가 좋지 않잖아. 혹시 돈을 못 갚는 사람이 있어도 너무 모질게 대하지 마. 그 사람들의 마음은 오죽하겠어? 자기는 안 그렇지?”      

“그, 그럼. 당연하지. 나는 주소지로 독촉장만 보내니까 채무자들과 직접 만날 일이 없어.”      

그는 거짓말을 하느라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이네! 아빠가 조만간 치우 씨를 집으로 초대하고 싶어 하셔. 언제가 좋을지 생각해보고 말해 줘. 부담은 갖지 마.”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찾아 뵐게.”      

치우의 목소리가 축 쳐졌다.       

“오늘 우리 영화나 볼까?”      

혜원의 제안에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재빨리 치우의 팔짱을 끼고 그를 이끌며 걸었다.      


그는 춘식과 민수를 만나기 전, 금문성 사채 사무실에서 세두와 함께 일했다. 그러다 두 사람을 만난 후 금 사장에게 사정하여 독립 사무실을 얻고 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 

돈이 원수라 악착같이 벌었지만, 그동안 흥청망청하여 모은 돈이 별로 없다. 하지만 혜원을 만나고 나서는 절약하는 습관이 생겨 예전보다 나아졌다. 앞으로 2~3년간 열심히 돈을 모아 부동산 업을 할 계획이다. 여유 자금으로는 경매에 참여해 재산을 늘릴 생각도 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공인중개사 공부를 틈틈이 한다.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지나가 스스럼없이 들어왔다. 치우는 그녀의 버릇없는 행동에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사채 사무실에서 그녀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는 고급스러운 옷과 비싼 액세서리로 치장한 모습이었다. 40대 초반으로는 믿지 못할 정도로 젊어 보이며, 요가로 다져진 날씬하고 섹시한 몸매였다. 그녀의 몸에서 퍼진 향수 냄새가 사무실 공기를 바꾸어 놓았다.     

치우는 공부하던 책을 슬며시 서랍에 넣었다. 지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았다.    “이걸 어쩌나. 우리 귀공자님 얼굴에 스크래치가 났네.”     

상처를 만지려는 그녀의 손을 피하며 치우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긴 웬일이세요?”     

지나는 그의 무시하는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글거렸다. 어쩌면 그의 이런 행동에 매력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다른 남자들은 모두 자기를 왕비처럼 모시니까. 그녀는 손을 이마에 대고 아픈 척을 했다.     

“금 사장 사무실에 가려는데 현기증이 나네. 도 실장, 거기까지 운전해 줘.”     

“네, 그러죠.”     

치우는 그녀의 반명령적인 말투가 불쾌했지만, 금 사장을 생각하니 어쩔 수 없었다. 만약 그녀가 금 사장에게 고자질을 한다면 별일 아닌 일로 핀잔을 듣는다. 

“그럼, 두 분 수고하세요. 언제 식사라도 해요. 제가 화끈하게 쏠게요.”     

지나는 문을 나서며 그의 팔을 자신의 겨드랑이에 꽉 끼웠다. 당황한 치우가 팔을 빼려 할수록 그녀는 더욱 파고들었다.     

“저 여자 누구야? 멋지네!”      

민수가 부러운 눈으로 물었다.

“민 여사라고 금 사장의 애인이자 스폰서이자 큰손인 전주야.”     

“죽여주는데! 나도 저런 여자 하나 있으면 좋겠어.”     

“금 사장이 죽은 다음에나 가능할 일이지.”     

“말이 그렇다는 거야. 근데 저 여자 치우 형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둘 사이 분위기가 요상하네.”     

“잘 봤어. 민 여사가 치우에게 꼬리를 치는 중이야. 참, 신은 불공평해. 잘생긴 놈은 여복까지 덤으로 받는데, 나 같은 놈은 그 흔한 잡복도 없으니 말이야. 그래서 난 무신론자야.”     

“춘식 형 낯짝으로 웬 여복이야! 글구 형이 왜 잡복이 없어? 술집에서 차비까지 팁으로 주니까 인기 짱이잖아.”     

춘식이 투덜대자 민수가 비아냥거렸다.     

“그만해! 그 얘기.”     

벌떡 일어나 민수를 잡으려는 그를 피해 도망가느라 사무실이 소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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