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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을 확보하라

by 이인철

직원의 안내를 받아 배심원들은 법원 구내식당으로 갔다. 그들은 칸막이로 나뉜 식탁에서 조용히 식사를 했다. 이후, 휴식을 위해 평의실로 이동하여 둥근 탁자에 둘러앉았다.

8번 배심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이 좋지 않은데, 못 한다고 할 걸 그랬나 봐요.”

“이런 경험도 해보는 게 좋죠. 전과가 있으면 안 되는데 우리는 그만큼 착하게 살았다는 거잖아요.”

1번 배심원이 대꾸했다.

“저는 법원에서 등기가 와서 긴장했어요.”

“나도 그랬어요.”

10번 배심원의 말에 6번 배심원이 맞장구쳤다.

“이 재판 언제 끝나나요? 빨리 가서 프로야구를 봐야 하는데.”

7번 배심원이 불평했다. 연우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 직원이 문을 열었다.

“이제 법정으로 갈 시간입니다.”

“저, 화장실에 잠깐 들렀다 가도 될까요?”

5번 배심원이 직원에게 사정했다.

“어서 갔다 오세요.”

“저도요.”

기회를 엿보던 연우는 그를 재빨리 따라나섰다. 화장실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연우는 나오지 않는 소변을 쥐어짜며 말을 걸었다.

“결정적인 증거인 블랙박스가 사라진 게 이상하지 않나요?”

5번 배심원은 평의 전에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금지된 것을 알고 있어 머뭇거렸다. 연우는 초조해졌다. 소변을 누는 시간이 얼마나 걸린단 말인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그는 재판과는 상관없는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을 하세요?”

“전교조 활동을 하다 해임되어서 지금은 쉬고 있어요.”

‘좋아! 아군이네!’

순간 연우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저는 교원 임용 시험에 합격해서 발령 대기 중이에요. 교직 선배님이시네요. 앞으로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별말씀을요.”

그제야 그는 같은 분야에 있다는 사실에 경계심을 풀었다.

“근데 전교조에 가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가입하려고요?”

연우가 한술 더 뜨자 그는 동지를 만난 듯 기뻐했다.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조만간 전화를 드릴게요.”

“제 번호는…”

어느새 서로의 거리감이 없어진 그들은 복도를 걸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블랙박스가 사라진 것이 수상해요.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도 그래요. 피고인 측이 블랙박스의 행방에 이렇게 집요한 걸 보면, 결백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의 동의에 연우는 힘이 솟았다. 문 앞에서 직원이 빨리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걸음을 재촉하는 그의 귓가에 지상의 음성이 들려왔다.

“배심원 중에 아군을 확보하면 평의 시에 유리해. 물론 직원의 감시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연우는 마치 시험에 합격한 듯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점심시간에 지상과 수진은 식사도 거르며 회의에 들어갔다.

“자, 그럼, 이 재판의 배심원들에 대해 분석해 볼까? 1번이 가장 연장자로서 배심원들을 이끌 가능성이 커. 이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어필해야 할 것 같아.”

“7번 배심원은 어때?”

“그 사람은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어. 30대 미혼의 평범한 회사원이 배심원들과 대립할 이유가 없잖아. 아마도 그의 바람은 빨리 끝내고 프로야구를 보러 가는 걸 거야.”

그들은 1번이 배심원 대표가 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논의를 이어갔다.


석낙은 법원 옥상에서 다시 지상을 불러냈다.

“아이고, 고 검사님. 왜 자꾸 귀찮게 하세요? 남들이 보면 우리가 사귀는 줄 알겠어요.”

지상이 놀리고 나서 쌀쌀하게 말했다.

“또 무슨 일이야?”

“그 자식의 범행이 뻔하잖아.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너,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거래하자. 한 번 패소하는 게 이 바닥에서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지? 원래 6년인데 반토막으로 해줄게. 할 거야 말 거야?”

“도대체 고 검사님이 왜 이리 생떼를 쓰실까?”

“현실적으로 딱 좋잖아. 그런 놈의 변호를 맡아서 이 정도면 선방한 거라고. 웬만한 사람들도 다 인정해 줄 거야.”

배심원단의 분위기에 위기감을 느낀 석낙은 유죄만 이끌어 내면 된다는 생각으로 머리를 굴렸다.

“구형이 3년이라... 나쁘지 않네. 모두가 해피하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3년도, 3일도 아닌 무죄야.”

“무죄라고? 전직 검사란 인간이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와 증인들이 있는데 그런 말을 해? 이제 네가 자진해서 네 무덤을 굴삭기로 파는구나!”

“근데 석낙아, 너 왜 이 재판에 이렇게 집착하냐?”

“네가 검사인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냈거든.”

“그럼, 연고를 사주면 되겠네!”

“이 자식, 누구 약 올려?”

“고석낙. 네 성이 '높을 고'에 이름은 '돌 석', 떨어질 '낙'이지?”

“어떻게 그걸 알았어?”

“곧 높은 곳에서 돌이 떨어져 깨질 거야. 그래서 네가 옥상을 좋아하는구나.”

지상은 고개를 숙여 땅을 내려다보았다.

“여기가 떨어지기에는 안성맞춤이네. 요즘은 날개가 있어도 추락한다더라? 아, 글구 검사가 피고인 변호인에게 형량 거래를 제안했지? 그거 직권남용죄인데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아라?”

석낙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때 기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이, 고 검사. 왜 불렀어?”

“잘 놀고 있네! 이렇게 플레이해도 되냐? 검사와 의뢰인 변호인이 쥐새끼처럼 만나고. 해당 사건에서 미팅 금지인 거 몰라?”

“동기라 사적으로 보는 거야. 강 변, 너도 끼워줄까? 아, 아니지. 수석과 차석 모임에 꼴찌가 끼면 평균 점수가 내려가서 안 되겠다.”

기탁이 그의 비위를 긁었다. 지상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정말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우리의 공통점이 뭔지 아냐?”

“응?”

“뭐야?”

“바로 흙수저라는 거다. 너희들, 연수원 2학기 기말시험 기억하냐? 둘이 작당해서 내게 민법 시험 범위를 잘못 알려줬지. 덕분에 그 과목에서 과락이 나왔잖아. 근데 왜 그대로 넘어갔는지 아냐? 장학금 수혜자가 한정되어서 양보한 거야. 누군가는 탈락해야 했으니까.”

한편, 지상은 마음이 아팠다. 한때는 친구로서 우정을 나누었지만, 지금은 서로 갈등의 관계가 되어서였다.

“사람이 괴물로 변할 때 정작 자신은 모르지. 그렇다고 악마가 되면 안 되는 거잖아."

지상의 은근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뻔뻔하게 나왔다.

“증거가 있냐?”

“있다면 증명해 봐!”

“자식들, 끝까지 유치하게 굴고 있네. 오기탁, 네 이름 풀이를 해 주마. 오리가 기어가다 탁하고 죽을 거다.”

문으로 향하던 지상이 단호하게 말했다.

“피고인은 분명 무죄야. 그리고 형벌의 고통이 범죄로 얻는 이익보다 크다는 것을 명심해. 그것이 판결의 원칙이야. 너희들은 절대 나를 이길 수 없어. 왜냐고? 난 항상 히든카드가 있으니까.”

“네가 뻥치는 것에 우리가 쫄 것 같아?”

“아직 주둥이는 살아 있네!”

“마음껏 떠들어라. 곧 피눈물을 흘리게 될 테니까. 너희들, 미리 상조회에 가입하는 게 좋을 거야. 조의금도 신용카드 할부가 되냐? 글구 니들, 병풍 뒤에서 향냄새 맡지 않으려면 용도 변경 좀 하고 살아라. 그럼, 저승사자가 내려가마. 벌레 같은 것들아.”

그들은 사법연수원에서 만났다. 처음에는 동병상련으로 친하게 지냈지만, 지상은 시험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우정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런데 이제는 재판에서 석낙과는 칼과 방패의 대결을, 기탁과는 적대적인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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