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국립과학수사연구소근처의 카페에서 기탁과 분석실장이 만났다.
“아드님과 따님이 영국의 명문대에 유학 중이더군요.”
“어, 어떻게 아셨나요?”
“태양로펌의 정보력은 국정원보다 빠르답니다.”
“그런데 왜 저를 만나자고 하셨죠?”
"요즘 자녀 유학비 대기가 버거우시죠? 그래도 부모로서 학업은 마치게 해야지 않겠어요?"
기탁은 조심스럽게 돈가방을 건넸다.
분석실로 돌아온 실장은 혈중알코올농도 0.02%에서 두 번째 0을 2로 수정했다.
“이렇게 간단한 일에 1억이라니. 나는 정말 복 받은 놈이야!”
0.22%로 바뀐 새로운 감정서가 복합기에서 출력되었다.
지상은 항공사진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상태에게 물었다.
“이 지점에서 백도진 씨와 운전을 교대했다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속초 10km 도로 표지판을 봤기 때문입니다.”
“교통 표지판을 본 것이 확실하다는 거죠?”
“네.”
“이상입니다.”
“검찰 측 반대 심문을 하세요.”
“본 검사가 현장 검증을 했지만, 피고인이 교대했다는 지점에서 도로 표지판까지의 거리는 약 80m입니다. 이 거리로는 그것이 교통 표지판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깜깜한 밤에 속초 10km라는 글자를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피고인은 만취 상태에서 다른 도로 표지판과 혼동했을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화면에 일기예보가 나타났다.
“사고 당일은 비가 내리지 않았고 안개도 없는 맑은 날씨였습니다. 즉, 시야 확보가 쉬웠다는 것이죠. 피고인의 시력은 어떻게 되나요?”
“양쪽이 1.5입니다.”
“상당히 좋은 편이군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모니터에 자동차 관련 문헌이 보였다.
“자동차 전조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검찰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함입니다. 전조등은 클리어 타입과 프로젝션 타입으로 나뉘며, 클리어는 빛을 넓게 퍼뜨리고 프로젝션은 좁고 멀리 비춥니다. 피고인이 운전한 BMW i8의 전조등은 성능이 뛰어난 프로젝션 타입입니다. 당일의 날씨와 전조등을 고려할 때, 피고인이 교통 표지판을 보았다는 주장은 매우 신뢰할 수 있습니다.”
“재판장님, 변호인은 단순한 이론에 근거해 억측을 펴고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변호인, 정황으로 증거를 입증하는 것은 자제하세요.”
심 판사는 노골적으로 검찰 편을 들었다.
“검찰이 현장 검증을 했을 때 도로 표지판을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모든 환경은 사고 당시와 동일합니다.”
화면에 교대 지점에서 찍은 교통 표지판 사진이 떴다. 어두운 배경 속에 희미한 물체가 보였다.
“저게 도로 표지판인가요?”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네.”
“피고인이 거짓말을 한 건가?”
배심원들 사이에서 소곤거림이 일자 석낙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네가 준비한 비밀 병기가 겨우 그 정도겠지.’
지상은 씩 미소를 지었다.
“검사님이 현장 검증을 했을 때 전조등의 상태는 어땠나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하향등이었나요, 상향등이었나요?”
“그, 그건….”
석낙은 머뭇거렸다. 지상이 상태에게 물었다.
“당시 운전할 때 전조등의 위치는 어땠나요?”
“워낙 험한 길이었고 그 시간대에 맞은편 차가 없어서 상향등을 켰습니다.”
“바로 이 점입니다. 이 문헌에 의하면 하향등의 가시거리는 40m, 상향등은 100m입니다. 따라서 피고인이 교통 표지판을 보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검찰 측은 아마도 습관적으로 하향등을 켜고 사진을 찍었을 것입니다.”
“재판장님, 전조등의 가시거리는 제조사마다 다르기에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인정합니다.”
심 판사는 거듭 석낙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지상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로써 도로 표지판 식별에 관한 공방은 무승부로 끝났다.
모니터에는 차량 내부 모습이 나타났다.
“가해 차량은 이미 폐차되어 동일한 차량을 보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 부분에 설치된 블랙박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만약 충돌로 인해 떨어졌다면 차량 내부 어딘가에 있어야 할 텐데 말이죠.”
“검찰 측에서는 차량 충돌 시 블랙박스가 외부로 튕겨 나갔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직원들이 사고 현장을 철저히 수색했지만, 안타깝게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석낙은 블랙박스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피고인은 에어컨을 켜고 운전했죠?”
“네, 한여름이라서요….”
“그렇다면 모든 창문이 닫혀 있었겠군요?”
“네.”
“재판장님, 지금 변호인은 사건과 관련 없는 질문으로 재판 진행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변호인은 어떤 주장을 하려는 건가요?”
“피고인의 진술에 따르면 모든 창문이 닫혀 있었으므로 검찰의 추정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블랙박스가 누구에게 유리하기에 변호인이 이토록 그 행방에 매달릴까요? 피고인일까요? 백도진 씨일까요?”
“사고 당시 탑승자 4명은 모두 기절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변호인의 주장은 한낱 논쟁거리에 불과합니다.”
“아닙니다! 이는 누군가가 고의로 블랙박스를 숨기거나 파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변호인은 그 행방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호인, 흥분하지 마세요. 그런데 피고인 측은 왜 피해 차량의 블랙박스를 회수하지 않았나요?”
“그 차량의 블랙박스는 고장났습니다.”
“그렇군요. 점심시간이 되었으니, 휴정을 선언합니다. 오후 재판은 1시 30분부터 증인 심문으로 속행하겠습니다.”
증거 조사는 이렇게 끝났다.
한편, 세호는 지방의 고속 터미널에 도착해 시외버스를 타고 바쁘게 이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