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유난히도 맑았던 지난 3월 하순,
달력은 봄을 가리키고 있지만 제법 쌀쌀한 날씨였습니다.
그런 날,
지인을 오랜만에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탁 트인 공간과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이곳, 저는 이런 공간이 참 좋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도중, 창밖으로 펼쳐진 서울의 풍경을 감상했습니다.
특히 한강을 건널 때마다 드는 생각—
서울에 이렇게 아름다운 강이 흐른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전엔 달리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잠시 멈춰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 참 좋습니다.
박물관에 도착한 뒤에는 지인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최근 일이 바빠 지인의 아들 결혼식에 남편만 참석을 해서 마음에 걸렸는데,
이런저런 결혼식 뒷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지인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지만,
어떻게 알고 아버지의 친구분이 결혼식에 참석하셨다는 이야기에
울컥했습니다.
부모님이 안 계셔도 자신의 자리를 멋지게 지켜낸 지인.
그 모습을 떠올리며, 참 훌륭한 사람을 곁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식사 후 티타임을 갖고자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
새로운 일을 처음 시작하는 저를 위해
"완벽하게 준비돼서 시작하는 것은 없다."라는 응원까지 해주었습니다.
박물관에서 우리가 처음 향한 곳은 2층 상설 전시장.
그곳에선 1866년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 군대가 가져갔다가 2011년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를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왜 남의 나라 소중한 기록물을 가져간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약탈—그 흔적이 이렇게 오랜 세월을 돌아 우리에게 돌아오다니,
참 아이러니하고도 씁쓸한 일입니다.
외규장각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의 명으로 강화도에 설치되었던
왕실의 중요 기록물을 보관하던 장소이며,
의궤는 왕실의 중요 행사를 세세하게 기록한 책이라고 합니다.
왕실의 혼례, 장례, 연회, 군사 행사 등
다양한 의례의 절차, 참여자, 사용된 물품, 공간 배치 등을 세세하게 담고 있지요.
그중 외규장각 의궤는 정조의 명으로 강화도에 세운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왕실의 기록물로,
대부분 왕이 직접 열람하던 ‘어람(御覽)’용입니다.
오랜 세월을 건너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 의궤를 마주하며,
잠시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눈에 띄었던 건, 혼례를 간소화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처럼 화려하고 거창한 것이 아닌,
본질에 충실한 예식을 지향하려 했던 옛사람들의 태도가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마음은 어쩌면,
과시보다 진심을 중시했던 조선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한 권의 책이지만,
그 안에는 시대의 숨결과 사람들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었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소중한 사람과 함께 조용한 공간에서 나눈 대화와 감동의 시간.
오늘 하루가 마음에 잔잔한 울림으로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이런 하루가 있다는 것이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