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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Nov 25. 2024

19-2. 복귀

딸과 나는 재활하는 아내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처지에 놓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둘이 지내온 기간이 거의 석 달에 달했다. 물론 엄마도 함께 있었고 아내가 M재활병원 간호·간병 통합 병동으로 옮기고 난 이후에는 장모님도 간혹 와서 도와줬다. 그나마 아내가 G병원에 있을 때는 1~2주에 한 번씩 딸과 함께 면회하면서 딸이 평소에 아내를 보지 못해 생기는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반면, M재활병원은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원할 때마다 아내와 딸이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면회 정책을 훨씬 원칙적으로 운용하는 탓에 오히려 병원을 옮긴 후에 만나는 게 더 어려워졌다. 평일에 잠깐씩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러한 만남은 원천 봉쇄되고 있었고, 주말에도 사전에 통지하지 않은 외출도 불가능했다. 아내가 2주에 한 번씩 23시간짜리 외출을 신청해서 나오는 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결국 아내가 가까운 병원으로 옮긴 뒤에도 딸과 나는 둘이 남았다. 특히, 주말에는 엄마들도 최대한 쉬게 해주고 싶었기에 딸과 둘이 나가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원래 같으면 아내와 셋이 갔을 곳들을 딸과 둘이 찾아갔다. 주중에 출근하면서 쌓인 피로가 계속 축적되고 있어서 피곤하긴 했지만, 아내가 회복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나서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아내는 자유롭게 휴대폰도 쓰고, 전화나 메신저 사용이 가능해질 정도로 좋아졌다. 이제는 퇴원할 수 있을지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하냐의 문제가 되니 불안감이 갑작스레 종식됐다. 간병인도 굳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까지 호전이 되니 딸에게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딸은 태어난 이후로 이렇게 장기간 아내 없이 지내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아내가 친구들과 여행을 간 2박 3일의 여행이 아내의 가장 긴 부재였다. 덕분에 엄마 껌딱지였던 딸은 아내의 투병 기간 어쩔 수 없이 나와 가깝게 지냈고, 이전보다 훨씬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 둘이 영화도 보러 가거나, 딸이 좋아하는 서점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고, 둘이 식사하는 일도 잦아졌다. 우리 부부는 평소에 딸이 음식을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조그마한 음식용 가위를 하나 들고 다니면서 딸이 먹을 음식을 씹기 좋은 크기로 잘라주곤 했다. 나는 딸이 먹기도 전에 아내가 자발적으로 음식을 잘라 주는 것이 못내 불만스러운 경우가 많긴 했지만, 입 짧은 딸이 밥 먹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 같으니 별말 없이 아내의 리드를 따랐다.


딸은 쉐이크쉑의 치즈 감자튀김을 좋아한다. 정확히는 감자튀김보다는 그 위에 뿌려주는 치즈 소스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채소나 고기 식감은 싫다며, 함께 사주는 햄버거의 빵 정도만 뜯어먹고 치즈 감자만 흡입하는 게 딸의 식사의 전부였다. 하지만, 아빠 1은 잠자코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어느새 아빠 2와 퓨전이 되어 버린 아빠 1은 이제 아빠 1.5 정도의 모습을 띠고 있었는데, 예전 같으면 무작정 먹으라고 했을 아빠 1은 온화한 협상가가 되어서 딸과 협상에 나섰다.


“오늘 아빠가 먹고 싶은 거 말고, 네가 먹고 싶은 곳에 가잖아? 그러니 오늘은 햄버거도 조금만 먹어봐.”

“응!”


아내가 있었으면 한 번쯤 저항했을 딸이 순순히 내 말을 들으니 짠하기도 했다. 그래도 상황이 이런 걸 어쩌겠는가. 이것도 딸이 받아들여야 했다. 독단적인 부모가 되어서 편식을 뜯어고치고 싶다기보다는 딸이 평소에 기피하는 음식이 맛있을 수도 있다는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다. 나는 음식을 시키고 있는 사이에 딸은 혼자서 자리를 잡겠다며 내 곁을 잠시 떠났다. 아내가 있었으면 함께 할 일을 혼자 하겠다고 하는 딸을 보니 다시 또 짠했다. 하지만,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없고 음식을 주문해야 하니 딸은 몇 분가량이지만 혼자 있어야 했다.

아내 없이 둘이 다니면서 가장 곤란한 것은 화장실에 갈 때였다. 나는 당연히 딸과 함께 여자 화장실에 갈 수 없는 몸이다. 화장실에 갈 일이 있으면, 후다닥 남자 화장실 대변 칸에 나와 함께 들어가서 볼일을 보던 딸도 이제는 머리가 조금 컸다고 무조건 여자 화장실만 가겠다고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으로 가족 화장실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우리 둘은 완전한 교착 상태에 봉착했다. 나와 티격태격하던 딸은 결국 혼자서 화장실에 가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며 부리나케 여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붙잡을 시도조차 못 한 나는 결국 밖에서 혼자 공중화장실에 간 딸을 조마조마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기다렸을 뿐인데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화장실 안에 이상한 사람이 있다가 딸을 해코지하지 않을지, 딸이 화장실 칸에 들어갔다가 변기에 빠지지 않을지, 칸에 들어갔다가 안에서 문을 못 열고 갇히지 않을지.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고 여길 때쯤, 딸은 학교에서 상장을 받은 아이처럼 경쾌하게 뛰어나왔다. 내가 혼자 안절부절못했던 만큼 불안했을 딸도 무사히 목적을 달성하고 나니 여러모로 후련해 보였다. 처음으로 해낸 혼자만의 화장실 출입에 뿌듯한 성취감을 장착한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내 의지와 무관한 딸의 출격에 나는 화장실 문제로부터 갑작스레 해방되었다. 이제 딸이 혼자 화장실을 갈 수 있으니, 화장실에 갈 때마다 어디에 데려갈지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내가 우리와 함께하지 못하는 바람에 딸과 내가 나눠서 감당해야 하는 몫이 생겨버렸다. 딸의 웬만한 친구들에게는 당연히 집에 있는 존재가 되어버린 ‘엄마’의 부재로 일찍 견뎌야 했고, 그와 동시에 주위의 어른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도 해야 했다. 화장실을 혼자 갈 수 있게 된 것이야 본인에게도 편한 일이겠지만, 그 외에도 너무 일찍 알게 된 것들도 많았다. 구급차, 입원, 중환자실, 환자, 재활. 아직은 굳이 몰라도 되는 개념들에 생각보다 빨리 노출되었다. 누구든 피할 수 없는 불편함이겠지만, 그 시기가 조금이라도 늦게 왔으면 좋지 않았을까.

딸과 나는 서로에게 적응하고 있었다. 나와 함께 찾아간 쉐이크쉑에서 난생처음 토마토, 상추, 소고기 패티를 한입에 먹어봐야 했고, 반 개나 먹으면서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에게 맛있는 척을 해야 했다. 햄버거 반 개를 먹는 데 성공한 딸을 보면서 나머지 반도 먹게끔 해봤을 나도 진심으로 새로운 음식에 도전한 딸이 고마웠고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부녀 사이에 아내라는 완충재가 있을 때, 나는 항상 딸에게 조금 더 요구했고, 딸은 아빠인 내게 조금 더 개겼다. 하지만, 그간 충실한 스펀지 역할을 하던 아내가 없어지니 각자 조금 더 조심하고, 서로를 불쌍히 여겼다. 이렇게 우리 둘은 남모를 전우애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식사를 끝낸 우리 둘은 팝콘과 콜라를 사서 연인처럼 영화 데이트를 했다. 한동안 의무들만 충족하며 지내다 보니 딸과 영화 보러 가는 시간은 내게 몇 안 되는 쉬는 시간 같았다. 딸에게 치즈 팝콘 하나 사주면 영화 하나 정도는 금방 지나가 버렸다. 예민한 성격 탓에 극장 안에서 잘 수 없었지만, 머리를 비우고 전방주시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육신은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물론 아예 스위치를 내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날 본 영화는 포켓몬스터 영화였다. 포켓몬스터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도 재밌게 봤던 만화였는데 그 이후로도 세계관이 확장해서 딸과 함께 본다고 생각하니 고마웠다. 이렇게 딸과 공감대를 이루면서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복된 일이었다.


주말에 딸과 둘만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딸의 친구 가족들과 만났다면, 나도 보다 편한 주말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딱한 사정에 처한 우리 가족을 가엾게 여기는 친구들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하면, 친구들과 지인들이 무리해서라도 시간을 내줄 것 같다는 부담스러운 마음도 들어, 되도록 만남을 지양했다. 딸이 자기 엄마와 함께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해서, 2주에 한 번씩 23시간짜리 외출을 나오는 아내의 일정에 맞춰서 우리를 만나러 오겠다는 지인들을 초대했다. 아내가 짧디짧은 외출을 나올 때면 딸의 기분은 최고조가 되었고, 딸과 오랜만에 시간을 보내는 아내는 조심스레 몸을 움직이며 조우를 만끽했다. 23시간짜리 외출이다 보니 나와서 한 끼 식사하고 아내와 딸이 한방에서 같이 자고 나서 아침을 먹으면 어느새 또 헤어질 준비를 해야 했다.


다시 보름 간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면, 집안의 공기는 무겁게 쳐졌다. 다음 주에 M재활병원에 치과 핑계로 3시간 정도 짧은 외출을 나오면 그때 아이스크림이라도 같이 먹자고 서로 아쉬움을 달래고, 2주도 금방 지나갈 거라고 각자 위안을 해보기도 했다. 병원이 집에서 가깝다 보니, 운전해서 가는 길에 서로 인사도 겨우 나누고 헤어지게 되는 짧은 드라이브가 아쉬웠다. 그리고 마지막에 항상 아내와 딸이 잘 지내라는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차라리 딸이 울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씩씩하게 ‘안녕~’이라고 인사하고 시야에서 아내가 사라지면 별말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은 항상 안타까웠다. 항상 무던하다고 생각했던 그런 딸도 아내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이라는 것을 했다.


“체육대회 때 오면 안 돼?”


5월 중순 경 유치원에서 개최하는 체육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공휴일에 우리 집에서 너무도 먼 곳에서 열리는 탓에 아내의 소중한 외박 시간을 갉아먹을 것 같아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서 불참하고 싶었는데 딸은 기필코 가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처럼 엄마, 아빠가 모두 다 오길 원했다.


하필이면 아내가 없는 5월에는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유치원 가족 행사가 많았다. 연중 가장 큰 행사인 5월 초의 봄 소풍도 그중 하나였다. 소풍도 소풍이지만 아이들의 화두는 부모님이 싸주는 도시락이었다. 매년 도시락을 싸주던 아내가 병원에 있어서 딸이 괜히 기가 죽을까 하는 걱정에 엄마와 나는 며칠 전부터 고민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멋들어진 도시락을 싸줘서 엄마가 없다는 티가 나지 않게 해주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된 당찬 포부가 담겨 있었다. 우리 둘은 아침 일찍 일어나 딸의 도시락에 포켓볼 모양의 샌드위치, 꽃 모양의 김밥, 달걀말이 초밥, 그리고 과일까지 알차게 담아서 보냈다. 도시락의 본질은 맛있고 든든한 식사일 테지만, 오늘의 도시락은 엄마와 나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안 그래도 아내가 없어서 걱정되었던 딸이 어딜 내놓더라도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기대를 가득 안고 퇴근한 나는 저녁에 소풍을 다녀온 딸에게 의기양양하게 물어봤다.


“소풍 잘 다녀왔어? 밥은 맛있었어?”

“응! 그런데 달걀말이 초밥은 조금 남겼어….”


내가 오랜만에 요리에 도전했더니 달걀 간이 엉망이었다. 딸은 다른 음식은 다 잘 먹고,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달걀말이 초밥만 남겨왔다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다시 TV에 집중했다. 실망감을 안은 채 돌아봤더니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약간은 침울한 표정으로 냉장고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트 모양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알고 봤더니, 유치원에서 도시락을 싸준 사람에게 감사 편지를 쓰게 했다.


“할머니, 아빠! 맛있는 도시락 싸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엄마에게 감사할 때, 딸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과 다른 내용을 써야 하는 게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이의 속마음은 도통 알 수 없지만 가슴이 미어지는 안쓰러움을 몰래 숨겼던 저녁 시간이 겨우 지나갔다.


이 이야기를 내게 전해 들은 아내는 무리해서라도 외박 일정을 딸의 체육대회 일정에 맞추어 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유치원 체육대회에 참가하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았다. 아직 복시 증상이 있어 한쪽 눈에 안대를 낀 아내는 많은 사람들의 질문이 따라올 게 뻔한 모습으로 오랜만에 유치원 행사에 참여했다. 아내는 몸이 아직은 불편하고 사람 많은 곳에서 움직이는 게 불안했겠지만 우리는 정말 오랜만에 남들 앞에서 한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아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딸과 나의 생일이 함께 있는 6월이 되기 전에는 재활병원에서 꼭 퇴원해서 우리와 함께하겠다고 결심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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