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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Nov 21. 2024

19-1. 복귀

아내의 재활은 생각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딸과 함께 아내의 병실 면회를 한 이후에 간호사들이 무슨 보약을 먹었길래 이렇게 금방 좋아질 수 있는 것인지 물어볼 정도로 아내는 가파른 회복세를 보였다. 장모님과 함께 있으면서 딸까지 실제로 만난 것이 분명 아내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딸과 내가 다녀가고 나서 아내는 며칠 만에 힘겹게 목을 가누었고, 유동식을 식도로 넘겨주던 불편한 콧줄도 금방 제거할 수 있었다. 일주일 정도 지나고 나니 힘겹게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었고, 음성이나 이모티콘 수준의 카카오톡까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불과 발병 한 달 만에 이만큼이나 회복됐다고 생각하면 아내가 중환자실에서 힘들어했던 날들이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아내가 부쩍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딸과 나는 일주일 만에 다시 아내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장모님은 장기전이 될 재활 과정을 준비하기 위해 정비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내게 반나절 정도의 보호자 교대를 요청했다. 마침, 부산에서 올라온 아빠가 엄마와 함께 딸을 데리고 문화센터에 다녀와 병원으로 같이 오기로 했고, 나는 아침 일찍 아내의 보호자 구실을 하러 병원으로 향했다. 9시경에 병원에 도착한 나는 재활 치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는 장모님과 만나서 보호자 목걸이 명찰을 건네받았다. 장모님은 집에서 챙길 각종 짐들과 병원에서 타야 하는 약들을 챙기러 떠나면서 아내가 치료받는 곳을 조용히 알려줬다.


명찰을 목에 메고 벤치에 잠시 앉아 있다가 조금 전 장모님이 알려준 재활 치료실의 안을 빼꼼히 들여다봤다.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뉘어져 있는 병상 위에 누워서 겨우 몸을 곧추세우던 사람이 지금은 각종 기계와 물리치료사들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주중에 장모님에게 아내의 재활이 순조롭게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긴 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한 모습은 고무적이었다. 물론, 운동 치료를 마무리한 아내는 옆방에서 작업 치료를 하기 위해 아직 나의 부축에 의존해야 이동할 수 있는 수준이 그치지 않았다. 힘겨운 첫발은 내디뎠지만,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


작업 치료까지 마친 아내를 휠체어에 태워서 병실로 올라갔다. 아내를 휠체어에 앉혀서 밀고 가는 것은 마냥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적응하고 싶지도 않고, 익숙해지기 전에 얼른 일어날 수 있을 거라 믿고 싶었다. 굳었던 얼굴 근육도 대부분 풀린 아내와 잠시 쉬면서 병원에서의 생활에 관해서도 물어보고 걱정하고 있었던 친구들에게 영상 통화를 걸면서 생존 신고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딸이 엄마, 아빠와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고 했다는 연락이 와서 아내를 다시 휠체어에 싣고 병원 1층으로 향했다.


아내와 병원 밖의 식당을 가는 게 부담스럽다고 판단한 우리는 아내가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을 때 내가 지겹도록 먹었던 병원의 푸드코트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평소 같으면 아내에게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고 했을 아빠인데, 오늘은 컨디션이 괜찮냐는 정도의 가벼운 질문만 했다. 그래도 엄숙한 분위기이기보다는 조금은 안심한 듯한 부드러운 말투였다. 한쪽 눈에 안대를 끼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며느리의 모습을 보는 것이 유쾌할 리 없겠지만, 발병 후에 한참 동안 아내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고, 엄마와 내가 전하는 이야기에 의존하여 아내의 상태를 지레짐작 정도만 하고 있었던 아빠는 어느 정도는 안심한 눈치였다. 상상이 상상을 낳다 보니 아빠의 머릿속 아내의 모습은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는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그간의 걱정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식구는 고대하던 가족 식사를 하게 되었다. 금세 휠체어 조작법을 익힌 딸은 아내의 휠체어를 장난감 수레를 밀 듯 쉽게 밀며 즐거워했다. 딸은 아내를 식탁의 끝에 놔줬고, 그렇게 우리의 점심 식사는 시작되었다. 맵거나 과하게 딱딱한 것만 아니면 웬만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아내는 우리와 함께 푸드코트의 다양한 음식들을 나눠 먹었다. 한쪽 눈에 안대를 끼고 미세하고 떨리는 손으로 젓가락질하는 아내나, 오랜만에 아내랑 겸상해서 신났지만, 결국 오늘 다시 생이별해야 하는 딸이 불쌍했는지 엄마는 계속 그들이 먹기 편하도록 음식을 밀어주고 잘라주었다. 이런 엄마의 보살핌은 이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엄마는 아내가 입원한 이후에 두 달간 부산에 내려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딸과 나를 돌보는 운명에 처했다. 내가 출근한 사이에 유치원에서 하원하는 딸을 돌봐줄 사람이 엄마 이외에는 아무도 없어서 대안도 딱히 없었다. 아빠도 덕분에 엄마와 두 달간 꼼짝없이 떨어져서 혼자 생활하게 되었다. 엄마는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라 낮에는 회사에 밤에는 가족과 딸에 혼자 메이는 나를 매우 안타까워했으나, 특히 아내가 보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딸을 가엾게 여겼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 우리가 덜 불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줬고, 딸의 하원 후의 일정 지원과 우리의 저녁 식사를 책임지고 준비했다.


나는 엄마와 아빠에게 불평과 불만은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반대로 고맙거나 미안한 마음을 전달하는 데는 매우 서툴다. 실제로는 고마운 마음이 가득하지만, 속마음과는 다르게 괜히 툴툴대곤 하는데, 경상도 사람들이라 그런지 모르겠으나 우리 가족은 예전부터 서로 간에 따듯한 말을 하는 것을 낯간지럽다고 여기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분명 엄마가 도와주지 않으면 대안이 없다고 하긴 했지만, 엄마가 함께하기 힘들다고 했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기꺼이 우리 집의 살림꾼 역할을 자처했기에 한없이 고마웠다.


한 번씩 환갑이 넘은 엄마의 체력이 걱정되어 내가 에둘러 피곤하지 않냐고 물어보면 거짓말은 못 하고, 아내가 나을 수 있다면 뭘 못 하겠냐고만 대답했다. 엄마의 마음도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실제로 엄마 세대는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조상들이 노해서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라 생각하고 어떤 형태로든 정성을 쏟아부으면 하늘이 알아주고 도와줄 거라고 믿는다. 어렸을 때 옳다고 믿고 교육받는 것이 이렇게도 한 사람의 일생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무섭기도 하면서 기이했다. 당장 나만 해도 제사는 고리타분한 관습이라고 여겨져서 훗날에 부모님 제사를 지낼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에게 정성을 쏟겠다는 장난 섞인 말을 하고 다니는데, 이런 말을 하면서도 나중에 딸과 우리 세대 간에 어떤 간극이 벌어질지 모르겠으나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굳은 각오를 하게 된다.


우리 엄마만 그런 줄 알았는데 장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장모님은 아내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부터, 간병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본인이 병원에 들어가겠다고 누가 묻기도 전에 자원했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거동이 거의 불가능한 환자의 간병을 한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라고 내 멋대로 판단했기에 되도록 간병인을 쓰자고 부탁했는데도 장모님은 완강히 거부했다. 내게 그렇게 얘기한 적은 없지만 아내가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사돈인 엄마가 하루도 빠짐없이 딸과 나를 챙길 때 집에만 있어서 미안했던 것 같은데, 그 죄책감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았다. 나도 아내가 그렇게 되고 나서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게 원망스럽거나 이해가 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딸이 그렇게 됐다고 하면 나도 제정신으로 살기 힘들었을 거라 생각하니 오히려 그들을 어떻게든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만 커졌다.


물론 장모님은 무엇보다도 아내의 원활한 재활을 돕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을 것이다. 아무리 성실한 간병인을 쓰더라도 가족만큼 세밀하게 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을 내심 불안해했다. 장모님은 병원에서 아내와 숙식을 함께하면서 다 큰 딸의 기저귀도 갈아주고, 일과시간의 재활 치료 이후도 코치 역할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아내가 100%까지 복구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아내가 G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딱 한 달이 지났을 때, M재활병원으로 옮기고, 거기에서 또 간호·간병 통합 병동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장모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내의 곁을 지켰다. M재활병원으로 옮길 때는 아내의 상태가 많이 회복된 상태라 완전한 회복으로 판단받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자세나 움직임 정도만 제외하면 충분히 혼자서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간병인 또는 가족 보호자가 항상 상주해야 한다는 재활병원의 요구에, 나와 아내는 장모님이 이제 쉴 수 있도록 돈을 내고 간병인을 고용하려고 했으나, 장모님은 끝까지 본인이 아내와 함께하겠다고 선언했다. 환자의 재활 수준이 발병 이후 6개월까지 사실상 결정된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장모님의 이런 정성 때문인지 아내는 결국 거의 아프기 전의 상태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G병원 담당의의 전담 간호사가 가족이 이렇게 아프더라도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와 아내의 엄마들은 어떤 이들은 모른 척하기도 하는 보호자의 보호자가 기꺼이 되어주기로 했다. 과연 우리는 이 은혜의 절반이라도 갚을 수 있을까. 우리가 애써 보은하고자 하더라도 엄마들은 끊임없이 베풀기 때문에 영영 갚지 못할 것이다. 유일하게 감사함이 감사함으로 끝나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엄마다. 본인들의 몸도 성치 않은 그들의 노력 덕에 아내도 딸도 나도 점차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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