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 은정이네 집에 놀러 갔다.
우리 집과 전혀 반대 방향이었다.
둘이 방바닥에 배를 깔고 숙제를 대충 끝내고 은정이가 갖고 있는 「베르사유의 장미」를 읽다 보니 거의 5시가 돼버렸다.
"엄마한테 전화하는 거 까먹었네.. 혼나겠다."
은정이가 전화기를 가져와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내가 늦은 사실을 그때야 알고,
"조심해서 돌아와."라고 했다.
학교 들어와 처음으로 놀러 간 친구네 집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재래시장을 통과해야만 했다.
반찬, 음식들, 요리 재료들, 희한한 물건들, 바쁜 아줌마 아저씨들로 점점 붐비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났다. 달콤하면서도 깨를 볶는 듯 한 냄새가 따뜻한 기운을 감싸며 시장 골목을 타고 흘러 나왔다.
" 이 연!"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완식이가 어떤 가게에 서 있다.
완식이가 서 있는 곳은 '고운 참기름'이라 쓰여 있는 가게였다.
" 엄마랑 장 보러 온 거야?' 하고 완식이가 묻길래 대충 얼버무려 답했다. 학교 끝나면 빨리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친구네 집에 놀러 간 것이니까.
" 너는?'
" 여기, 우리 가게."
예쁜 연녹색 병에 호박빛을 머금은 갈색 참기름, 진한색의 병에 들기름, 막 볶은 참깨라고 쓰인 병이 나란히 줄을 맞춰 진열되 있었다.
" 엄마랑 우리 가게 다음에 꼭 와." 라며 완식이는 참깨 강정을 하나 내게 주었다.
" 앗, 고마워. 내일 학교에서 봐." 하고 빨리 그곳을 나왔다.
아직 온기가 남은 강정을 입에 넣고 집 쪽으로 향했다.
가을의 끝 물, 겨울을 맞는 저녁 노을은 금방 사라지고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 다녀왔습니다."
엄마가 방문을 조용히 닫으며 내게 손짓으로 손 닦으라 하셨다. 그리고 아빠에게 전화로 중요한 이야기를 하였다.
" 그럼! 아기였을 때 접종 다 했지. 그렇다고 안 걸리는 것 아니라고 의사가 그래. 당신은? 응.. 그래. 암튼 연이랑 떨어뜨려 놔야... 그런데, 그게 가능해?" 하며 전화를 끊었다.
엄마가 " 연아, 당분간 범이 옆에서 놀지 마. 범이 아프니까." 라며 말했다.
" 왜? 많이 아파?" 하고 물었다.
" 응... 그게. 범이랑 너 둘 다 아기였을 대 예방 접종을 다 했는데, '수두'라는 병에 범이가 걸렸데. 의사 선생님이 어린아이 들은 금방 서로 옮는다고 그래. 그러니까 오늘부터 범이랑 붙어 있지 마. 알았지?"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가 저녁 식사 준비를 하시는 걸 도왔다.
아빠는 퇴근하자 범이한테 먼저 갔다. 마스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시더니, " 연이 들어오지 마. 알았지?" 하셨다.
아빠는 내게 " 연아, 수두에 걸리면 독감처럼 열이 높게 오르고 물집(수포)이 터뜨려지면 흉터로 남아. 그러니까 범이 나을 때까지 같이 노는 거 당분간만 참어, 응?"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이라고 할머니가 그랬다.
저녁을 먹고 아빠는 TV를, 엄마는 설거지를, 할머니는 벌써 주무신다.
범이는 계속 누워 있는 거 같았다. 방에 몰래 들어가 보니 범이 이불 주위에 장난감이랑 주스병, 체온계, 수건들이 놓여 있었다. 범이는 괴로운 듯이 쎅쎅거리고 자고 있었다.
몰래 방에서 나오려는데 범이 좋아하는 레인저 인형이 침대 아래 떨어져 있어 그걸 범이 손에 쥐어 주고 방에서 나왔다.
다음날 아침에도 다들 바쁜 시간에 잠깐 범이를 보니 얼굴에 빨간 점이 드문드문 보인다.
" 누나 학교 다녀올게."
엄마가 들어올 것 같아 빨리 방에서 나왔다.
학교에 가서 은정이에게 남동생이 아파서 당분간 놀러 가기 어렵다고 말했더니 은정이가 서운해 하였다. 은정이는 아빠가 은정이 아기였을 때 돌아가셨고 지금 중학생 오빠, 그리고 일하시는 엄마, 이렇게 셋이 산다. 은정이도 이웃에 자기 또래 친구가 없어 항상 혼자 놀고, 밥 먹고, 자는 때가 많다고 전에 그랬다.
"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오스칼이 드레스 입고 궁전의 가면 파티에 가잖아?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왜 오스칼을 안 잘라?"
" 아마 국왕이 왕비가 다른 남자랑 좋아하는 거 알면 왕비가 자신이 위험하잖아. 오스칼이 다 알지만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고 그런 거 아닐까?"
" 흐응... 그렇구나. 다음 편 또 보고 싶다."
" 나도. "
완석이가 , " 왕비가 목걸이를 도난당해. 그런데 오스칼이 안드레랑 같이 왕비를 도와. 로잘리가 오스칼한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래서"
" 야! 그걸 다 말하면 어떡해!"라고 원망스러운 얼굴로 은정이가 말했다.
완석이는 " 할 수 없잖아. 누나가 전권 다 갖고 있어 나도 다 읽었다."라고 했다.
" 뭐시라? 전부??"
" 응, 연이 빌려줄까? 누나 다 읽어서."
수업시간 종이 울려 후다닥 자리에 돌아갔다.
오스칼은 안드레를 사랑하면서도 그 느낌을 숨겨야만 하다니... 안타깝다.
방과 후 집에 곧장 돌아가 숙제하고 문제집 하고 쉬지 않고 일했다(?).
저녁때까지 시간이 남아 혼자 TV를 보다가 범이가 좋아하는 방송 시간이었다. 항상 내가 보고 싶은 만화랑 시간대가 겹쳐 짜증 났는데 오늘은 내 맘대로 혼자 볼 수 있다니!
방송이 끝나고 뉴스 시간이 되자 또 심심해졌다.
냉장고에 있는 젤리를 하나 들고 엄마 몰래 범이한테 갔다.
" 범아 자?"
" 누나야?"
누워 있는데 눈은 뜨고 있었다.
" 이거 먹어." 하고 젤리를 건네주었다. 범이가 좋아하는 오렌지 맛인데 범이가 한입 먹더니 쓰다고 했다.
" 누나, 등이 가려워."
나는 범이 등을 긁어 주었다. 그랬더니 뭔가 톡 하는 터지는 감촉이 느껴지더니 범이 옷이 젖었다.
" 어?"
순간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는 방에 들어와 범이의 열을 체온계로 확인 후, 범이 입은 파자마 상의를 벗겼다.
아....
범이 등에는 물집들이 퍼져 있고 내가 긁어 준 듯 한 곳이 핑크 색이 돼 피부가 일그러져 있었다.
엄만 깨끗한 거어즈로 닦아낸 후 바셀린을 발라 주었다. 깨끗한 파자마로 범이를 갈아입히면서,
" 이제 괜찮다."
엄마가 모든 것들을 정리하면서 나를 보며 말했다
" 연아. 엄마가 뭐랬었지?"
난 하지 말라는 것을 해버리고 말았다.
" 잘못했어요."
" 잘못을 알면 다행인데, 아마도 다음 주엔 네가 학교 결석하게 될지도 몰라. 주말이 껴서..."
내가 왜 결석을 해야 하지?
엄마 예상대로 금요일 방과 후 나는 열이 나기 시작했다.
열이 38도였다.
" 내가 뭐랬니..."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나는 '수두'에 걸리고 말았다.
'아... 베르사유의 장미... 보고 싶다.
오스칼과 안드레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장면이 보고 싶다. '
학교에 가고 싶다.
일주일을 결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