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의 정원
챕터 11. 다락방에서 들리던 목소리의 비밀
침대에 걸터앉아 남자가 연주하는 피아노의 선율을 듣는다. 긴 머리를 한쪽으로 늘어트린 이브의 눈이 남자가 있는 방향으로 정면을 바라보다 아래로 살짝 내리며, 할 말이 있는 듯,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숨을 살짝 들이마시지만 이내 눈을 감으며 포기한 듯하다.
이브의 검은 드레스가 잠시나마 자주색 드레스로 비친다. 떠나기 싫은 듯 어울리지 않게 시간을 끌던 이브는 이내 침대에서 일어나 남자가 자신의 목을 졸랐던 거울 앞에서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남자의 뒷모습을 흘긋 바라본다. 순간 드레스가 짙은 초록색으로 비친다. 그리곤 남자가 연주하는 선율에 따라 맞춰 걷기 시작한다.
점점 빠르게. 또 아주 빠르게.
잉크는 퍼져, 소리에 담겨.
어딘가의 서재에 까지 울려 퍼진다.
울려 퍼지는 잉크를 듣고 있자니 내가 듣는 것이 소리인지 잉크인지 구분이 안 가는 번역가였다.
크리스틴은 자신이 번역가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자신이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다는 것은 항상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크리스틴이었다. 가령 크리스틴은 어느 날 들었던 휴대전화의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이라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던 때를 생각해내곤 했다.
-휴대전화에 있는 기능이니까 사람한테도 있는 기능일 거야. 소리를 저장해 두는 기관이 무얼까?
고장 난 테이프처럼 같은 소리가 신탁이 신전에 적히던 때부터 지금까지 돌아간다. 소리를 글로 적어 두던 이도 있었다, 그 글로 적힌 악보를 보고 다시 소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책을 다 쓰고 나면 글에 있는 선율을 악보로 받아 적을 수도 있겠구나. 글은 내 안에서 나오고 안에서 나온 글을 악보로 적으면 그건 생체 리듬인가, 아닌가. 알맞은 단어를 고민해 보는 여자다.
우리들 사이에 시간이, 틈이 조금 있구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신체 기관이 있다면 그게 무얼지 생각해 본다. 일단 글을 써 번역가에게 맡기면 여러 언어로 읽어볼 수 있겠지. 그렇다면 그 수많은 글들 속에서 비어져 있는 부분이 너구나. 거기 있었구나.
알 수 있겠다. 이제 거의 다 왔다. 기뻐.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여자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도 해본다.
수직도시에서 책을 한 권 훔쳐 달아난 회색인형이었다.
-회색인형이 훔쳐간 번역가의 이전 기록들의 책(크리스틴의 일상, 오블리비아테 사전. 어느 대학의 출판사에서 발행. 옮긴이: C.E)
수직 도시에서는 없어진 책으로 인해 책장들의 책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진 책들은 각 도시에 제각각의 책장에 자리를 잡았다.
큰일이다.
여자가 대학의 존재를 눈치챘다.
큰일이다.
대학의 책들이 사라져 간다.
큰일이다.
읽을 책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