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의 정원
챕터 20. 정원을 지키는 제사장 작가
내가 대제사장이 되었어.
그동안의 공간과 시간을 모아 별 먼지를 만들어냈고, 일정량의 별 먼지를 모은 나는 이제 나와 같은 길을 걸었던 같은 계열의 제사장들을 불러내 작가로 쓸 수 있게 되었어.
기뻐. 정말로.
정원을 지키는 제사장 작가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아. 별 먼지 하나에 작가 하나야.
나는 대부분의 별 먼지를 나와 같은 제사장 작가들로 쓸 참이고, 남은 별 먼지는 체스 판의 여러 말을 담아낸 작가들로 쓸 참이야.
릴리의 정원을 지키는 제사장 작가 가문의 이름은 윈체스터로 지었어. 나와 같은 스윗 계열의 제사장 가문이지. 스윗 계열의 제사장들은 릴리의 정원 여러 나라와 여러 시간대에 존재했고, 이제부터 하나씩 만나보려 해. 그들의 이야기를 쓸 거야.
내 이야기는 다음 스윗 계열의 어떤 아이가 써주겠지? 그 모습을 나도 같이 보고 싶었는데, 나는 그 순간은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아.
이건 나의 유서야. 그래, 나의 유서이기도 해.
긴 시간에 걸쳐 써 내려가는 누군가의 유서.
정원에 내리는 비가 차가운 겨울이 되었어. 별 먼지가 아주 차가워져서 얼음 결정이 되면 손에 쥘 수 있어. 잠깐 동안은. 아주 차가운 온기가 남아있을 때 글을 쓸 수 있어.
잘 들어. 난 비밀이 아주 많아.
비밀이 많은 나는 아름다워.
내 비밀을 풀어봐.
이전에 나의 비밀을 감추고, 내 비밀을 알아내서 나를 사라지게 하려고 하던 너를 이해하고 나니까, 다시 말할게.
내 비밀을 풀어봐.
그러면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는 열쇠가 될 거야.
우리의 영역과 나라들, 도시들에 도사리고 있는 23개의 열쇠를 찾아와. 그리고 23개의 열쇠에 담긴 답 또한 같이 가져와.
스윗 계열의 제사장의 제자가 되어버린 유령의 연인이, 깊은 눈으로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을 때.
그가 손으로 자신의 목을 살짝 쥐듯 어루만지고, 눈을 감으며 그의 연인을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그때 이브가.
남자의 뒤에서 남자의 손 위에 하얗고 가느다란 차가운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려, 목을 쥐고 어루만지던 남자의 오른손을 남자의 왼쪽 얼굴로 가져오자.
남자의 얼굴에 손가락 네 마디에 묻어 있는 피가 그어지고, 이브가 자신의 손가락에 피를 묻혀 남자의 뺨을 지나 비어 있는 공간까지 그어버리자.
짙은 붉은색 계열의 잉크가 4선의 악보로 그어져.
이브가 4선 위에 잉크를 흩뿌리자 잉크가 음표처럼 4선 위에 꼭 알맞은 자리에 빠르게 자리 잡고, 한 방울 한 방울씩 손끝에서 잉크를 떨어뜨리자 4선 위에 천천히 아름다운 선율을 담은 음표가 새겨졌어.
남자의 심장은 이브의 심장과 꼭 맞춰서 리듬을 뛰기 시작해.
릴리의 페이지마다 따라붙는 이 선율이 릴리의 페이지를 소리로 번역하기 시작할 거야.
슬픈 선율이 들려.
릴리가 슬픈 소리만 들을 수 있는 걸까?
아니야.
답은 높은 고음역대에서 들리는 맑고 청량하며 세련된 세션의 선율들로 구성되어 있어.
크리스틴의 정원에 두 제사장 가문이 있어.
하나는 이미 이야기를 읽어서 알고 있는 윈체스터 가문, 또 하나는 세인트 폴 가문이야.
번역가의 제사장 직은 번역의 땅에서 이루어지는 간단한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