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기독교로부터
오늘 C.S. 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을 읽었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목차들을 위로 살펴보았는데, 오.. 굉장히 탁월한 비유로 풀어나가는 필자의 변증이 아주 흥미롭게 다가왔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대중적이고 친근한 경험으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내용이 적혀있었다. 아무리 간단하더라도, 절대법칙이 단순해서 수많은 분야에 응용이 가능한 것처럼, 책의 비유도 그러했다. 그래서, 살면서 겪은 경험에 비유를 대입해 보는 생각놀이를 많이 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저자는 자신이 특정 교단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마루와 방의 비유로 표현한다. 여러 방이 있는 한옥 같은 집을 그리스도인이 되는 곳이라고 표현하면서 말이다. 저자는 여러 개의 방을 들어갈 수 있는 문 앞인 현관 마루에 비그리스도인들을 데려오는 역할만 하겠다고 말한다. 감리교, 장로교 등등 여러 개의 문을 들어가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고, 사실 중요한 것은 비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아주 교묘하고 논리적으로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해할뿐더러, 하나님의 일에 아무 유익도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유튜브 같은데서는 첨예한 논리로 교리를 설명하면서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은 것 같다. 어제저녁에 유튜브로 어떤 사람이 대형교회 목사님을 비난하고, 구원을 받는 방식이 정교해서 누구나 받을 수 없게끔 어려운 것처럼 되어있다고 말하고, 성경을 이용해서 자신이 옳은 것처럼 설명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겉으로는 분별하기 어렵지만, 사실 알고 보면 예수님의 뜻이 아닌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남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라, 네 눈의 들보를 보고 형제의 티를 지적하지 마라, 모든 사람을 위해 간구로 기도해라”
그렇기에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한 적이 있나요? 아니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에 급급했나요?”
그다음으로는 글의 주제인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실까?”라는 질문에 관한 이야기이다. 답은 간단하다. 무신론이 있기에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 번 가정을 해보자. 이 세상에 어둠만 있고, 모두가 장님이라면, 어느 누구가 빛의 존재에 대해서 있다 없다 하겠는가. 애초에 빛이 없는 세계에서는 ‘빛’의 의미조차 모를 수밖에 없다. 비슷한 예시로, 나이키라는 브랜드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에 대한 여부를 밝힌다고 쳐보자. 과연 나이키라는 브랜드가 존재하기 전에 사람들이 존재여부를 이야기할까? 절대 그럴 수 없다. 그 당시에 존재하는 잡다한 브랜드의 이름을 알아도 ‘나이키’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 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것이 있다 없다 존재여부를 밝히는 노력이 있는 것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즉,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이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라는 것이다. 사실, 이 비유에 있어서,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많은 허점이 느껴져 물고 늘어지고 싶을 수도 있다. 인간은 원래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으면 온갖 변명으로 틀림을 증명하려고 발버둥 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무신론에 대한 저자의 비유는 독자로 하여금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하는 것을 남겨준다. 즉, 생각의 재료를 제공해 준다.
그다음으로, 저자는 사랑에 관해 말한다. 첫 번째 사랑과 두 번째 사랑이 있는데, 첫 번째 사랑은 감정으로서의 사랑을 뜻한다. 그래서, 처음에 사랑의 엔진에 시동을 킬 때의 감정이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 사랑은 엔진을 오랫동안 잠잠히 유지하는 사랑을 말한다. 사실, 첫 번째의 감정으로서의 사랑은 처음에만 흥분되지 빨리 식는다. 그 식은 사랑이 그 사람과의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한다는 단초라 여기는 순간 이혼과 결별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때 우리는 두 번째 사랑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사랑은 감정이 다 사그라들고 남은 ‘연합’으로서의 사랑이다.
관계의 연합으로서 사랑이란 흥분이 없지만, 상대방과 하나라는 인식을 갖고 책임감 있게 연결되고자 애쓰는 사랑이다. 사실,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흥분되는 감정 없이도,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기독교는 그런 의미에서 사회에 반대되는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감정 이후의 건강한 연합의 사랑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젊은 사람들이 감정으로서의 인스턴트의 사랑만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니, 무르익는 포도주의 사랑의 맛을 못 느낄 수밖에.
나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느껴본 적은 없지만,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는 이미 맛보았다고 확신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 사랑해요!! 를 매 순간 외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 된 관계 속에서 안정감과 여유로움, 자유함과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감정이 주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굳건한 관계의 연합 속에서 오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망이나 생명이나 높고 깊음이나 하늘의 권세자도 끊을 수 없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 볼 주제가 바로 ‘이웃사랑’인데, 당신은 이웃을 얼마나 사랑한다고 생각하는가? 저자는 이웃사랑이 결코 이웃을 호감 가는 존재로 억지스럽게 여기라는 말이 아님을 역설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웃사랑은 호감의 영역이 아니라, 나도 똑같은 죄인임을 깨닫고 내가 잘되길 바라듯, 이웃도 잘되기를 바라는 사랑이다. 그렇기에, 원수가 저지른 죄는 미워하되, 그 죄인인 원수 자체는 긍휼한 마음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사실, 나조차도 사랑할 부분이 하나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데, 그저 죄인인데, 하나님이 그런 나를 사랑해 주셨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이다. 그래서, 호감 가는 부분이 있어서, 뭔가를 성취해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자아로서의 존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이 있기에,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진 것이다. 그런 사랑이 나를 변화시키고, 내가 정말 죄인임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진정으로 진심으로 원수의 앞날을 응원해 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죄인이 저지른 죄는 미워하는 게 사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