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ry, not sorry
개구리는 따뜻한 물에 담갔다가 서서히 뜨겁게 하면 자기가 익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죽어간다고 한다. 뉴스에선 최근 벌어진 학교 폭력 사건에 관한 보도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이미 흔해져 버린 소재라 사람들의 별 관심을 끌진 못할 것이다. 속에서 무언가 올라올 것만 같다. 게다가 오늘은 심장 부분과 명치 그쪽까지 조여오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나를 발견한 동생은 황급하게 채널을 돌려버렸다. 돌린 채널에선 최근 흥행에 성공한 영화의 표절 의혹에 대한 방송을 하고 있었다. 자신과 오랜 기간 동고동락했던 조감독이자 대학 후배의 시놉시스를 베꼈다는 그런 이야기였는데, 동생은 작정하고 아예 화제를 돌려버리려는 듯 오히려 과장되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말이 돼? 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창작물에 대한 기본 예의도 없다는 게.“
”저 판이 원래 다 그래.“
”그래 그럴 수 있다 쳐. 그래도 세상에 어떻게 자기 후배 걸 베낄 수 있어?“
슬프지만 나도 그저 그런 개구리가 되어버린 걸까. 아니면 원래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화가 나지 않는 것일까. 졸업 후, 이 바닥에서 드라마를 쓰겠다고 버틴 지 거의 10년째이다. 그 시간 동안 저런 사건들, 혹은 저보다 더한 일들을 수없이 듣고 접했었다. 그래도 후배 걸 베낀 건 좀 파렴치하긴 싶긴 했다. 동생을 피해 방에 들어오니 그제 서야 조용해졌다. 그런데 아직 손이 떨리는 걸 보니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내게 유일한 안정이 되어줄 책, ‘BLUE’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미 수백 번도 넘게 읽어 내용도 대사도 다 외워버린 낡은 책이었지만, 계속 읽게 되는 건 이 책은 나만의 애착 인형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스무 살 때쯤에 인터넷에서 연재되었던 이 소설은 암암리에 인기가 생겨 실물 책으로까지 출간이 됐었다. 어딘가 연극적인 성격의 남자주인공, 괴기스러운 박물관 같은 그의 집, 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된 여자 주인공은 그를 구하기 이해 불구덩이로 뛰어든다. 처음 읽었을 때, 모든 글자들이 영상으로 그려지는 듯한 느낌에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예술 작품이 위로를 준다는 말이 우스갯소리처럼 들렸는데, 경험을 해보니 근거가 있는 소리였다.
나는 ‘BLUE’ 에 완전히 매료되었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작품을 써낸 ‘BLUE’ 의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해졌다.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따뜻한 영혼의 소유자이겠지. 그러나 작가의 정체는 철저하게 베일에 감춰져 있었다. 글이 연재되는 동안 이 작가의 소문만 무성했을 뿐이었다. 천재들만 갈 수 있다는 ‘K예대’ 출신이라는 이야기만 그나마 근거 있는 가십이었다. 후속작을 연재하다 홀연히 사라져버린 이 작가를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
생각보다 칭찬의 힘은 강력한 것 같다. 자신을 향했던 나쁜 말들이 기억 속에 오래 남는 것처럼, 칭찬 역시 생각보다 사람의 기억 속에 깊게 박힌다. 내가 드라마 작가를 꿈꾸게 된 것도, 대학생 때 연극 동아리에서 한 선배가 재능이 있다고 칭찬해 준 데서 시작됐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망해가던 동아리 탈퇴를 막기 위한 떡밥이었던 것만 같다. 난 거기에 낚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글을 쓴지 거의 7년이란 시간 동안 이렇게 아무런 성과가 없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내가 강사 교체주기가 빠른 대치동 논술학원에서 몇 년간 강의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애들을 몇 번 보면 감이 잡힌다. 저 애가 붙을 애인지 떨어질 애인지. 그러나 나는 모든 친구들에게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다. ‘너 재능이 있구나!’
애들에겐 혹시라도 있을 희망의 끈을 잡아주는 것이고, 나 역시 학원생 유치를 계속할 수 있으니 이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그런 윈-윈게임이라 생각하면서. 몇백 대 일의 논술 시험에서 붙으려면 운이 좋거나, 재능이 타고 나는 수밖에 없다. 비단 논술 시험뿐 만이 아니라, 내가 몇 년째 다니는 ’작가 교육원‘에서 드라마 작가로 입봉한 사람들도 저 둘 중의 하나였다. 남들과 비슷한 수준의 글임에도 혼자 생뚱맞게 공모전에 당선이 되거나, 글을 쓴지 세 달도 안 된 사람이 최고의 이야기를 뽑아낼 때. 물론 안타깝게도 나에겐 끝장나는 행운도 실력도 없었다.
"쌤, 저 다 썼으니까 집에 가도 되죠?"
S대 모의 시험지를 준 지 한 시간 만에 답안을 작성하고, 두 시간을 내리 자던 세원은 강의실을 빠져 나가버렸다. 세원이 제출한 답안지를 슬쩍 훑어보았다. 보나 마나 완벽한 답안일 것이다. 고3 9월 모의고사가 끝나고서야, 학원을 찾아온 세원은 정말 깜짝 놀랄 만큼 논술을 잘 썼다. 성적이 안 되어서 논술을 시작했다던 세원은 아마 운까지 좋았던 모양이다. 올해부터 몇몇 상위권 대학들이 내신 반영을 줄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년 겨울방학 선행반부터 다니던 미주는…
”쌤... 도저히 못쓰겠어요.“
원고지를 겨우 반쯤 채운 수준이었다. 나는 그런 미주에게 해줄 별다른 말이 없었다.
”S대가 원래 논술이 많이 어려워. 그래도 계속 쓰다보면 펜이 손에 확 붙는 그런 느낌이 찾아올 거야. 쌤 믿지?“
”믿기 싫어도 믿어야죠. 전 정말 논술 전형이 아니면 답이 없거든요.“
”할 수 있어. 근데 미주야, 쌤이 오늘은 급한 약속이 있어서 첨삭은 내일 하자.“
”네.. 근데요.. 쌤 저 물어볼 게 있는데요..”
오늘은 전문반으로 승격하는 날이다. 첫 수업이니 조금 일찍 오라는 공지 때문에 수업을 일찍 끝낼 수밖에 없었다. 돈만 주면 다 받아주는 게 학원이라도, 교육원에서는 일정 수준이 되지 않으면 전문반에는 넣어주지 않는다. 전문반에 올라가기 위해 정말 눈물 나는 노력을 했던 기억이 있다. 늦지 않기 위해 불을 끄고 나가려는데, 나의 옷 끝을 미주가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런데 미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만 옴짝달싹할 뿐이었다. 나는 바쁜 와중에 다정함을 잃지 않으려 미주에게 물었다.
“미주야, 고민이 뭐니? 쌤이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줄게.”
“세원이 걔 글 잘 써요?”
자신이 정말 붙을 수 있는 거냐는 식의 칭얼거림을 예상한 것과는 다르게, 미주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말이었다. 하긴, 우리 학원에서 S대를 준비하는 학생은 얼마 없었다. 세원이 의식될 수밖에.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적당한 대답, 그건 거짓말이었다.
“아니. 너가 더 나아.”
*
다행히 교육원은 바로 역 앞에 있어서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학원 입구에 들어서서 프론트를 지나 수업을 듣는 302호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친 뒤, 엄청난 보폭으로 나를 앞질러 성큼성큼 데스크로 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오늘 처음 와서 그런데 뭐 좀 물어볼 수 있을까요?”
“네. 성함이랑 반이 어떻게 되시죠?“
”심재연이요. 전문반이에요.“
오늘 처음 등록한 수강생이 전문반으로 바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내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기 충분했다. 처음 온 사람이 전문반으로 바로 투입될 정도면 엄청난 실력자임에 틀림없다. 괜한 열등감과 호기심에 사로잡힌 나는 문 앞에 서서 심재연이란 사람을 잠시 관찰했다. 여자치고도 작은 키에 아주 빼빼 마른 체구, 무채색으로 통일한 아주 단정하고 심플한 옷차림. 그런데 여자가 살짝 몸을 비틀자 보이는 에코백이 상당히 눈에 띄었다. 그녀의 옷차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방정맞은 흰색 말티즈가 아주 싱글벙글 웃고 있는 에코백이었다.
”여긴 환불 규정이 어떻게 되나요?“
여자에 대한 첫인상은 어이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섰다. 아니 무슨 처음 수강 온 날부터 저렇게 당당하게 환불 규정부터 물어보지. 직원은 잠시 당황하더니, 환불법상 수강 일이 2/3일 이상 지나면 환불은 불가능하다며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자 재연이란 저 여자는 그럼 두 번 나오면 절반은 환불이 가능한 거냐며 확답까지 받고서야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작은 체구에 어찌나 보폭이 크던지 내가 시선을 떼기도 전에 벌써 내 앞에 서 있는 재연이었다. 재연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교실로 들어갔다. 재연의 기에 눌려 당황한 내 시선은 재연의 에코백에 머물러 있었다. 그제서야 아깐 미처 보지 못했던 말티즈 입에서 나온 말풍선의 문구, ’SAVE THE EARTH’ 가 눈에 들어왔다.
***
“자 이제 여기까지 왔으면 실력으론 뭐 거의 작가로서는 완성이 되었다고 볼 수 있죠.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양치기입니다.”
수업이 시작되고, 선생님은 정말 형식적인 운을 띄우며 아직 어색한 분위기의 공기를 풀어내려 하고 있었다. 당장 다음 주부터 합평을 시작한다는 선생님의 말에 수강생들은 좌절하기 시작했다. 이제 실력은 갖췄으니, 무조건 쓰는 양을 늘려 괜찮은 포트폴리오를 하나라도 건져내야 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분명 입봉만을 꿈꾸며 여지껏 달려왔지만, 슬프게도 내겐 아직까지 입봉이라는 것이 눈앞에 잘 그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슬슬 부모님도 압박을 가해오길 시작했다.
“상혁아, 올해는 입봉 해야지. 너 이제 서른 중후반이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상혁은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상혁은 꽤 유명한 J예대 출신으로 주변에 동기들은 (전공을 살리던, 포기하고 딴 길을 찾던) 하나둘씩 자리를 잡아 가는데, 아직 아무것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 오빠였다. 나는 상혁을 동정할 처지가 못됐다. 내가 몇 살만 더 먹으면 상혁의 모습일 테니. 어찌 됐든 모두의 앞에서 면박을 받은 상혁이 딱하다고 여기며 상혁을 바라봤는데 눈이 마주쳤다. 상혁은 내게 눈웃음을 지었다.
기초반부터 계속 함께 수업을 들었던 상혁은 내게 몇 번 고백을 했었다. 나와 가까워지려 애
쓰는 상혁의 모습에 가끔 마음을 열어볼까 싶을 때도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나는 누군가와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는 것이 아직 무서웠다. 상혁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눈에 담긴 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선생님의 진부한 말들을 귀담아듣고 있는 재연의 모습이었다. 잠깐 볼 땐 몰랐는데, 이상하게 재연에게선 묘한 기시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게다가 아까 재연의 에코백이 생각나 살짝 웃음이 났다. 에코백을 저렇게 본래 목적에 충실하게 사용하는 사람인듯한 재연에게 호기심이 가기 시작했다.
*
회식 장소는 교육원 근처 닭갈비 집이었다. 우리 테이블엔 상혁, 미소 언니, 재연 그리고 내가 앉게 되었다. 철판 위에 닭갈비가 볶아지는 동안 이 테이블에선 닭갈비 익어가는 ‘치익’ 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고기가 어느 정도 익어가자, 재연은 자신은 비건이라며 따로 우동을 주문했다. 상혁은 이 식당 맛있으니 오늘만 먹어볼 것을 재연에게 권했으나, 재연은 단호했다. 종업원에게 우동 육수에 들어가는 재료까지 확인하는 태도까지 보였다.
“그나저나 재연이 너는 처음부터 전문반이라니 대단하다. 원래 글이 전공이야?”
미소 언니는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재연에 대한 이야기로 이끌었다. 우리야 이미 몇 년간 봐왔기 때문에 대충 서로의 사정을 알았으니, 뉴페이스 재연이 궁금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재연이 문예창작과나 극작과 대충 둘 중 하나이겠거니 추측했다.
“아니요. 영화과예요.”
“정말? 그러고 보니 상혁이도 영화 전공이라고 들었는데. 거기 J예대 다녔다고.”
우리의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영화과 이야기로 흘러갔다. 계속 재연의 이야기 위주로 흘러가던 분위기를 상혁이 신이 나서 자기가 잡고 주도하기 시작했다. 학교 다닐 때, 사람이 서서 도 잘 수 있다는 걸 느껴봤다는 등의 고생담을 풀어 놓기 바빴으며, 자신의 얘기의 신빙성의 확인차 재연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러면 재연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식의 대화 플레이였다.
나는 평소 예술을 전공한 사람들의 특유의 선민의식이 느껴지는 대화를 싫어했다. 그래서 말없이 닭갈비를 먹기에만 바빴다. 그러다 조랭이떡을 하나 집었는데, 순간 실수로 바지에 떨어뜨렸다. 주변에 닦을 만한 게 없나 살피는 도중, 곧바로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나 내게 물수건을 건넸다. 손의 주인은 재연이었다. 재연의 민첩한 행동에 벙쪄 재연을 쳐다봤는데, 재연의 시선은 오로지 자신이 대화하고 있는 대각선 쪽의 상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괜히 민망해진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바지만 닦기 바빴다. 재연은 그 후로도 휴지가 필요한 사람, 물이 필요한 사람 등을 혼자 캐치 해 남모르게 챙겨주었다. 나는 혹시 재연은 눈이 세 개나 달린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벌써 밖을 보니 벌써 캄캄해진 밤이었다. 내가 대화에 잘 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미소 언니가 내게 무슨 영화를 좋아하냐 질문을 걸어왔다. 이렇게 만난 사이에서 이런 질문은 참으로 난감하다. 정말로 좋아하는 영화를 말해야 하는지, 아니면 적당히 느낌 있는 예술 영화를 말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을 하니, 상혁은 나를 배려해준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재연에게 물었다. 그리고 재연은 3초도 고민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니모를 찾아서요.”
재연의 대답에 상혁이 터졌다. 그러더니 재연에게 너 정말 영화를 전공한 게 맞냐 혹시 누벨바그가 뭔지는 아냐는 등의 장난 섞인 조롱을 하기 시작했다. 재연은 영화가 그냥 재밌으면 그만 아니냐는 했지만, 계속되는 상혁의 업신거림에 기분이 상한 듯해 보였다. 미소 언니는 그런 재연을 살피며 자기도 상업 영화를 좋아한다며 감싸줬다. 아무래도 여긴 상혁 빼고 다 눈치가 빠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현주 너는 인생 영화가 뭐야?”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상혁은 내게 대답을 재촉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 재연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눈을 후딱 피해 버린 쪽은 나였다. 내 시선엔 재연의 무릎 옆에 놓인 에코백만이 담겼다. 왠지는 모르게, 말티즈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용기를 얻어 솔직한 대답을 내놓기로 결심했다.
“레퀴엠이요.”
미소 언니는 ‘레퀴엠’이 무슨 영환지 모르는 눈치였고, 재연은 그 영화 참 기괴한데 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상혁은 양손을 팔짱을 끼고 내 답변을 음미하는 듯하다, 자신도 ‘대런 아로노프스키’ 의 영화들을 참 좋아한다며, 그 감독만의 특유의 연출법이 대단하다며 내게 영화 볼 줄 안다고 나를 치켜세우기 바빴다.
이래서 대답을 하기 망설였던 거다.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면,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꼭 저런 반응을 보인다. 내가 레퀴엠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영화가 어떤 대단한 연출을 해서도, 스토리가 획기적이어서도 아니었다. 그 영화가 좋았던 건 단지 내 마음을 강하게 동요시켰던 영화 속 마지막 장면 때문이었다. ‘수진’의 자살 이후 온몸을 두들겨 맞을 듯한 괴로운 나날들이 이어졌을 때, 영화 속 주인공이 모든 걸 잃고 허공을 바라보며 쇼파에 누워 있던 모습이 나와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구구절절한 스토리를 읊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다. 아직도 ‘레퀴엠’과 ‘대런 아로노프스키’에 대해 구구절절 떠들고 있는 상혁의 입을 막고 싶어 나는 대충 둘러댔다.
“저는 그냥 외국 영화면 다 좋아해요. 한국 영화는 좀 뻔한 것 같아서요.”
그렇게 대답을 하곤 속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독심술을 쓰는건지 재연이 바로 내게 물을 건넸다. 무심하게 다가왔던 재연의 친절들이 화룡점정을 찍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제 재연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보통 이렇게 타인에게 배려 있는 사람은, 대게 아주 예민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들이다. 그리고 재연은 그 예민함을 다정함과 섬세함으로 승화시킨 사람 같았다. 우린 또 눈이 마주쳤다. 재연은 정말로 눈이 세 개가 달린 게 분명하다. 그리고 재연은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말을 했다.
“저도 외국 영화 좋아해요. ‘니모’ 같은 교훈적인 얘기나 우디 앨런의 현실적이면서도 영화 같은 사랑 얘기.”
*
회식을 싫어하지만 오늘은 2차까지 따라가는 중이었다. 재연이 가기도 했고, 선생님과 친해지고 싶어 따라나선 것이었다. 아마 다들 그럴 것이다. 선생님과 친해지면 어떻게 콩고물이라도 떨어질지 모르니 말이다.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나는 슬쩍 검색창에 ‘니모를 찾아서’와 ‘우디 앨런’을 검색해 봤다. 곧이어 우리는 작은 선술집에 도착했고, 나는 재연의 속도에 맞춰 눈치를 보며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나는 재연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재연의 옆자리에 앉으니 재연에게서 특이한 한약 냄새 같은 것이 확 풍겨졌다. 이게 뭘까 고민하던 중에, 운 좋게 내 앞에 선생님이 앉았다. 그리고 그 옆엔 상혁이 앉았다. 선생님은 갑자기 빨리 K예대 출신인 재연의 글을 보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다. 재연은 예고 없는 자신의 대학 공개에 놀란 것 같았고, 상혁은 더 놀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J 예대 출신이라고 은연중에 얼마나 자랑을 했었는데. 나는 K 예대 출신은 처음 본다고 거기 정말 천재들만 가는 것 아니냐며 과장된 리액션을 선보였다. 사실 정말 천재들만 가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냥 아까의 일로 상혁을 조금 놀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 겪었던 재연모습들을 생각해보면, 그곳은 정말로 특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연의 첫인상은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천재 중엔 특이한 사람들이 많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갑자기 강하게 재연이 ‘BLUE’ 의 작가일수도 있겠다는 재밌는 상상도 들었다. 재연에게 혹시 그 소설을 아냐고 물으려는데, 상혁은 재연에게 쏠리는 관심이 아니 꼬왔는지 리모컨을 찾아 TV를 틀었다. TV에서 전해지는 소식은, 며칠 전에 봤던 학교 폭력 가해자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근데 아직 가해자도 어린 애잖아. 나중에 진심으로 반성할 수도 있는 거고, 저렇게 미디어에서 떠들어서 애를 아예 가해자라는 단정 지어 버리는 건 조금 그렇다.”
그리고 상혁은 청소년 물로 저런 소재 괜찮을 것 같다며,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친해지는 우정 스토리, 특히 브로맨스를 가미해보는 건 어떠나며 말을 꺼냈다.
“가해자가 개과천선하는 거지. 뭐 요즘 착한 일진이라는 말도 있잖아?”
선생님은 각 방송사에서는 그래도 매년 한 편 정도는 학원물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해주었다. 다들 이번 공모전엔 우후죽순 학원물을 내는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들이 오갈 때, 나는 또 숨이 잘 쉬어지지 않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지만, 시야마저 흐릿해지자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건 아니죠. 가해자는 끝까지 가해자로 남아야지. 가해자가 뉘우치면, 피해자만 바보 되는 거 아닌가요? 한번 가해자는 평생 가해자인거에요.“
아까의 닭갈비 집에서 재연을 약 올리던 상혁은 온데간데없이 반박 한마디 없었다, 아무래도 재연이 K 예대를 다닌다는 말을 들은 후로, 묘하게 기가 죽은 느낌이었다. 나는 뭐가 맞다 틀리다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식당 안을 빠져나가기 바쁠 뿐이었다.
***
지하철역이 원래 이렇게까지 멀었던가. 정말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만 싶었다. 그때, 누군가 나를 강하게 일으켜 세웠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머리카락에서 나는 강한 한방 냄새에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재연은 나를 낑낑거리며 부축해서 역 안에까지 함께 도착했다. 우리는 다행히 집 방향이 같았고, 지하철 의자에 앉아 열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역 안에는 이미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사람들 하나 없었고, 우리 사이엔 고요함만이 흘렀다.
”고등학생 때, 정말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죽었어.“
먼저 적막을 깬 건 나였다. 내가 왜 재연에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수진이의 이야기를 꺼냈는지 모르겠다. 재연은 따뜻한 사람이니까 나를 위로해 주길 원했던 걸까. 아니면 재연은 흑백논리가 분명한 사람이니까 나를 혼내주길 원했던 걸까. 정답은 없었다. 그냥 나는 재연에게 강하게 끌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도 모르면서 내뱉기 시작했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갔는데 애가 없는 거야. 나는 장례식도 못간 거지.“
수진이 같은 반에서 학교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처음엔 수진이도 자존심상 그 얘길 나에게 하지 않고 싶어 했고, 나 역시 모른척했다. 하지만 괴롭힘이 심해지자 유일한 친구인 내가 먼저 그 얘길 꺼내주길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또 모른척했다.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도와주겠다고 하면, 내게 생길 책임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조금만 참고 스무살이 되면 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회피했다. 방학 동안 갑작스레 수진이와 연락이 끊겼는데, 워낙 우등생이었으니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개학한 후에도 수진이는 등교하지 않았고, 수진이 집에 찾아가고 나서야 나는 수진이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수진이의 부모님은 수진이의 핸드폰이 잠겨 있어서 연락을 돌릴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수진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대학 병원에 찾아가 보았을 때, 근처에 있던 수많은 통신사 대리점들을 보고 절망했다. 후로 내가 모든 감정들은 미안함과 슬픔과 죄책감과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특히나 한동안 죄책감에 정말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건 잠시뿐이었다. 나는 잘 지냈다. 대학도 잘 갔고, 강사가 되어서 돈도 벌고 있고, 꿈을 이루겠다고 이렇게 학원도 다니며. 가끔씩 관련된 소식이 들리면 몸에 고통스러운 이상 증상들이 발현되곤 했으나, 그냥 수진이 내게 남기고 간 벌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였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제 그만 수진이가 나를 놓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내게 너무 가혹한 벌을 내린 것 같아 수진이가 원망스럽기까지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웃기게도, 나는 수진이의 상처를 외면했으나, 누군가는 내 상처는 위로해 주었으면 좋겠다며 이렇게 재연에게 기대고 있었다.
”언닌 잘못한 거 없어요. 슬픔을 누군가와 나누려고 하는 게 이기적인 거 아닐까요”
재연은 뭐든지 확실한 사람이다. 내게 잘못이 없다며 해주며 나에게 자신의 어깨를 내주었다. 나는 재연에게 기대 흐느껴 울었다. 그 울음에 대한 의미는 수진이에게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죄책감이었을 수도,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털어놓은 후련함이었을 수도 있었다. 굳이 그게 어떤 감정이었는지 정의하려 들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그렇게 가만히 함께 앉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열차가 몇 대나 지나쳐 갔다. 한 참 시간이 흘렀을까, 진정이 된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재연이 매고 있던 에코백 어깨 부분이 조금 젖어있었다. 미안해진 마음과 살짝 민망한 마음이 들었는데, 재연이 먼저 눈치를 채고 말을 꺼냈다.
“이거 귀엽죠.”
“말티즈 표정이 대단해. 눈감아도 생각날 것 같은 얼굴이야.”
“하하. 그거 일부러 그런 거예요. 저는 누가 절 따라 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거든요. 뭐랄까 내 정체성을 뺏기는 기분? 그래서 제가 따로 주문 제작한 거예요.”
”재연이 너는 환경에 관심이 많은가 봐?“
내 말에 재연은 화들짝 놀란 얼굴이었다. 사실 재연의 에코백에 굵은 글씨를 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이 들 것이라 던진 말인데. 재연은 자신을 알아 봐준 것이 고마웠는지 대뜸 이 가방을 선물해 주겠다며, 자신의 가방 안을 털털 털기 시작했다. 재연의 가방 속엔 일회용 젓가락 대신 사용할 젓가락 통, 텀블러, 손수건, 면 생리대 등이 들어 있었다.
재연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가 처한 환경 문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환경에 대해 큰 뜻은 없었으나 북극곰이 살고 있는 북극의 얼음들이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래서 내가 아는 선에서 공감을 해주었고, 재연은 내 반응에 신이 났는지 제스처까지 키워가며 환경 얘기를 이어 갔다. 그러다 갑자기 내 눈치가 보였는지 자신의 얘기만 너무 한 것 같다며 풀이 죽어 내 얘기를 물었다.
“언니는 어떤 글을 쓰고 싶어요?
재연의 질문에 나는 정말로 당황했다. 내겐 슬프게도 그런 것이 없었다. 나는 그냥 입봉이 하고 싶을 뿐이다. 이젠 정말 드라마 작가가 하고 싶은 건지, 이때까지 쏟았던 시간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인지 모르겠다. 작가들은 자기만의 확고한 무언가가 있어야 성공한다는데, 나는 하다못해 중국집 메뉴를 고를 때조차 짬짜면을 시켜버리는 우유부단한 인간이었다. 그러니 취향이랄 것도 없는 무색무취의 사람인 것이다. 나는 내가 재능이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며 대답을 회피해버렸다.
“언니는 재능이 있어요. 분명해요.”
“뭐야. 그런 위로면 됐어.”
“언니, 생각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기한 촉이 있어요. 미술 학원 하는 제 친구가 그랬는데, 학원에 등록한 애들 대다수가 그림을 접해본 적도 없었대요. 근데 막연하게 그냥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시학원에 온 거죠. 언니는 살면서 미술 해보고 싶단 생각 해본 적 있어요? 전 단언컨대 없었거든요. 신기한 건 걔네들이 대학에 붙는 거죠. 저만해도 그래요. 고삼 때 그냥 영화가 좋아서 영화과를 준비했는데 붙었어요.”
이상한 논리였지만 그런대로 설득력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연극 동아리에서 재능이 있다는 말에 글을 쓰기 시작한 나도 웃기다. 연기도 연출도 하다못해 무대 미술도 있었는데 말이다.
“끌림의 법칙.. 뭐.. 그런 건가?”
“맞아요. 언니가 이 길을 선택한 건, 언니 스스로도 알고 있는 거예요. 언니가 재능이 있다는 걸.”
재연이 좋아졌다. 따뜻하고 배려심 있는 마음씨에 자기 세계가 확실하고 신념 있는 사람. 우리의 만남은 누구 하나가 특별히 애쓰지 않고 자연스레 이어진 인연처럼 느껴졌다.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재연에게 이토록 열리는 마음이 신기했다. 그러다 문득 재밌는 이게 드라마라면, 재연이 ‘BLUE’ 의 작가일 텐데. 내가 힘들 때마다 내게 위로가 되어 주는 책의 작가와, 갑작스레 마음을 연 친구가 사실 동일 인물이었다니. 나는 우리의 운명 같은 만남을 믿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재연을 떠보기 위해 어떤 글을 써보고 싶냐고 물었다.
“아주 먼 미래에 회색빛 세상에 사는 내 또래의 여자애가 있는데, 걔가 증강 현실게임을 통해, 과거의 자연으로 가득한 세상을 경험해 볼 수 있게 되는 거죠. 처음엔 재미로 깔짝거리다 나중엔 완전히 자기 반려견까지 데리고 가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는데…”
“아이디어 완전 괜찮은데? 이번 합평 시간에 제출해봐.”
“아니요. 제가 원하는 저의 작가상은 성장형 캐릭터에요. 초기작이 너무 대박이면 후에 그걸 넘기 힘들 것 같아요. 거기다 괜히 합평에 냈다가 이 좋은 소재를 스틸 당하면 어떡합니까..”
아무튼 재연은 정말 희한한 애다. 나는 재연에게 더 묻진 않았다. 만일 재연이 작가라면, 내가 알아본 거니 됐다. 결말의 확인은 좀 더 클라이맥스쯤에 하고 싶었다. 나와 재연은 계속해서 열차를 보내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다지 영양가는 있는 대화는 아니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었다. 지금 내겐 지하철 속 퀴퀴한 냄새와 재연의 댕기 머리 샴푸 향이 섞인 이 공간조차 전부 사랑으로 다가올 뿐인데.
***
합평 날이 다가오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글을 쓰다 보면 이젠 뭐라고 지적받을지 까지 예측이 가는 상황에 도달한다. 글이야 계속 쓰다 보면 누구나 느는 거지만, 내겐 특색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만큼 답답한 일이 없다. 재수 없게도 합평의 첫 타자는 나였다. 예상한 대로 선생님은 모든 면에서 너무 무난한 글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더 노력해 보자는 말과 함께 바로 다음 순서인 재연으로 넘어갔다. 나는 재빠르게 재연의 글을 훑었다. 재연의 대본은 기대 그 이상이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사람 생각이 거기서 거리일 뿐이라며 스스로 위로를 보냈던 내 자신이 비참해지는 순간이었다. 어디에서나 당당한 재연의 태도는 실력에서 나오는 용감함이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이 학원을 10년을 더 다녀도 이런 발상은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쉽게 쓰인 듯했지만, 글의 기승전결도 완벽했고 숨겨놓은 복선과 떡밥들도 완벽하게 처리한 작품이었다. 재연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싶진 않았지만, 몇 년 동안 드라마를 습작한 내 실력의 한심함에 자꾸 마음이 가라 앉았다.
“재연이 글은 엄청 특이해. 재밌긴 한데, 이런 건 절대 못 붙어.”
그러나 선생님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이런 대본은 참신하지만 이런 글이 붙었던 선례가 없었다고 했다. 굳이 ‘절대’라는 단어를 쓰면서까지 안된다는 말에 재연은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 듯해 보였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요즘은 신선함의 싸움이다. 틀에서 벗어나더라도 자기 개성이 더 중요한 시대이다. 평범하고 무난한 이야기는 사람들을 삼십 분도 집중할 수 없게 한다. 게다가 사람들의 취향은 점점 세분화 되어 가고 있다. TV 채널만 해도 몇 개인가. 그러니 매니아 층들이 점점 더 생기는 것이며, 그들만이라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반은 성공한 거다.
이제 모든 사람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나는 재연을 알아보지 못한 선생님이 한심했다. 트렌디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인 물 같았다. 평소에도 가끔 작은 개연성에만 엄청 집착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가긴 했으나, 오늘부로 확실해졌다. 혹시나 나만 그렇게 생각인가 싶었으나, 다른 수강생도 재연의 글에 놀란 모양이었다. 상혁마저도 그 작은 눈이 몇 배나 커졌다 작아졌다 했으니깐. 그래도 선생님에게 밉보이면 좋을 것이 없으니 다들 입을 다물고 있는 눈치였다. 다음은 상혁의 차례였다.
“상혁아 대단한데? 이 수준이면 올해 입봉 가능하겠어. 이거 살려서 공모전에 응모해보자.”
이젠 정말 발등을 불이 붙었는지 상혁이 한 건 해낸 모양이었다. 선생님과 다른 수강생들의 칭찬이 릴레이로 이어지는 동안 나는 서둘러 상혁의 글을 읽었다. 첫 장부터 제법이라 생각하며 페이지를 넘기는데, 재연의 목소리가 조용한 강의실 안을 울렸다.
“이거 진짜 상혁 씨가 생각해낸 거 맞아요?”
다음 차례로 넘어가려는 걸 붙잡은 건 재연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다들 당황하는 분위기에, 재연은 상혁이 쓴 글이 79년도에 개봉한 미국의 독립영화와 유사하다며 지적했다. 재연의 말에 강의실 안은 귀신이 한 바퀴라도 돈 것 마냥 고요해졌다. 다들 몰래 책상 밑으로 핸드폰을 꺼내 줄거리를 검색해보고 있었다.
“소재랑 전개방식만 슬쩍 갖다 쓰면 모를 줄 알았어요? ”
상혁의 성격상 베낀 게 아니었다면 뭐라도 반박할 텐데,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면 표절이 맞는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재연에게 그만 앉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연은 앉지 않았다. 도리어 영화의 줄거리를 쭉 읊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아무리 그래도 같은 수강생끼리 이렇게 대놓고 무안을 주는 건 아니라며 재연을 저지했고, 결국 재연은 자리에 앉았다. 상혁은 결국 소재만 살짝 차용했다는 말을 꺼냈다. 정적이 흐르고, 다음 차례의 대본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 한 번이 들리지 않았다. 합평을 시작하자는 선생님의 말에 재연이 갑자기 일어나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실 밖을 나가버렸다. 서둘러 재연을 뒤쫓은 나는 데스크 앞에서 재연이 환불받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재연은 바로 엘리베이터를 잡았고 떠나버렸다.
*
재연은 그 후로 교육원에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연락도 완전히 끊겨 버렸다. 나는 연락이 되지 않는 재연이 불안했다. 교육원에선 볼드모트마냥 재연을 언급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수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상혁은 그때 그 글을 발전시키고 있었고, 나는 매주 가져오는 글마다 진부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 날 선생님은 우리에게 곧 있을 공모전 몇 개를 알려주었다. 요즘 시대에 맞는 SF에 관련된 공모전이 주를 이뤘다. 나는 재연의 생각에 멍을 때리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내가 거슬렸는지 내게 좋은 아이디어가 없냐고 물었다. 아무 대답이 없자 한심하게 날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빛에 다급해져 아무 말이나 던졌다.
“먼 미래에 세상에 사는 여자애가 있는데, 걔가 증강 현실게임을 통해 지금의 자연으로 가득한 세상을 경험해 볼 수 있게 되며 …”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아뿔싸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한 번도 내게 지어 준 적 없었던 환한 미소를 지어줬다. 빨리 이야기를 굴려 준비해보라 했지만, 나는 죄책감에 사실 친구가 말해줬던 내용이라 그럴 수 없다 대답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니? 현주야, 니가 사는 세상은 꽃밭이니? 상상력은 선착순이야.”
집에 가는 길 역 앞에 상혁이 서 있었다. 상혁은 내게 자신은 다음 주부터 학원에 안 나온다고 했다. 아마 선생님이 어딘가와 연결을 해준 모양이다. 그리고 상혁은 내게 또 고백을 했다. 물론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전혀 동요 없는 고백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상혁은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아까 그 소재를 꼭 써보라는 말을 덧붙였다. 싫다는 내 말에 그런 일은 흔하다며 현실을 생각하라고 상혁이 화를 냈다.
“그런 일이 흔한 거면 그래도 되는 거예요?”
사실, 상혁과 선생님의 말이 아예 틀리지 않다는 것을 나도 안다. 지금 내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내게 깊게 박혀버린 재연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더 두려웠다.
“너는 왜 그렇게 심재연 걔 편을 드냐? 걔가 K 예대 출신이라서 그래? 내 친구들 중에도 거기 출신 꽤 있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도 꼬치꼬치 시비 거는 게 융통성 없어서 진짜 맘에 안 들었는데. 그리고 내가 들었는데 걔…”
재연의 험담을 하는 상혁이 너무도 불쾌했다. 그래서 불합리한 일에 가만있는 것보단, 뭐 하나라도 나서서 맞서는 재연이 옳아서 편을 드는 것뿐이라고 답하고 길을 나섰다.
*
재연의 잠적 이후로 스트레스가 더 심해졌는지 컨디션이 매우 안 좋아졌다. 병원에서 약을 처방을 받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불현듯 오늘은 재연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K 예대로 향했다. 재연은 아직 졸업을 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학교에 가면 볼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고 말로만 듣던 그 K 예대에 도착했다.
사람들에게 물어 오늘 영화과 수업이 있다는 대형강의실에서 재연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재연의 얼굴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역시 이건 너무 무모한 시도였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강의실을 나가려는데, 한 학생과 부딪혀 그 학생이 들고 있던 커피가 내 쪽으로 쏟아졌다. 흰색 말티즈가 완전히 갈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그 학생은 내게 혹시 심재연과 아는 사이냐며, 짜증이 솟구쳐서 사과도 무시하고 가려는 나를 붙잡았다.
“그 요란한 말티즈 가방. 그거 누가 봐도 심재연 거잖아요.”
재연은 학교 교수와 불미스러운 관계로 얽혀 최근에 휴학을 하고 잠수를 타 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학생은 그 교수와 같이 해외로 도피해버렸다고 도는 썰까지 내게 잊지 않고 덧붙여줬다.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재연이, 재연이가 그럴 수 있지. 다리가 후들거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강의실 뒤편에 대충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교수가 들어와 오늘 볼 고전 영화는 ‘브이 포 벤데타’라며 대충 영화 설명을 해주고 불을 꺼버렸다. 암전된 강의실에서 나는 넋이 완전히 나간 채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영화에서 나오는 총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영화의 내용이 너무도 익숙했다. 어딘가 연극적인 성격의 남자주인공, 괴기스러운 박물관 같은 그의 집, 그리고 불구덩이에서 나오는 두 사람.
*
“쌤.. 다 썼어요.. 저 진짜 이 실력으로 대학 갈 수 있을까요?”
당장 주말이 시험이라며 미주는 눈물을 계속 훌쩍이고 있었다. 괴로움의 연속이라도 출근은 해야 했다. 나는 미주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실력은 많이 늘었지만, 천하제일 논술대회라 불릴 정도의 경쟁률인 S대 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나는 잠시 미주의 얼굴을 바라봤다. 미주는 그동안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는지 볼살이 쏙 빠진 얼굴이었다. 작년부터 계속 논술 하나에만 끈덕지게 매달렸던 미주의 모습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나는 홧김에 책상 서랍을 열어 미주에게 그동안 세원이 써 왔던 답안지들을 건넸다. 원래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냥 그렇게 했다. 모범 답안과 세원의 답안을 싹 다 외워서 비슷하게만 쓰면 성적은 너가 더 좋으니 붙을 수도 있을 거라는 말을 해줬다. 그동안 미주를 보며 내가 처음으로 솔직했던 순간이었다. 미주는 내 말에 또 입을 옴짝달싹 거리고 있었다. 미안해할 거 없다며 빨리 가라고 미주를 보내버렸다.
미주가 가고 텅 빈 교실에 혼자 계속 앉아 있었다. 오늘은 교육원에 가지 않았다. 갈 기분이 도저히 아니었다. 멍하니 엎드려 있었는데, 잠시 후 교실 문이 열리고, 미주가 되돌아왔다. 미주는 씨익 웃으며 내게 커피를 건넸다.
“아니요. 쌤 진짜 감사하다구요.”
그렇게 말하고 미주는 정말 가 버렸다. 이젠 있을 어이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노트북을 꺼내 글을 써 내리기 시작했다. 암울하고 외로운 회색빛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 증강현실 게임 속에 들어가 자연을 만나게 되는 사람의 이야기. 내가 키보드를 두들기는 동안 몇 번이나 맞은편 건물들의 불이 꺼졌다 켜지길 반복했다. 집에 갈 생각도 없이 몇 날 며칠 그 자리에서 글을 완성했다. 수능 때 처음으로 펜이 손에 확 붙는 느낌이 들어 간신히 대학에 합격했었는데, 이번에도 그 날처럼 키보드가 손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글을 쓰면서 이런 경험은 정말 처음이었다.
집에 돌아와 또 몇 날 며칠 잠만 잤다. 시간이 어떻게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긴팔을 입어도 추워지는 게 느껴지자 수면 잠옷을 챙겨입을 날씨라는 게 느껴졌다. 몇 번의 퇴고 과정을 걸친 후 공모전에 제출해 버렸다. 그리고 하릴없이 계속 누워 있는데, 미주에게서 연락이 왔다.
- 쌤 저 합격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