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모의고사 수학 시간입니다. 중간 감독 교대 시간에 들어간 교실에는 이미 대부분 엎어져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잠이 안 와서 억지 잠을 청하고자 몸을 뒤척거리는 아이들도 있고요. 감독 교사만 말똥말똥 눈을 뜬 채 마치 빈 교실을 지키고 있는 느낌입니다. 객관식 시험문제가 갖는 폐해는 차치하고, 일단 변별력을 전제로 한 시험제도이다 보니 아이들이 공부해야 할 한계가 끝이 없습니다. 상위권 아이들은 1점 차이가 주는 의미를 절실히 알고 있기에 고난도 문제를 하나라도 더 풀려고 아등바등, 중하위권 아이들은 이해도 안 되는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라도 더 풀어보려고 아등바등. 그러다 보니 대부분 아이들은 공부하다 하다 지치고, 도달하지 못하는, 해도 해도 불안한 그 한계에 도달하려고 바둥대다 보니 다른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인성이니 감성이니, 독서니... 하면 좋은 걸 알면서도 보다 중요하고 절대적인, 그러나 아무리 바동거려도 도달하지 못하는 시험이 있기에 그저 부수적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대부분 아이들은 지쳐서 포기하거나, 필요한 교육 영역조차도 제대로 교육을 받게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능이라는 객관식 문제풀이가 가져오는 부작용 중 가장 심각한 현상은 아이들을 지치게 하고 ‘배움’ 자체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큰,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는 내용 주입하고, 다시 문제 푸는 연습을 시키는 주입식 수업으로 인하여 ‘배움’ 자체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배우는 즐거움을 앗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점차 지루한 수업이 무미건조하게 진행되고 더욱더 수업의 질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수업에 대한 흥미를 잃은 아이들은 힘들어하고, 대부분은 방치됩니다.
우리 고등학교 아이들의 문해력(文解力), 즉 단순 읽기를 넘어서 '의미적 읽기' 능력까지 고려해 본다면 아마 중학교 수준이거나, 거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일 것입니다. 서울 상위권 대학을 지원하는 아이가 자기소개서 지도를 받다가 갑자기 눈물을 몰래 훔치던 모습이 머리를 스칩니다. 글쓰기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직면하면서 자동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일 것입니다. 자소서를 쓰는 아이들은 지도 교사들에 의해 거의 대부분 반복 수정하게 됩니다. 거의 교사가 써주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자기소개서 문장 하나하나 쓰는데도 그렇게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보면 학습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읽고, 쓰고, 생각하는 아주 기초적인 능력조차 형성하지 못하는 우리 교육 현실을 더욱 절감하게 됩니다. 책을 읽고 스스로 내용을 정리, 파악하고 체득한 경험이 거의 없고 그저 정리 엄선된 단편적 지식들을 암기하고 문제집만 들이 파면서 문제 푸는 요령만 습득한 결과입니다. 가뜩이나 스마트폰에, 동영상의 단편적인 자극들에 익숙한 아이들이 책을 읽지 않고 문제집에 정리된 단편적인 지식, 정보들만 접하는 아이들이니 지적 역량이 성숙될 리가 없습니다. 흔히들 의례적으로 언급하는 ‘미래 사회에 대비한 융합적. 창의적 사고’는 기대조차 못합니다. 내가 객관식 문제풀이 위주의 공부를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객관식 문제풀이 수능은 지속됩니다. 아니 더 확장됩니다. 학종 위주의 수시 전형으로 그나마 잠깐 살아나고 있는 학교교육의 정상화가 수능 확대로 입시방향이 틀어진다면 지금보다 더 심하게 다시 문제집만 푸는 학원 같은 장소로 환원될 것입니다. 현장에 있는 교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려하는, 고등학교 교육을 단편적 암기 교육으로 몰고 가는 우(愚)를 또다시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능 비중이 높아질수록 ‘학교의 학원화’만 더 심각해질 뿐입니다.
거기에다 ‘입시의 공정성’이라는 개념까지 첨부하여 합리화해 버립니다. 즉, '문제없는 줄 세우기'에 불과한 입시의 공정성이라 명목하에 문제풀이 입시전형 비중을 더욱 확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단 한 번의 객관식 문제풀이 시험으로 줄 세워 학생을 선발한다는 발상이 과연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도 근본적인 의문이 듭니다. 핀란드에서는 우리의 대입 수능시험과 같은 자격시험을 2학년 2학기부터 3학년 2학기까지 세 번에 걸쳐 치르고, 대부분 서술형·주관식 문제를 하루에 한 과목씩 본다 합니다. 이 중 과목별로 가장 좋은 성적만 골라 대학에 제출하고요. 우리도 과거에 아이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연 2회 수능을 치르겠다고 발표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것마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비용 문제로 꺼려하는 것인지, 번거로워 피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왜 아이들을 위한 아주 작은 접근조차 생각도, 시도해 보지 않고 있는 것인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입시에서는 공정성이 최우선이라고 하지만 왜 학교교육이 단지 입시제도의 공정성이라는 기준에 끌려다녀야만 하는지, 왜 고등학교 교육에서 대학들이 맡아야 할 대입 선발의 공정성까지 책임져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미국의 경우 아이들의 거의 유사한 자료를 그 대학의 수많은 사정관들이 자체 점검을 통하여 선발합니다. 아이들을 선발하는 과정 및 책임이 전적으로 대학에 있습니다. 우리도 선발의 공정성은 대학이 맡고 중·고등학교에서는 교육 본연의 모습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수능은 변별력 확보를 위한 정교함(?)으로 인하여 객관성 확보라는 장점 하나만 담보할 뿐, 그로 인한 부작용은 더 커지다 못해 교육과 아이들 성장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왜 이런 문제 풀이에 우리 아이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야 하는지, 고등학교 3년 전체의 생활을 끌려다녀야 하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이처럼 입시제도, 특히 수능으로 인한 폐해가 이렇게 심각하게 교육을 말아먹는 국가는 우리나라 말고는 없습니다.
수능의 또 다른 문제점은 소득별 불평등을 더욱 부추긴다는 것입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의 사람들도 틀린다는 어렵고 난해한 문제, 작가가 수능 문제에 실린 자기 글에 관한 문제도 답을 찾지 못하고 틀리는 정체성 불명의 국어 문제 등... 여기에 현재의 수능은 진실한 수학 능력 신장을 추구하기보다는 변별을 위한 난이도 조절에 집착하여, 더 정교한 지도를 필요로 합니다. 대통령이 말하니 이제야 이슈가 되었던 ‘킬러 문항’ 뿐만 아니라 다른 문항들도 이리저리 꼬아놓아 수능 전문 교사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만드는 어려운 문항들입니다. 결국 비정상적인 사교육만 부추기게 되어 있습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은 공정하고, 학생부 종합전형(학종)은 불공정하다는 이분법적 발상 자체가 난센스입니다. 물론 공정성 자체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종이든 수능이든 치열한 경쟁을 전제로 한 입시 교육 체제라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어있습니다. 특히 입시를 위해선 무엇이든 한다는 우리나라의 유난한 교육열을 생각하면 수능이든 학종이든 문제가 없는 입시제도는 꿈꿀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처럼 아이들이 가고 싶은 대학이 몇 개 대학에 한정되어 있고, 그 수요는 넘쳐나는 비정상적 현실에서는 어떠한 입시제도를 갖춘다 한들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경쟁을 전제로 한 입시제도 하에서는 어떠한 변화를 가져온다 한들 오히려 가진 자들은 우월한 위치에서 혈안이 되어 그 빈틈을 찾고 메꿀 방법을 찾아내게 될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일반고 중에선 소득이 높은 서울 강남지역의 고등학교들이 정시(수능)에서 강세를 보입니다. 역시 가구 소득이 높을수록, 그리고 부모 학력이 높을수록 정시 진학률이 높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수능 성적이야말로 사교육 여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월평균 소득 700만 원 이상과, 100만 원 미만 가구의 월별 사교육비 차이가 7배에 달한다는 소리도 가구 소득이 입시를 좌우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수능 문제가 까다롭기는 하지만 나름 유형화가 돼 있어 노련한 교사들은 이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풀이를 전문으로 하는 학원의 강사들은 더욱 정확하게 문제 유형을 파악하고 있을 것입니다. 일명 족집게 강사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엄청난 사교육비를 들이면 그만큼 성적을 높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강남의 한 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 수능 성적 하위권을 맴돌던 아이가 사회탐구 한 과목에서 1등급에 달하는 높은 점수를 얻은 적이 있었습니다. 의아한 마음으로 물어보니 족집게 고액 과외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방 고등학교 아이들은 대부분 정시보다는 수시 중심을 선호합니다. 강원도의 경우 90%, 전남은 89%가 수능이 아닌 수시 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한다 합니다. 이들에겐 학교가 주도하는 활동들로 스펙을 채울 수 있는 학종이 대입에 유리한 전략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지방 고등학교들이 수능에 더욱 대처하기 힘들다는 사실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노련한 교사들에 비해 지방학교 교사들의 수준이 수능 시험을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교과서 위주의 지식 전달에만 주력하고 나머지는 학생 몫이 됩니다. 교사들이 부실하면 그나마 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서울 지역들과는 달리 지방 학생들은 스스로 인강 듣고, 문제집만 열심히 파는 지루한 과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능 성적만으로 줄 세우기 입시 결과는 공정하겠지만, 이미 그 성적 취득 과정은 부모의 소득과 사교육 여부, 심지어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교사들 수에 의한 불공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 수능 시험입니다. 겉으로만 공정의 틀을 보여주고 있을 뿐 성적 성취 과정에서는 더 심각한 불공정을 내포하고 있는 입시전형입니다. 오죽하면 수능을 40%로 확장한다는 발표로 인해 서울 학원가 근처 부동산이 상승하였고, 역으로 학생부 전형을 통해 수도권 집중 현상을 해소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나오겠습니까?
심지어는, 섣부른 속단일지 모르지만, 수능 점수를 잘 살펴보면, 아니 현장 교사로서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수능 점수는 속칭 머리 좋은 아이가 유리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눈 비비고 성실하게 열심히 하는 아이들보다 별로 열심히 하지 않는 것 같은 머리 좋은 아이가 더 좋은 점수를 받습니다. 수능 시험 자체가 변별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 이상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는 시험이다 보니 타고난 지적 능력에 의해 좌우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모양새입니다. 이런 교사들의 감이 맞는다고 본다면 수능으로 지적 능력 향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지적 능력에 의해 이미 결정 난 결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의 내용을 뒷받침해 주는 아주 놀라운 강의를 소개합니다. 연세대 심리학과 김영훈 교수가 재능과 환경이 노력보다 우선한다며 ’노력의 배신‘이라는 책을 통하여 노력에 대한 맹신을 비판하는 강의였습니다. 특히 교육적 성취와 관련하여 노력을 일방적으로 신봉하는, 그래서 재능과 가정환경 요인을 묻어둔 채 아이들의 미성취를 노력 탓으로만 몰고 가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분위기를 꼬집고 있었습니다. 재능이 있거나 가정환경이 뒷받침해 줄 때 노력의 효과가 발휘된다는 씁쓸한 주장이었습니다. 근거로 언급한 내용이 있어서 찾아보았습니다. 잭 햄브릭 미시간주립대 교수 연구팀은 노력과 선천적 재능의 관계를 조사한 88개 논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게임‘ 26%, ’음악·스포츠‘ 영역도 20%대 등으로 분석되었습니다. 나름 노력이 뒷받침이 될 것이라고 예상되는 영역들이었지만 역시 의외로 노력 이외의 요인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조사 영역들 중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학업성취’ 영역에서의 노력 비중이 4%에 그쳤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재능과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성취할 수 있는 정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충격적인 결과입니다.
교육심리학을 공부할 때 유전적 재능이 성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 있었지만 실제 아이들에게는 감히 언급하지 못했던 소리였습니다. 쉽게 말해 수학 점수가 안 나온다고 해서 아무리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하며 노력을 할지라도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참담한 내용입니다. 결국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끙끙거리며 수많은 시간을 노력해도 무용하다는 것이며, 노력을 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으니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미 사회경제적 배경 요인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요인까지 개입되는 수능이라는 잣대로 아이들의 노력을 평가하고 선발한다는 것 자체가 비교육적일뿐더러 비상식적입니다. 우리 수능과 유사한, 하지만 미국 일부 유명대학들만 요구하는 SAT 시험에도 역시 경제력이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해서 이를 관장하는 위원회에서도 SAT에서는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응시자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고려하는 역경 점수(Adversity Score), 즉 부의 불평등, 심지어는 시험 점수로는 반영되지 않는 학생의 어려움, 곤경 등을 감안한 점수를 학생 평가에 반영하겠다는 발표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교육 기회 획득, 더 좁게 보아 대학 입학 기회 획득에는 사회경제적 배경 요인이 개재하고 있음은 다 알려진 사실인데, 그럼에도 우리 정책가들은 교묘히 입시 결과의 공정성에만 초점을 맞추고 강조합니다.
100미터 달리기 전에 고기 먹으며 힘을 기른 아이들과 겨우 죽 한 그릇 먹고 뛰는 아이들의 경우처럼, 사회경제적 배경 요인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요인까지 이미 차이를 보이는 아이들에게 입시 결승선에서 1,2등을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