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사 전문
‘샘, 수행평가 감독 좀 부탁드립니다.’
수행평가 감독? 어느 날 느닷없이 수행평가를 본다며 내 수업 시간에 시험지를 나눠주며 시험감독을 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같은 시간대에 몇 반이 동시에 시험을 치러야지 공평하기에 내 수업을 빌려달라는 것입니다. 후배 교사들인지라 ‘수행평가를 지필 고사 객관식 문항으로 본다고...’하고 미심쩍은 한마디를 던져 보았더니 ‘괜찮아요. 다들 이렇게 해요.’ 합니다. 가뜩이나 답답한 암기 위주의 객관식 지필 평가 방식에서 탈피하고자 그나마 제도상 유일한 대안으로 질적 평가가 가능한 수행평가를 집어넣은 것인데, 그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수행평가조차도 객관식이나 단답형 문항으로 대체하는 판국입니다. 강의식 수업에 집중하는 대부분의 교사들이 뭘 가르쳐야 할지만 알 뿐이지 아이들이 어떻게 학습할 수 있는지는 모르기에 일방적인 수업에, 일방적인 평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수행평가 영역에 지필 평가가 들어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교과 내용에 대한 객관식 문항은 아닙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수행평가의 취지를 살릴 수 있는 접근을 해주는 것이 교육하는 교사로서 더욱 필요합니다. 수행 평가는 영어 표현을 빌리면 ‘Performance assessment’입니다. 말 그대로 학생의 수행이나 산출물을 직접 관찰하거나 검토한 것을 토대로 평가하는 방법입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학생이 실제로 학습하고 행동하는 과정을 평가함으로써 학습과정 중심의 질적 평가를 지향하자는 의도입니다. 수행평가의 개념을 알고나 있는 것인지는 차치하고, 골치 아픈 접근보다는 너무나 당연하듯이 단편적인 지식 쪼가리를 묻는 객관식 문항이나 단답형 문항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무개념의 인식을 보여줍니다. 의외로 교사들 중 수행평가는 단지 평가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점만으로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교사들도 많습니다. 아이들이 노력 하나하나를 예의 주시하고 기록해 주려는 교육적 인식보다 그저 쉽고 편한 평가 방식에 이미 젖어있는 동료 교사들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수업이 바뀌려면 최우선으로 평가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평가 방식이 바뀌면 가르치는 내용, 방법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평가하냐에 따라 가르치는 내용과 방법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수능이라는 평가 방식에 의해 우리 고등학교 수업이 끌려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객관식 시험이라는 평가 방식부터 뒤집어야 합니다. 그래야 단편적 지식 위주의 암기 수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수능을 앞둔 고3 아이들을 맡았을 때는 불가피하게 교과서 위주의 객관식 시험에 치중할 수밖에 없지만, 이때를 제외하고는 객관식 문항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교사 초임 때부터 가능한 객관식 시험을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객관식 시험 위주의 평가 방식을 고수하는 한 그 평가에 맞추기 위해 단편적인 지식들을 나열해 주고 설명해 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객관식 평가에 맞추어 교과서 지식을 열심히 설명하고 주입하는 것만 가지고는 절대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직접 펼쳐 보일 수 있는 학습과정을 거쳐야만이 최소한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학생의 소질이나 특성 등에 따른 개인차를 존중하여 그에 적합한 형태의 교수․학습 활동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개별 학생에게 의미 있는 교육 활동이 이루어진다고 강조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미국 교육학자인 하워드 가드너(H. Gardner)의 다중지능이론에 의하면 기존의 학교 교육은 두 가지 지능(언어적 지능 및 논리 수학적 지능)만을 강조하였으나, 인간의 지능은 공간적 지능, 음악적 지능, 운동적 지능, 인간관계적 지능, 그리고 자기 이해적 지능 등 7가지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 누구나 적어도 2~3가지 영역에서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아이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적성 등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지 않거나 소질이나 능력을 도외시한 채 제대로 된 교육을 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우리는 그런 교육에 접근조차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교사의 능력에 기초한 다양한 교수방법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육현장에 자리 잡지 못하고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은 수업 방법과 평가 방법이 모두 대학입시제도라는 틀에 맞추어서 진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수업방법의 다양화를 꾀할지라도 결국은 입시제도가 요구하는 여러 가지 제약조건들이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연구하고 노력하면 평가 방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수월성 교육이라는 개념도 각자의 탁월한 점을 북돋워 주고 성장시키는 것이 정확한 의미일 것입니다. 성적이라는 단일 기준만으로 등급을 나누고 우열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성적이나 등급으로 인한 차별 대신 공부가 아닌 다른 능력을 지닌 아이들에 맞추어 ‘차별화’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수월성’ 교육입니다. 또한 가드너(H. Gardner)의 다중지능이론이 강조한 것처럼 현 제도 하에서 내가 강조하는 수업이나 평가의 가장 중요한 점도 아이들의 학습동기를 진작해 줄 수 있는 접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최선을 다한 결과로 향상되었음에 대해 인정받아야 합니다. 또한 과제를 해낸 과정에 대해, 그리고 노력에 대해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실에 엎어져 있는 아이들에게 다른 아이들과 경쟁하지 않고도 자신의 노력만으로도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샘은 저에게 사회과를 넘어서 평가에 영감 주신 분이세요.
시험문제도, 수업평가도 이렇게 할 수 있는 거구나.. 하면서...
이제 2년 차인 저에게 새로운 방향을 알려주셨어요...
선생님께 많은 것을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학교로 이동하는 사회 교과군 초임 교사가 떠나면서 보낸 인사 메시지입니다. 아마 나의 발표와 토론을 통한 수업 및 평가, 그리고 논술형 시험 유형을 유심히 보았나 봅니다. 의례적인 인사일 수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 미세한 수업 및 평가 변화를 초임 교사들이 새롭게 인지하고 있구나 하는 새삼스러움에 조금은 의외였습니다. 내가 의외라는 생각이 든 이유는 ‘사회과에서 흔하디 흔한 토론 수업 및 평가를 처음 본다는 것인가?’하는 의문입니다. 아직도 초임교사들이 의미 있는 수업방식이나 아이들을 위한 교육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훈련을 제대로 받고 나오질 못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동시에 새내기 교사들이 필요한 교사의 역량을 제대로 함양시킬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입니다.
내가 쓰는 수업방법은 교과 수업을 수행평가 위주로 하고, 수행평가를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로 실시하는 것입니다. ‘한 줄 세우기’ 위한 상대평가의 폐해를 없애고, 아이들의 학습과정을 그대로 평가에 반영해 보자는 것입니다. 상대평가에서 뒤처진 아이들도 다른 능력과 노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수업시간에서의 수행평가 방식은 교육 영역에서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는 '수월성 교육'의 취지와 맥을 같이 합니다. 그래서 나는 현행 제도가 허락하고 있는 최대치인 70%까지를 수행평가로 하고, 수업 시간에 실시합니다. 가능한 절대평가 영역을 최대한 늘려보는 것입니다. 또한 현행 제도 하에서는 유일하게 개인차를 존중할 수 있는 질적 평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발표를 위한 자료 탐색 및 내용 구성, 그리고 발표 및 토론 등 수업 시간에 진행하는 아이들의 학습과정 전 과정을 절대평가 방식으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평가 요인, 즉 학업에 임하는 자세, 즉 질문 및 토론 참여 횟수 등까지 포함하여 수행평가 영역으로 설정함으로써 수업에 적극 참여하면 높은 성취를 얻을 수 있음을 의도한 평가 방식입니다.
또한 아이들이 원하는 수준의 평가를 받을 때까지 과제를 다시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해서 줍니다. 교사의 피드백을 받고 이를 수정해서 다시 해 올 경우 얼마든지 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딸아이가 첫해 영어에 익숙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 제출한 과제에 D를 받았지만, 다시 제출할 때마다 교사의 반복 지도 후 결국에는 A를 받아냈던 평가 방식입니다. 본인이 하고자 한다면 교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개인의 단독 작업을 강조하기보다는 모둠의 협동 과정을 통해서 과제를 수행하기를 강조합니다. 아이들 개개인의 능력보다는 노력만 하면 성취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수행평가 취지와 방식을 거듭 강조하는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지방 학교에 내려와 보니 유일한 질적평가가 가능하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한 수행평가조차 일부 교사들이 객관식 문항과 단답형 문항 등으로 구성한 지필 평가로 대체하고 있음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현행 제도가 요구하는 서열 가르기를 위해서 마지못해 해야 하는 지필 평가 30%는 논술형 평가로 대신합니다. 나도 발표 및 토론 위주로 수업을 진행하지만 의무적으로 시행하게 되어 있는 지필시험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교사의 수업방식과는 상관없이 수행평가, 지필 평가 의무 반영 비율을 고정시켜 버린 제도의 영향입니다. 그래서 시험 때가 되면 아이들이 이 정도는 알아두었으면 좋겠다 하는 내용들만을, 또는 수능에서 자주 언급되는 내용들만을 선별하여 1-2시간 잡아 지필시험 대비 내용 수업을 해줍니다. 교과서의 현실성 없는 지식들을 다 알 필요는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내용들조차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기본으로 생각을 확장하여 진술해야 하는 논술형 문제를 내줍니다. 그리고 다양한 식견을 갖추기 위해 교과서 내용과 연관된 실제 사회현상들을 포함하여 시험 문제를 내기도 합니다. 이처럼 교사들 스스로 독자적인 수업 자료와 평가를 구성하게 될 때 학원에서 미리 배울 교과서 내용이 없게 되는 것이고, 학원에서 내신용 시험공부를 대신해 줄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수행평가, 지필 평가 의무 반영 비율이 고정되어 있음을 고려할지라도 수업시간에도 적용가능한 수행평가의 비중을 최대한 높이고 이를 절대평가로 실시하면 충분히 아이들에게 이러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상대평가로 친구들을 무조건 눌러야만 이길 수 있는 비인간적 경쟁에서 내가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고, 평가받을 수 있는 체제로 바꾸고자 하는 시도이자 현행 평가 제도 하에서 아이들의 잠재력과 개인적 노력을 끌어내고 존중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교육 방식입니다. 핀란드에서는 중간, 기말고사의 결과로 학생을 평가하지 않고, 지속적인 관찰과 수업 시간에 수행하는 학생들의 능력을 바탕으로 평가한다 합니다. 학생들은 다른 학생을 이기기 위한 경쟁 대신 자신과의 경쟁을 하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업을 충실히 임하면 동시에 시험까지 해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지적했듯이 우리 아이들이 공부해야 할 양은 너무도 많습니다. 여과 없이 전달되는 수업의 지식 양도 많을뿐더러 교과서 이외에 수행평가, 별도의 시험공부, 그리고 학원 공부까지 해내야 합니다. 이렇게 너무 많은 학습량을 소화해야 하다 보니 항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집에서 짜증 부리고, 학교에서는 반항하고 튕겨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유롭고 심신이 편한 상태로 수업에 임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첫 장에서 느리고, 낮은 (slow & low learning) 수업을 언급한 이유입니다.
내가 관찰한 미국 중학교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충실하고 숙제만 제대로 해가면 시험 문제가 숙제 그대로 나온다고 합니다.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온 한 아이의 말은 수업 중의 쪽지 테스트에서 80점을 넘으면 기말고사가 면제된다고 합니다. 시험을 보더라도 교과서의 단원 종합문제가 그대로 나와서 시험만을 위한 공부를 따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교과마다 고유의 특성이 있고, 한계가 있겠지만 수업 따로, 시험공부 따로 하게 해서 아이들을 너무 지치게 하지 말고, 수업 시간만 충실하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시험 방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아이들에게 ‘학원, 그리고 문제집 장사만 돈 벌게 해 준다’는 소리를 더 이상은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학교에서만큼은 변별력을 높이기 위한, 서열을 정하기 위한 평가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