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서 비롯된 소명의 시작과 끝
수사관의 책상은 얼마나 무거울까. 물리적인 무게는 30kg 정도 되는 것 같다. 그 정도 무게라면 한 사람이 들거나 옮길 수 있겠지만 거기에 더하여진 사건과 사연들로 더해진 무게는 가늠하기 어렵다.
- 수사관이 무거움을 느끼는 진짜 이유
아침 6시 30분, 알람과 함께 현실세계로 다시 돌아오는 시간이다. 요즘은 잠들기 직전까지 온갖 사건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식은땀을 흘리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그러다 다시 맞이하는 주중의 아침이다. 운동을 해야 한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는다. 체력전에 대비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침을 우유와 시리얼로 대강 때우고 하얀색 와이셔츠로 갈아입고 나면 그때부터 업무 시작이다. 마음은 긴장모드로 들어가고 오후에 출석하는 피의자를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벌써부터 이런저런 예상치들이 머릿속에서 감돌며 사무실에 도착한다. 그 즉시 어제 검토하다 만 사건 기록을 꺼내 다시 한번 훑어 미리 준비한 조사요지를 세심하게 다듬에 본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점심시간, 밥을 먹어야 하는데 오후에 있을 조사 생각에 도저히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아 겨우 샌드위치 반조각으로 대강 때운다. 중요한 조사를 앞둔 수사관은 그리 입맛이 없다. 뭘 먹어도 맛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긴장하고 무거운 것이다.
오후가 되고, 막상 준비한 자료를 토대로 조사를 하고 보니 그간의 사실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머릿속은 더 복잡해진다. 수사방향은 모호해지고 증거는 빈약한데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곧 증거라며 항의에 항의를 빗발치다 거의 폭발하기 직전에 이른다.
- '발령이 곧 영전'
이쯤 되면 수사관은 쉬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다. 그런 사건들이 약 50여 건에 이른다. 50여 건이 주는 압박... 가슴에 걸려 넘어가지도 않는 침을 삼키며 다시 다짐을 해보지만, 오늘도 1건의 사건이 다시 배당된다.
압박이 가중되고, 마음은 그만큼 천근만근 무거워져 마치 돌덩이같이 감정이 없어진다. 발령이 영전이라는 농담을 실감하기 일보직전이다. 그저 딱 한 가지 생각에 희망을 건다. ‘도망’. 수사부서를 탈출하는 것이다. 기동대, 경무과, 정보과, 보안과, 지구대.... 어디든 좋다.
그러나 이렇게 도망가기 시작하면 최후에 도피처는 과연 있을까? 그 한 번의 도망의 기억이 수렁의 시작이 되고 헤어날 수 없는 악몽의 끝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가더라도 도망은 안된다. 그렇게 마음속에는 돌덩이 같은 사건들과 한숨으로 가득 차 있지만, 수사관이라는 자부심에 운명을 걸고 견디다 보니 이제 맷집이 생긴 것 같다.
이렇듯 무거워진 책상의 진짜 무게는 몇 킬로그램일까.
수사관이 책상의 무게를 감당한다는 것은 책상에 심어진 의미의 본질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여받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속 의지의 농도를 확인하고 표현한다.
- 책상의 무게 감당하기
기록은 항상 신성하다는 이 바닥의 격언이 있다. 수사기록이 도대체 뭐길래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하다고 할까. 수사기록은 사실 의지의 덩어리다. 그 기록은 ‘만든다’고 한다. 수사관이 의지를 가지고 그날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기록한 산물이다.
그런데 그 기록을 유독 송곳으로 검토하는 수사관이 있다. 그의 책상엔 항상 빨간색과 파란색 손잡이가 달린 사무용 송곳 2개가 있다. 그중에 파란색이 기록을 읽어내는 볼펜과 연필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책상 앞에 누가 앉던 그는 파란색 송곳을 들고 글자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짚어가면서 그 뜻을 헤아린다.
하루는 그런 모습에 고소인이 묻는다. "아니 왜 무섭게 송곳을 들고 말을 하세요"라고... 그러자 그는 야윈 손가락에 낀 송곳 손잡이를 책상에 가만히 내려놓고, 두 손을 가볍게 모아 그의 진심을 털어놓는다. "미안합니다. 위협적이었다면 양해를 바랍니다. 제가 송곳으로 기록을 검토하는 이유는 저를 위해서입니다. 기록검토를 게을리하거나 수사의 맥을 정확히 집지 못하면 언제든지 저를 찌르려고요. 그렇다고 세게 찌르지는 않습니다. 저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입니다."
사실 진짜 무서운 말이다. 업무에 대한 열정의 순도가 묽어지거나 사건을 헤아리지 못하면 자신을 찌르겠다고 하니 그의 결연함이 가히 위협적이다. 결국, 그 고소인은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수사관의 결연한 결단성에 차라리 안심을 했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수사관의 자세는, 국가를 대신하여 누군가의 아픔 마음을 세심히 들여다보고 국가로부터 받은 권한과 의무를 통해 가장 적절한 처방을 내리는 ‘사회적 의사’라고 하였다.
- 가장 위력적인 권한은 '예외 없음'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를 구현하는 사명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강제력으로 증거를 수집하고, 피의자를 비롯한 관계를 소환하고, 특정된 범행을 추궁하여 혐의여부를 판단하고 처분하는 권한... 실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이토록 엄청난 권한과 의무를 부여받은 직군이 더 있을까. 검사 말고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수사관의 법집행은 송곳처럼 날카롭고 다른 여지가 없어야 한다. 그야말로 그는 송곳을 청진기처럼 사용하는 사회적 의사였고, 아픈 곳을 예리하게 찾아 빠르고 정확하게 제거하고 봉합시키는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송곳을 든 수사관에게 1.2m 밖에 안 되는 책상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저 일을 주었으니 그 일을 하라고 준 도구나 연장 정도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당한 법집행을 하라는 명령과 함께 부여된 국가의 의지를 보았기에 나름의 청진기를 마련하고 수사권이 부여된 책상의 무게를 실감하고 있다.
- 1.2m 책상에 핀 희망
책상에서 비롯된 그의 소명을 묵묵히 수행하는 수사관. 마음의 무게를 묵묵히 견디며 오직 범죄수사를 위해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자. 그가 진정한 수사관이다. 어떤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더라도 이래야 수사관이다.
피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의 절망이 수사과의 책상 위에서 따뜻한 희망으로 부활하는 것... 단 한 번이라도 그 희망을 부활시켜 본 수사관만이 책상이 주는 무게의 의미를 알 것이다. 정성을 다했던 마음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고 실패와 절망을 이겨낸 용기가 더해져야 비로소 보이는 수사관의 자부심. 그 자부심만이 허리를 세우고 눈을 뜨게 하여 모진 수사의 과정을 헤쳐나가는 동력이다.
- 머리에서 비롯되어 가슴으로 끝내기
모든 사건 속엔 사람이 있다. 사람만이 사회적인 범죄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범죄를 밝혀내고 피해자를 구제하는 수사 또한 사람의 몫이다.
시작과 끝이 사람이고, 그 끝을 수행해야 할 수사관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의 흐름과 속성, 행동패턴을 면밀히 분석하고 현상을 파악하는 냉철한 지혜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따뜻한 가슴이 있어야 그렇게 광범위한 수사의 영역을 수행해 낼 수 있다.
'수사관이 신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도 많은 신념과 지혜와 온기를 가질 수 있나요?' 물을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 그 어떤 직업이든 이런 신념이 필요치 않는 곳이 과연 존재할까. 추구하는 목표와 그 결과물의 양태가 다를 뿐 궁극적으론 사회가 부여한 정당한 질서 속에 자타의 이익을 공고히 하고 편안하게 살고자 함은 다 같지 않은가.
- 신념과 지혜가 녹아진 책상의 무게
누구에겐 일생일대의 사활이 걸린 계약의 장소, 누구에겐 평생의 인연을 만드는 만남의 장소,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들의 삶을 위해 각자가 부여받은 책상에 삶의 의미를 심었을 것이다.
그중에서 우리 모두의 편안한 생활을 위해 사명을 부여받은 수사관의 책상에는, 매 순간마다 어떠한 의미를 부여해야 하고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얼마나 많은 관심과 용기를 불어넣어야 할까.
오늘도 수사관은 국가가 허락한 권한과 소명이 담긴 1.2미터 책상에 앉아 무거운 사연들 이지만 그래도 기꺼이 듣고, 보고, 느끼며 가슴으로 공감해 보겠노라고 다짐하며, 의자를 당겨 곧게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