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형사와 사기 피의자의 첫 대면
#. 긴 한숨
6월 어느 토요일 오전... 맑게 쏟아지는 햇살은 한 사람을 쉬게 하기에 충분하다. 따뜻한 햇살을 받은 허름한 골목 귀퉁이에는 동네 사람들 누구라도 앉아서 쉴 수 있도록 등받이 없는 허름한 갈색 나무의자가 있고, 그는 의자에 겨우 엉덩이만 걸친 채로 긴 여운의 한숨을 담배 연기에 담아 연거푸 품어댄다. 그의 쉼은 매우 오랜만인 듯 무기력하고 어색했다.
손은 자제력을 잃은 듯 이마와 턱을 쓰다듬다 검붉게 변한 벽돌담 자락에 자생하는 무화과나무옹이를 뜻 없이 헤집어 파고 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눈은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한꺼번에 담고 있는 듯 무거웠지만 간간히 흘기는 눈빛에는 경계심도 드러낸다. 이런 골목의 고요함을 한참 느낀 그는 힘없이 외마디를 뇌까리고 다시 긴 한숨만 쉬어댄다... 음... "구속을 괜히 했나."
그는 좁은 골목을 장식하는 해묵은 벽돌사이에 낀 이끼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이런 불안전한 감정이 드는 이유를 골똘히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내 결심을 한 듯 차오르는 지금의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정리하기 위해 며칠 전 구속사건을 처리할 때 먹었던 결기차고 불편한 감정들을 차근차근 복기한다.
#. 수배자
전라남도 먼 시골 경찰서로부터 수배자가 잡혔다고 연락이 왔다. 몇 달 전 1,500만 원 사기사건으로 기소중지 했었던 피고소인이 검거된 것이다. 예고 없이 불쑥 끼어든 수배자 검거 통보는 잘 짜인 수사관의 일정을 예고 없이 비틀고 왜곡시키기에 충분하여 듣기만 해도 짜증이 올라온다.
그러나 일단 데리러 가야 한다. 검거 시간으로부터 최종 48시간 내에 조사가 이루어지고 구속을 하던지 아니면 예외 없이 석방해야 한다. 서울에서 새벽 4시에 출발, 아침 9시 수배자 인수, 오후 1시 서울도착... 힘든 여정이지만 그러면 검거시간으로부터 최소 12시간이나 지나간다.
쉴 수가 없다. 기존 사건기록을 다시 검토하고 범행 부인을 대비하여 고소인에게 피고소인 검거사실을 알려 멀리 가지 못하게 대질도 미리 준비시킨다. 서울톨게이트를 지나 휴게소에서 김밥과 진한 아메리카노로 허기와 졸음을 달래고 한순간도 미룸 없이 신병인수는 착착 진행되었다.
지방에서 수배자가 검거되면 담당 수사관이 직접 데리러 가야 하기 때문에 올라오는 차 안에서 사건과 관련된 얘기를 상세하게 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아무리 고소인이 증거를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법원이나 검찰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사실에 대한 증명과 증거들을 수집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수배를 하기 전에 사건 관계인들의 진술을 미리 확보하고 할 수 있는 증거를 최대한 모아놔야 한다.
시골경찰서 형사과 대기실에 앉아있는 피고소인은 초조한 눈빛으로 자신을 데리러 온 수사관에게 공손하게 예를 갖춘다. "먼 길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하던 사업이 망하고 빚쟁이를 피해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그런데 이번 수배자는 여느 때와 달랐다. 보통 사업체 부도로 은신하던 사람들을 검거해 보면 대부분 도피생활이 주는 늘팍한 불안을 달래기 위해 과도한 음주와 흡연, 불면증, 그로 인한 성인병을 줄줄이 달고서 차디찬 처지를 견뎌내곤 하는데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거기에 복도 대기석에는 나이를 지긋이 먹은 여자분이 손에 어느 잔치집에서 받은 듯한 글씨가 새겨진 노란색 수건과 종이가방을 들고선 수사관을 힐끗 쳐다보고 있다. 뭔가 말을 걸려고 망설이는 듯하다.
그러길 잠시 뒤 복도로 나오는 수사관을 향해 그 여자분이 어렵게 말을 걸어온다. "혹시 담당 선생님 이십니까." 그는 네라는 대답을 들을 마음의 여유도 못 느꼈는지 급하게 다시 한번 묻는다. "가면 징역을 오래 살아야 합니까." 수사관은 순간 순박한 사람임을 느낀다. 최소한 타인을 아프게 했으니 그게 도덕적인 비난이던 형벌의 책임이든 따지지 않고 그저 통상의 죗값을 치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말 순박한 분이구나.
그녀는 누구일까.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나중에 서울 가는 차 안에서 그 사연도 같이 들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가방 안에는 검거된 피고소인의 일상복용 할 약과 속옷 몇 가지 그리고 편지였고 이를 수사관에게 건네며 서울 가는 길을 따라갈 수 없으니 전달해 달라는 눈물 머금은 당부와 함께 잘 부탁한다는 간절한 소망을 함께 전했다.
수배자를 태우고 서울로 향하는 차 안은 항상 무겁다. 그의 손에 채워진 수갑이 대변하듯 절망의 굴레를 뒤집에 쓴 채 꼼짝할 수 없는 처지를 무한 비관하며 나이 지긋한 어른이 품어내는 한숨의 무게는 삭막한 차 안의 공기를 무겁게 하기 충분하다.
그의 한숨은 그동안 사회의 일원으로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왔지만 결국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자 보상 없는 삶의 차가움과 깨져버린 가정의 온기를 아쉬워하며 그를 지탱했던 모든 가치가 그저 물거품이라는 아쉬운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얼어버린 듯한 차 안의 공기는 수사관이 의미를 실어 내뱉는 날카로운 질문으로 깨버렸다. "왜 갚지도 않을 돈을 빌려 여러 사람들을 고생시킵니까." 듣기엔 그저 멀리 데리러 오게 한 상황에 대한 푸념 같지만 수사관은 엄청난 함정을 파 놓은 고약한 질문이다.
갚지도 않을 돈이란 이미 형법상 사기를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변제할 의사나 능력이 없이라는 고의'를 밑자락에 깔고 대화를 시작하자는 의도가 숨어있고, 여러 사람을 고생시킨다는 말은 돈을 받지 못한 피해자에 대한 미안함과 여기까지 데리러 온 수사관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선량한 사람이라면 변명하지 말고 그저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인정하라는 의도도 같이 심어 놓은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함정인가. 보통의 수배자였다면 그저 미안합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라는 무의식적인 응대로 그 말의 진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그렇게 무거운 한숨과 순박하리 만큼 절망을 보이는 표정 속에서도 오감은 예리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첫 대답은 매우 단순했다. "갚으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말꼬리를 돌리며 고개만 돌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시골 풍경인 비닐하우스와 산등성이만 지긋이 쳐다보고 있다. 수사관은 첫 번째 공격이 무의로 끝났음을 너무도 쉽게 직감하고 가벼운 수습에 들어간다. 말을 돌려야 한다. 그의 약한 부분을 알아내야 향후 이루어질 조사과정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까 복도에 계시던 여자분은 누구신가요?" 완벽하게 개인적 화두로 화재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그의 대답은 감정적인 공감이 갔다.
"제가 나이 오십이 훌쩍 넘었습니다. 살면서 이런저런 아픔도 있고 때론 기쁘기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여자분은 저한테는 늘 아팠던 자락 마디마디에서 만났던 분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아 자식 명의로 해 두었던 고향 밭이 있습니다. 제가 그분께 수차례에 돈을 빌려 써서 빚대신 그 땅을 넘겨드려야 합니다."
그런 사연을 듣는 순간에도 의심이 많은 수사관은 다른 상상을 해 본다.... 이 사람이 '사업상 생긴 빚 때문에 재산을 모두 탕진되게 생겼으니, 가짜 채무라도 만들어 그 밭의 소유권을 여자분에게 넘겨 두려는 것인가'. 그런데 그는 아랑곳없이 진심이 묻어나는 말을 이어갔다. "10년 전 사업이 크게 휘청일 때 그분이 도와줘서 겨우 일어났는데 지금은 사업체가 아니라 제가 무너지니 또 여기에 와서 이런저런 의지를 하고 있네요. 이렇게 삶의 빚이 많아 이제부터는 제가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수사관은 더 이상 묻지 말아야 할 사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는 이 여자분이 유일한 해방구라고도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휘청일 때를 '고비마다'라고 한다면 그 고비의 자락에서 만나는 사람은 얼마나 간절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을까. 그런 맘이 들었는지 호송하는 수사관은 한참 동안 말이 없이 조용히 운전만 했고 그도 각자의 감정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음화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