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교보문고 문학 코너 한켠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다시 펼쳤다.
표지는 바뀌었지만,
글은 여전히 묵직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짧은 구절이 오래된 기억을 건드렸다.
마당을 건너야 닿을 수 있었던 아랫채 작은방.
윗채의 불이 꺼지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곧 잠드셨고,
집 전체가 숨을 죽인 듯 고요해졌다.
그 방은 어둠이 빠르게 번졌고,
형광등 하나가 깜빡일 때마다
천장과 벽, 책장 사이로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나는 그 속에서
혼자만의 밤을 견뎌야 했다.
낮고 낡은 책상,
삐걱거리는 서랍,
책들로 가득 찬 원목벽장.
모든 것이 멈춰 있는 듯했고,
그 정적은 마음을 더 움츠리게 했다.
스탕달의 『적과 흑』, 단테의 『신곡』,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괴테의 『파우스트』,
그리고 이청준, 김승옥, 박완서.
손에 쥐기엔 벅찬 책들이었지만
그 밤엔 그것뿐이었다.
TV는 멀리 있었고,
시간은 느리게 흘렀으며,
낯설고 긴 침묵을 잊기 위해선
무언가를 읽는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의 독서는
재미도, 이해도 아니었다.
그저 무서운 마음을 달래고,
지루함을 견디며,
잠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단이었다.
어느 날은 바람이 거셌다.
창문 틈으로 새어든 공기가
마치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나는 책을 펼친 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형광등은 간헐적으로 깜빡였고,
방 안은 숨을 죽인 채
내 불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읽고 있던 건 『변신』이었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가
문 너머 가족의 발소리를 듣는 장면에서
나는 책을 덮지 못했다.
그레고르가 나 같았고,
문 너머의 세상도 낯설었다.
그 밤, 책은 나를 대신해
두려움을 견뎌주었다.
나는 활자를 따라
방 안을 벗어나
다른 존재가 되어보았다.
얼마 후, 『데미안』을 펼쳤다.
글자는 빽빽했고, 의미는 어려웠다.
그러다 멈춘 구절이 있었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그땐 무슨 의미인 줄 몰랐지만,
작은방 안의 침묵보다는 덜 낯설었다.
『변신』이 나를 숨게 했다면,
『데미안』은 나를 깨우기 시작했다.
읽는 일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었다.
적막을 밀어내는 숨결이 되었고,
현실을 벗어나는 작은 통로였다.
이해되지 않아도 계속 읽었다.
낯선 활자들도
반복되는 밤 속에서 점점 익숙해졌고,
등장인물들의 삶은
내 이야기와 겹쳐지며
끝없는 상상으로 이어졌다.
책 속에서
마당을 건너 도시로 가기도 했고,
지붕 위로 날아오르기도 했으며,
죄를 짓고 벌을 받았고,
지옥을 지나 신을 만나기도 했다.
그날들의,
밤은 길었고,
무서웠고,
가끔은 나를 삼킬 듯 깊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책을 펼쳤다.
읽고 있던 건
이야기가 아니라,
나였다.
형광등 아래, 작은방은
연중무휴,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