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원입니다

by 시노

중학생이 되던 해, 까까머리는 여전했지만

청바지랑 잠바가 허용되면서

조금은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교복 아닌 옷을 입고 걷는 길은

괜히 어깨가 펴졌다.


학교가 끝나면 발길은 늘 같은 골목으로 향했다.

문방구 옆, 간판이 바랜 만화방.

‘딸랑’ 하고 종이 울리면

눅눅한 라면 냄새가 먼저 코끝에 와닿았다.

칸칸마다 꽂힌 책등엔

손때 묻은 만화들이 빼곡했다.

『공포의 외인구단』, 『캠퍼스의 청개구리』,

『대털』, 『요정 핑크』…

제목만 봐도 손이 먼저 움직였다.


책장을 펼치면 세상이 멈췄다.

주인공이 대신 화내주고,

대신 웃어줬다.

내가 말 못 한 것들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야, 라면 먹고 와. 그 사이 내가 본다.”

친구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카운터로 갔다.


“또 싸우냐, 책 찢어진다.”

“아니에요.”

“조용히 봐라. 라면은?”

“주세요.”

“계란은?”

“넣어주세요.”

“오늘은 비 오니까 두 개. 대신 국물 남기지 마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노른자가 국물 위에 떠 있었다.

젖은 양말 속 발끝이

서서히 감각을 되찾았다.


돌아오자 친구가 라면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너는 꼭… 국물까지 복수하듯 먹더라.”

“왜.”

“그냥. 인생이랑 싸우는 느낌?”


나는 대답 대신

그릇을 들고 마지막 국물을 넘겼다.


밖에 나서니 비가 멎어 있었다.

문방구 앞자리에 앉아

환타 뚜껑을 ‘뻥’ 하고 땄다.

병뚜껑은 바닥을 굴러

딱지처럼 튕겨 나갔다.

그날의 오백원은

만화 다섯 권과 라면 한 그릇,

그리고 현실을 잠시 멈출 수 있었던

내 편 같은 시간이었다.


책 속 한 대사가 오래 맴돌았다.


“힘들 땐, 잠깐 숨는 것도 괜찮아.”


만화방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학교도, 집도 아닌 그곳에서

하루를 버티고

조금씩 세상을 배우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시절의 오백원을 떠올리면

먼저 떠오르는 건—


그 순간은,
다시 가서 숨 쉬고 싶은 공간이었다.
마치 판타지 특급의 입장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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