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뱃지를 잃고, 마음을 얻다

by 시노

중학교 교실은 늘 텁텁한 분필 냄새로 가득했다.
칠판을 지울 때마다 흩날리던 하얀 가루,
창밖 운동장에서 울려 퍼지던 축구공 소리.
그 모든 것이 그 시절의 배경음악이었다.

시험이 끝나면 교실 앞 게시판에
성적 순위표가 붙었다.
1등부터 꼴등까지,
이름 석 자가 가감 없이 나열되었다.
우리 학교는 성적에 따라 명찰에 뱃지를 달았다.
95점 이상은 금, 85점 이상은 은,
그 아래는 일반.
우리는 그것을 금, 은, 똥뱃지라 불렀고
그 뱃지는 계급장처럼 작동했다.

나는 금뱃지를 달았다.
하지만 그게 꼭 자랑만은 아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반짝이는 금속을 달고 있으면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외갓집에 살던 나는 늘 “괜찮은 손자”여야 했다.
그 말은 곧 멀리 계신 엄마에게
“속 안 썩이는 아들”이라는 증명이었다.
전화기 너머 짧은 목소리 속에서
나는 완벽한 ‘금’이 되려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금뱃지를 잃었다.
옷장도 뒤지고, 가방도 털고,
책상 서랍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교무실에 말했더니
“다음 학기까지 기다려라”는 말뿐이었다.

나는 일반뱃지를 달게 되었다.
처음엔 쑥스러웠다.
친구들이 날 어떻게 볼지 몰라
괜히 작아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뱃지만 바뀌었을 뿐인데
교실 분위기가 달라졌다.
나는 더 많이 웃었고,
친구들이 먼저 다가왔다.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으로 불려 나갔고,
떡볶이집에서도 자리가 늘 가까웠다.

“야, 너 이제 우리랑 같은 똥뱃지야.”
장난처럼 던진 말이
왠지 따뜻하게 들렸다.
나는 알았다.
금뱃지가 친구들과의 사이에
미묘한 거리를 만들고 있었다는 걸.
뱃지의 무게를 내려놓으니
관계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다음 학기, 새 금뱃지를 받던 날.
친구들이 손뼉 쳤다.
“야, 다시 금이다! 그래도 우리랑 계속 놀아야 돼!”
그 기억은 오래도록 남았다.
그날의 금뱃지는
성적보다 더 단단한 마음을 달고 있었다.

저녁 바람이 불던 날,
마당에 서 계신 할머니가 말했다.
“이제 제법 의젓해졌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괜찮은 아들’이 되려 애쓰던 시간 속에서
나도 몰래,
‘괜찮은 친구’로 자라고 있었다고.

그날은,
금뱃지를 잃었지만
진짜 마음을 얻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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