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여름,
우리 동네엔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는 집이 드물었다.
그중 한 친구네 집은 단연 우리의 아지트였다.
아버지가 정미소를 하셔서 그런지
거실엔 반짝이는 은색 비디오가 놓여 있었고,
우린 그 앞에서 세상을 몰래 배웠다.
아니, 훔쳐봤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낮엔 운동장에서 뛰놀고,
해가 기울면 그 집으로 모였다.
손엔 새우깡, 쫀드기,
그리고 ‘썬키스트 오렌지’ 병 하나씩 들고.
VHS 테이프가 덜컹하고 들어가면
친구는 리모컨을 들고 말했다.
“조용히 해라. 이제 나온다.”
정적이 흘렀다.
비장함, 호기심,
그리고 아주 작은 두근거림이 섞인 공기.
화면 속 주윤발은 눈물조차 멋있었고,
장국영은 총을 들고도 슬퍼 보였다.
우린 그들의 걸음걸이, 담배 무는 법,
심지어 머리 모양까지 따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만화방 옆 비디오대여점 진열대 끝자락에서
눈을 붙잡는 테이프가 있었다.
『애마부인 2』
붉은 띠 대신,
우아한 여인의 실루엣과
‘19세 미만 관람불가’라는 문구가
우리에게 속삭였다.
“이 선을 넘으면 진짜 남자가 된다.”
“누가 간다?”
가위바위보. 내가 졌다.
손바닥은 축축했지만
입은 먼저 나갔다.
“삼촌이 빌려오라 해서요.”
사장님은 말없이 테이프를 내줬다.
그 눈빛이 묘하게 뜨거웠다.
불을 끄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삐—익, 휙—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흔들리더니 낯선 장면이 시작됐다.
우린 숨을 죽였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상상하던
‘멋진 어른의 세계’와는 달랐다.
엉성한 대사, 어색한 웃음,
낯설고 민망한 몸짓들.
누군가 피식 웃었고,
그 웃음은 새우깡 봉지 뒤로 번졌다.
결국 우린 얼굴을 가린 채
한참을 웃었다.
며칠 뒤, 반납 기한이 지나버렸다.
다시 모일 틈도 없었고,
나는 그걸 가방에 넣은 채 학교로 갔다.
쉬는 시간에 몰래 반납하려던 참이었다.
그날, 담임이 교실 문을 벌컥 열었다.
“가방검사한다! 질서 있게 앞으로 나와!”
피가 쏙 빠졌다.
가방 안의 검은 케이스가
심장처럼 쿵쿵 뛰고 있었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손끝이 얼음처럼 식었다.
“야, 너 왜 땀나냐?”
친구들이 킥킥거렸다.
나는 괜히 웃으며
“아냐, 더워서 그래.”라고 둘러댔다.
선생님 손이 내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케이스가 형광등 아래서 반짝였다.
제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애마부인 2』
교실은 숨을 삼킨 듯 조용해졌다.
뒤쪽에서 속삭임이 들려왔다.
“야, 저거 그거 아냐?”
“헐, 쟤 그거 봤대!”
여자애들이 나를 봤다.
놀람과 호기심,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비웃음이 섞인 눈빛.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선생님은 케이스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한마디 던졌다.
“2편이면… 1편도 본 거잖아?”
교실이 터졌다.
웃음, 야유, 박수.
나는 그대로 교무실로 끌려갔다.
반성문 제목은
‘사회적 규범을 어긴 점에 대하여’.
정작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라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만
열두 번쯤 반복했다.
그 뒤로 우린
다시는 그 시리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괜히 피식 웃고는 말았다.
이상하게도 그날의 창피함은
시간이 지나 웃음이 되어 돌아왔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 친구를 다시 만났을 때,
우린 그 얘기를 꺼내며 말했다.
“야, 그때 진짜 심장 멎는 줄 알았지.”
그리고 한참을 웃었다.
그 여름, 우리는
세상을 몰래 배우던 중이었다.
그리고 『애마부인 2』 하나가
우리의 순진한 경계선을
슬쩍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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