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처럼 음악처럼

by 시노

내 방 한켠엔
작고 둥근 스피커가 달린
카세트 플레이어가 있었다.
엄마가 생일 선물로 사준,
회색빛 플라스틱 몸통의 그 녀석은
버튼을 누를 때마다 ‘딸깍’ 소리를 내며
세상을 들려주곤 했다.


라디오 속 DJ의 말투,
낯선 팝송,
사연을 읽는 느릿한 목소리까지—
모든 게 어른스럽고 멀게 느껴졌지만
그건 내 하루의 배경음악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창문을 닫고
볼륨을 살짝 높였다.
이문세의〈소녀〉가 흐르면
나는 눈을 감고
그 노래 속 주인공이 되었다.
책상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드럼처럼 리듬을 맞췄고,
그 위에 멜로디가 조용히 얹혔다.

공테이프를 꺼내
녹음 버튼을 누르는 순간은
거의 의식에 가까웠다.
DJ 멘트를 피해
타이밍을 재고,
‘지금이다’ 싶을 때
멈칫 없이 눌렀다.

딸깍— 휙—
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는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이었다.
그렇게 모은 노래들은
나만의 비밀 정원이 되었다.


그 시절엔 음악이 멀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을 엽서에 담았다.
라디오 DJ에게 사연을 보내고,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꼭 틀어주세요”라 적던 그 손끝의 떨림.
엽서 한 장이 전파를 타고
세상 어딘가로 가닿던 순간,
우린 모두 같은 노래를 기다리는 청취자였다.

비틀즈의〈I Want To Hold Your Hand〉,
퀸의〈Love of My Life〉,
사이먼&가펑클의〈The Sound of Silence〉,
그리고 변진섭의〈새들처럼〉.

그 곡들을 들을 때면
마음이 이상하게 가라앉았다.
누군가 내 속 이야기를
대신 불러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말 대신
음악을 들었다.
기분이 좋을 땐 멜로디로,
답답할 땐 가사로 위로받았다.

주말 오후,
친구들이 자전거를 타러 나가던 시간.
나는 창가에 기대어
이어폰 한쪽만 끼고
햇살이 천천히 번지는 방 안을 바라봤다.

지금은 손끝 하나로
전 세계의 노래를 들을 수 있지만
그 시절엔 한 곡을 녹음하기 위해
숨을 죽이고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그 한 곡은
내 삶의 일부처럼 오래 남았다.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음악을 좋아했던 게 아니라
음악이 나를 좋아해 줬던 것 같다.
비 오는 날,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함께
그 소리는 지금도 선명하게 들린다.

어른이 되고 보니,
그 시절의 음악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세상과 나 사이의 번역기’였다.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마음을
조용히 흘려보내주던,
내 가장 오래된 친구의 언어였다.

그리고 그 친구는
늘 비처럼, 음악처럼
내 곁에 흘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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