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집 아래에서 붉게 익어갔다

by 시노

설날이 지나고 나면 마을은 다시 조용해졌다.

흥겨운 덕담도, 어른들의 웃음도,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설 다음 날이면 마치 한 편의 꿈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골목은 텅 비었고, 외딴 장독대 위엔 하얀 서리만 내려앉았다.

하지만 우리 집 벽에 걸린 달력 아래에는

진하게 그려진 동그라미가 하나 있었다.

‘정월 대보름.’

엄마가 빨간 잉크펜으로 조심스레 둘러놓은 숫자.

나는 그 동그라미를 손끝으로 쓱 문질러보며

며칠이고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아빠가 떠난 지는 오래였다.

그 빈자리는 이제 익숙한 풍경처럼

우리 집 구석에 조용히 머물렀다.

엄마는 새벽마다 짐을 이고 시장으로 나갔고,

밤늦게야 말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그 어깨에 기대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말은 언제나 목구멍 언저리에서 멎었다.


그래도 대보름날엔,

그 조용한 집 안에도 작은 온기가 스며들었다.

장독대 위로 낮 햇살이 포근히 내려앉았고,

엄마는 부엌에 찰밥 솥을 얹었다.

창문 틈새로 김이 피어오르면,

콩기름에 설탕을 살짝 볶는 구수한 냄새가

방 안 가득 번졌다.

그 냄새만으로도,

‘오늘은 명절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며칠 전부터 마을 어귀엔

솔가지와 짚단이 천천히 쌓여갔다.

달집 짓기는 어른들의 몫이었지만,

아이들에겐 그 주변을 맴도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일이었다.

나는 혼자 마른 가지 한 다발을 들고

달집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누구도 알아보지 않았지만,

그저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감정이,

그때는 꼭 필요했으니까.

정월 대보름 저녁.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마을 안엔

찰밥 짓는 냄새가 고소하게 퍼졌고,

어른들은 마당에 둘러앉아

“귀밝이술 한 잔 하시게!” 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아이들은 손에 깡통을 들고 하나둘 모였고,

마른 논둑을 따라 쥐불놀이가 시작되었다.


휘잉—

깡통 안 숯불은 어둠을 찢듯 돌아갔고,

그 불꽃은 눈발 녹은 들판 위에

붉은 원을 그리며 퍼졌다.

그 빛은 눈보다 먼저 마음을 데웠고,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속도를 올리며 깔깔 웃었다.

그 웃음 속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외로움이

조금씩 섞여 있었다.

나는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뒤동산 너머 나무 위,

어둠을 뚫고 천천히 떠오르는 둥근 달.

아마 그날이 내가 처음으로

달이 오르는 걸 눈으로 따라간 밤이었을 것이다.


“달 뜬다! 달!”

나는 목청껏 외쳤다.

그리고 달집에도 불이 붙었다.

마른 짚더미는 주저 없이 활활 타올랐고,

사람들의 얼굴은 붉게 익었다.

멀찍이서 그 불길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엄마, 감기 안 걸리게 해 주세요.

혼자 있어도, 너무 슬프지 않게 해 주세요…”


불빛은 일렁였고, 달은 머리 위로 환하게 떠올랐다.

그 시간은 마치 마음 깊은 곳을

조용히 한 바퀴 돌고 오는 듯했다.


그리고 그날 밤,

아이들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가방 안에 조용히 숨겨두었던 양은 그릇을 꺼내 들고

우리는 골목으로 모였다.


“우리, 각설이하러 가자!”


각설이놀이는

그저 얻기 위한 재미가 아니었다.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릴 때마다

그 안에서 나누어지는 마음,

그 따뜻한 웃음을 얻는 일이었다.


양은 그릇을 들고 조심히 대문을 두드리면

아주머니가 웃으며 찰밥 한 숟갈,

삶은 달걀 하나, 가끔은 전 한 조각을 담아주셨다.

아이들은 깔깔대며 웃었고,

고개를 조아려 감사 인사를 했다.


나는 그저—

누군가 문을 열어주는 그 순간이

참 좋았다.

그 안에선, 외롭지 않았다.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겨울밤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해졌다.


달빛 아래, 모닥불 옆.

그 작은 마을의 붉은 불빛은

내 마음 어딘가를 조용히 오래도록 데워주었다.

그 시절의 대보름은 단지 명절이 아니었다.

쉽게 꺼내지 못했던 아이의 마음 안에

작고도 단단한 온기를 새겨두는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는 몰랐다.

그 불빛이 내 안에서,

참 오랫동안 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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