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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와니 Aug 01. 2024

그놈의 감상과 연민

초단편소설

그렇게 바라던 새집으로 이사온 날 밤이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말이야."


아내가 팔을 뻗어 스탠드의 불을 끄자 남편이 입을 열었다. 밑도 끝도 없이 문득.


"그러니까 한 초등학교 4, 5학년쯤일 거야 아마도. 음, 그쯤일 거야. 그때 엄마가 내게 이자를 받아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어. 엄마에게 돈을 빌린 사람들이 꽤 있었거든. 그렇다고 엄마가 이자 놀이를 한 건 아니고, 급한 일이 있을 때면 엄마에게 찾아오는 동네 사람들이 있었지. 그럼 엄마는 무슨 차용증서 같은 것을 쓰고 빌려줬어.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이자를 받았지. 그런데 이자를 회수하는 일을 내게 맡긴 거야. 나는 그게 이자인 줄도 몰랐어. 그저 우리가 받아야할 돈이라고만 생각했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런 거. 그런데 말이야, 나는 그 일이 너무 하기가 싫었어. 이유는 내게 돈을 건네주던 그들의 표정 때문이었어. 음, 뭐랄까, 상대를 주저하게 만든다고 할까. 어쨌든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들 대부분은 우리집보다 가난하다는 거였어."


남편은 이 대목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한 번은 돈을 받으러 갔는데, 집에 불이 꺼진 채 깜깜한 거야. 아무도 없는 것 같았어. 아무도 없다기보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 적들이 쳐들어와서 온가족이 막 피난을 떠난 그런 집. 그래도 누가 있지나 않을까, 하고 마당에서 창문을 두드렸지. 집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봤더니, 마루 끝에서 웅크린 형상이 어렴풋이 보이는 거야. 근데, 그 형상은 실체라기보다 그림자에 가깝게 느껴졌어."


남편은 또 한 번 숨을 골랐다. 불을 껐을 때 보이지 않는 사물들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돌아보더라. 막 노년에 접어들던 여자로 한 동네 사니까 물론 안면이 있는 분이셨지. 여자의 한 손에는 그릇이 들려 있었고, 다른 손에는 숟가락이 들여 있었어. 식사 중이었나봐. 국 같은 데 밥만 말아서 먹고 있는 것 같았어. 혼자서. 찾아온 이유를 말했더니, 그냥 앉은 채 엉금엉금 기어서 내게 다가오는 거야. 그 그림자가. 그리고는 허리춤에서 꼬깃꼬깃 접힌 돈을 꺼내 내게 건네주는데...."


남편은 이 대목에서 또 한 번 말을 멈췄다.


"나는 이런 기분이 들더라. 내가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받는다기보다 절대 빼앗지 말아야할 것을 그 사람에게서 강제로 빼앗는 기분."


말을 마치고 남편은 옆에 누운 아내를 돌아봤다. 아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사람들 지금쯤 다 죽었겠지?”


남편이 물었다. 아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얘길 하는 거야?”


아내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그냥.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났어. 꽤 세월 많이 흐른 것 같아서.”


"또 그놈의 감상, 연민." 아내가 반대편으로 돌아누우며 말했다. "그거 전에 사진 얘기랑 똑같네. 역사책 같은 데에 실려 있는 병사들의 웃는 사진. 전쟁통에서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쩌고저쩌고!"


남편은 헛기침을 했다. 목에 괴어 있던 가래 같은 것이 빠져나왔는데 어쩔 수 없이 다시 삼켜야했다.

남편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 자기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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