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은 소설을 읽은 영향인지, 나에게는 아주 구체적인 미래를 상상하는 습관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지금 1 지망으로 넣은 대학에 붙는 순간을 상상한다. 조기발표가 나서, 시간은 평일 3교시다. 교실은 산만하다. 책상은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고, 저쪽에 있는 애들은 루미큐브를 하고, 아이돌 노랫소리가 들리고, 환호성과 날아갈 듯한 웃음이 들린다. 나는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쓰고 혼자 휴대폰을 보고 있다. 그때 담임선생님께 문자가 온다. 'OO대 조기발표 났어.' 나는 비명을 감추지 못한다. 그 소리를 들은 애들 몇 명이 내 자리로 오고,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아직도 못 외운 수험번호를 복사한다. 2년째 수업을 해주시는 수학 선생님께서도 은근한 관심을 보이신다. 어느새 애들이 꽤 몰린다. '미러링 해줘!', '아, 뭐래ㅠㅠ', '찍어도 됨?'같은 정신없는 대화 속 나는 외친다. '본다? 진짜 본다?' 마침내 결과는 힘이 쭉 빠질 만큼 깔끔하다. 최초합. 나보다 더 크게 소리 지르는 우리 반 애들을 보면서, 나는 안도한다. 울음이 환영받는 타이밍이다. 이것이 내가 상상하는 최고의 합격 순간이다.
어떨 때는 아주 디테일한 것을 상상하기도 한다. 혼자 서점에 갔는데 별로 친하지 않았던 중학교 동창을 딱 마주쳤을 때를 상상해 보자. 어색해서 뭉툭하게 다듬은 대화를 나눌 때 각자 손에 들고 있는 책, 서점 냄새,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 그때 몰래 키워내는 나만의 궁리를 혼자 상상한다. 이런 상상은 안도감과 함께 온다. 여러 시간과 행동반경과 내력들이 잘 접혀서 나만의 상자에 차곡차곡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이다. 나는 그 작은 세계에 군림한다. 지극히 편파적이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개인적인 세계이기에, 나는 더 짜릿함을 느낀다. 환상적인 인디밴드를 찾아냈을 때 '나만 알고 싶다..'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대개는 잠들기 전, 또는 수업시간에 풍선껌처럼 상상이 부푼다. 물론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면 그대로 터지지만... 입가에 붙은 껌을 다시 모으며 다음 시도를 다짐하곤 한다.
상상의 소재도 무척 다양하지만, 그중 가장 신비스러운 건 역시나 미래의 연애다. 기반으로 삼을 경험이 딱히 없어서다. 물론 그 비슷한 게 있기는 하지만... 이 시절의 연애는 분명히 어리다. 그걸 느끼고도 나를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어리다. 그러니까, 내가 상상하고 원하는 연애는 어느 정도 성숙한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자라서,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려서 무료한 것이면 안 된다. 내가 모르는 너의 세계가 아직도 많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고, 그럼에도 지금 눈을 맞추고 너에게로 달려가는 것. 너의 버릇을 하나 알게 될 때마다 씩 미소 짓고는 머릿속에 몇 번이고 다시 기록하는 것. 네가 연락을 늦게 본다고 짜증 내지는 않지만, 자꾸 나오는 웃음을 참은 채 삐진 척 너에게 장난치는 것. 네가 조급하게 변명을 늘어놓으면 그제야 웃음을 터뜨리고 너의 다정한 원망을 듣는 것. 방금 본 영화에 대해 열렬히 얘기하다가 아차, 하고 너의 감상을 물어보는 것, 너를 잊었던 게 미안해서 더 열렬히 들어주는 것.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연애다. 자랐지만 처음을 잊지 않는 것 말이다. 이렇게 서로의 시절을 간직하는 연애는 언제 꺼내어 봐도 질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미래의 남자친구는 어떤 모습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능성이 있다. 나는 흔히 말하는 이상형도 딱히 없고, 무심코 좋아하게 되면 그냥 끝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원하는 남자친구의 모습은 없다. 그래도 하나의 가능성만 여기서 슬쩍 풀어 보자면, 가끔씩 웃는 사람도 좋을 것 같다. 거기다 빈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왜냐하면, 그런 사람일수록 환한 웃음과 칭찬이 더욱 큰 울림을 갖고 오기 때문이다. 대부분 무표정한 사람이 어쩌다가 웃음을 터뜨리면 그건 빈틈없는 즐거움일 것이다. 다른 일로 시무룩한 내게, 온전히 내 편을 든 격려를 해 주면 그건 나에 대한 가득한 신뢰일 것이다. 물론 무표정이라서, 너무 솔직해서 싸우거나 삐지는 날이 더 많을 것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가끔씩 나를 강타하는 그 진심의 짜릿함 때문에, 나는 결국 그에게 항복하고, 다시 그를 사랑하고 말 것이다.
다 쓰고 보니 너무 로망인가, 판타지인가 싶어서 머쓱해진다. 그렇지만 난 원래 욕심쟁이다. 문득 발견한 회색 니트에 마음을 빼앗겨서 용돈을 모으고 있고, 내 앞에서 춤추는 글감이 너무 많아서 이 글에서 저 글로 자꾸 옮겨 다닌다. 어떤 가능성들은 자꾸 내게 귓속말을 건네고, 나는 그 속삭임을 절대로 무시하지 못한다. 듣고 싶은 음악이 너무 많아서 하나를 들으면서도 조바심이 난다. 그렇지만 욕심쟁이의 삶은 꽤 즐거운 듯하다. 빠듯한 용돈에, 다 못 읽었다는 아쉬움에 속상해도 또 새로운 목도리를 찾아서, 표지가 끝내주는 책을 찾아서 환호하는 게 욕심쟁이인 나다. 이런 나를 사랑할 사람은 누구일까. 그에겐 없는 나의 세계를 엿보면서 그는 어떤 생각을 할까? 그의 눈동자는 어떤 무늬일까. 우리는 어떤 산책을 하고, 무슨 음식을 함께 먹고, 왜 싸우고, 얼마 만에 화해하고, 어떻게 이별할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리 상상해도 그는 내 상상을 기분 좋게 배신하며 나타날 것이기에, 그냥 모른다고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기대한다. 나와 어색한 대화를 할, 서로의 취향을 외울, 손은 잡지 못하고 팔짱만 어정쩡하게 낄 그를, 그와 내가 함께 벌일 상상치도 못한 사건을, 좋아하는 것에서 더더 커져서 사랑이라는 간지럽고 벅찬 느낌을 받을 시간을, 언젠가 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어 만져볼 이별의 모양을. 그리고 나는 분명히, 나의 연인인 그에게 종종 엽서를 쓸 것이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난 널 기다려온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