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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 채우기 Aug 04. 2024

일정한 거리두기

"사랑하니까"라는 말이 남용될 때

입에 담기도 꺼림칙한 수위의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을 숱하게 접할 때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공통적으로 늘어놓는 핑곗거리가 겨우 ‘사랑하니까’ 란다. 그들이 정의하는 ‘사랑’의 모순성을 보자니 가탄스럽기가 그지없다. 과연 ‘사랑한다’의 명분이 폭력을 정당화시키는가?


내가 아닌 타인과 연인, 가족, 친구로서 연을 맺는다는 것은 숭고와 기적의 영역임이 자명하다. 형성한 관계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건강에 치명적 요인인 ‘고독함’을 대폭 덜어주며, 나아가 삶의 큰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즉, 우리 삶을 다채롭게 만드는데 기여하는 상당히 고마운 존재다. 사용하는 언어부터가 ‘내’ 자식, ‘내’ 남자친구, ‘우리’ 엄마인 것을 보면 쉬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이와 같이 가까운 존재인만큼 기대를 하기 마련이고, 기대감이 존재하니 자신의 ‘주관적 기준’에 미처 부합하지 못했을 때 실망감도 수반되는 법이다. 이는 합당하고 필연적인 이치인듯 하다. 상대적으로 덜 친밀한 사람보다 친밀한 사람에게 더욱 엄격한 기준이 부여되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다.


그렇다면 나와 친밀한 사람은 나의 도덕적 판단 기준에 응당 부합해야 하며, 그 기준에서 한참 벗어난 행동을 했을 때에는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가? ‘폭력’이라 일컬으면 누구나 거부감이 들 수 있기에 질문을 조금 변형해보겠다. 나의 기대에 보다 일치시킬 수 있도록 약간의 집착, 구속, 비난과 같은 소위 타인을 ‘통제’하는 사적 제재를 가해도 되는가? 이를 합당하다고 간주하는 관점에 저변에는 사랑하기에 자신의 만족감을 충족시켜야 하며, 자신의 의지로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통제 가능하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필자는 해당 관점에 크게 두 가지의 오류가 존재한다고 역설하려 한다.


첫 번째,

 해당 사고방식은 사랑의 원론적 개념에 위배된다. 사랑이란 ‘대가에 대한 기대를 결여한 채로 상대방의 더 나은 삶을 염원하는 숭고한 행위’라고 피력한 바 있다. 여기서 핵심은 ‘기대를 결여하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사랑은 희생적인 면모를 띄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구실로 내 만족감 및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 했다고 타인을 통제하는 행위는 사랑에 대한 개념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이다. 즉, 사랑을 가장한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 

연인, 가족과 같은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것은 내가 그들을 ‘소유’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물며 ‘내가 나 자신을 소유할 수 있는가?’ 에 대한 관점에도 이견이 분분하다. 타인을 소유하는 것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노예제도의 실행도 부당하게 보면 안 된다. 이번에는 타인을 소유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전제 하에 통제로 인한 변화의 가능성을 거론해보자. 타인에게 내가 지속적으로 원하는 바를 요구하고 바랐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회고해봐라. 변화했는가? 과정이 순탄했는가? 더욱이 내가 바꾸고 싶은 나 자신의 고질적인 습관이나 행동, 성격 등을 바꾸는 것조차 어려운 법인데 내가 무슨 권리로 타인에게 무얼 바라는가?


결론적으로 인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엄연한 착각이고, 과오다. 이러한 과오를 범하는 것으로부터 폭력성이 비롯된다고 본다. 타인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초연히 수용한다면, 세상이 한결 안온해질 것이다. 그에 따라 타인을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존중할 수 있을 것이며, 타인에 대한 존경심 또한 온전히 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타인이 내 마음대로 안 될때 짜증이나 질투심 따위의 감정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주문처럼 되뇌는 말이 있다. “내가 소유한 게 아니야. 정신차려.

일정한 거리를 두기 위해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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