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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

적절한 자극이 필요한 순간

조언이 필요한 거였을까?

아니면 그저 공감이 필요했던 걸까?


상대가  나에게만 집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때가 있었다. 이젠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우치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나도 상대에게 그렇게 해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에너지가 한정적이다...)


진짜 그에게 필요한 건 그가 진심을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상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해도 그에게 관심이 필요할 때 주지 못할 수도 있고, 진심 어린 위로가 필요할 때 조언만 해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사실 나만해도 힘들었던 순간을 생각해보면 상황에 따라 조언, 위로, 관심, 공감 중 필요한 것의 비중이 달랐던 것 같다.


나는 상대에게 직설적으로 조언을 해줄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내가 진짜 아끼는 사람의 징표가 조언이다. 대개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일단 누군가에게 내가 관심을 가지는 건 그와 나 사이에 끈이 생겼다는 거다.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는 관심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늘 기분 좋은 칭찬과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은 실제로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닐 확률이 높다.

    

물론 아직 잘 모르는 사이라면 상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기가 조심스럽다. 혹 상대가 나에게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하는 어떤 표현은 의도와는 다르게 왜곡해서 전해질 수도 있다.


성장에는 자극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보니 나와 관련이 있는, 특히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는 자극을 주는 걸 좋아한다. (업병일 수도 있다.)


요즘은 나에게도 필요한 자극을 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달콤한 칭찬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자신감이 있고, 대개는 나를 믿는 편이지만

조차도 나를 모를 때가 종종 있다.


다른 이가 나를 의심하지 않는 순간에도 나는 나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 위의 든 사람들이 내가 맞다고 할 때가 나를 가장 의심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한 멘토분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과거의 실수를 줄이고 성장을 원하는 나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지속적인 자극과 감시가 아닐까.


요즘 나에게도 매니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다.



어제의 나는 자신이 알고 있던 과거의 문법에 자신을 감금해 그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바로 이기심이다. 니체는 인생의 모험을 회피하고 안정과 편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을 "마지막 사람(Last Man)"이라고 불렀다.
그는 인간의 최선을 상징하는 초인을 찬양했다. 초인은 매일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용맹스럽게 탈출하는 '엑스터시'를 연습하고,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확장하는 자다.

배철현, <정적>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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