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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하늘 Aug 10. 2024

프랑스의 창살 없는 감옥

무상하게 흐르는 한 달재의 밤

 


 

 그렇게 늦은 밤도 아닌데 어느새 거리엔 빛이 줄어들었다. 시청을 비추는 파란 보랏빛 조명에 의지해 걸을 정도였으니까. 노트르담 정류장에서 내려서 골목골목을 내리 걷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해, 할 때쯤 나타나는 모퉁이를 돌면 넓은 테라스에 의자와 테이블을 잔뜩 꺼내 둔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이미 몇 번이나 와 본 것처럼 자리를 골라 의자를 내 몸에 바짝 댕겨 앉았다. 그러고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종업원을 눈으로 좇으며 기다렸지. 이곳과 어울려 보였으면 했다. 싸늘한 바람이 솔솔 부는 게 겨울이 보낸 서찰처럼 느껴졌다. 아, 겨울이구나.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겨울의 정점에 서서 수족냉증을 가진 것을 한탄히 여기며 발을 주무르고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종업원은 도대체 나에게 언제쯤 오는 것일까.


 수억만의 찰나가 지나고 살바도르 달리처럼 수염을 옆으로 길게 기른 빨간 머리의 종업원이 내게 근접해 왔다.  무엇을 마실래, 물어오는 그에 나는 'Un chocolat Chaud(핫초코 한 잔)'를 달라고 했다. 해가 뉘엿뉘엿 소음과 긴 밤을 버텨내려갔으니 커피를 마시면 잠에 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지갑을 뒤져 3유로를 겨우 만들어 그에게 건넸다. 그는 'Merci beaucoup(매우 감사합니다)'라 말하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보랏빛의 시청, 빈티지 타일이 잔뜩 깔린 광장과 그 위에 발 올린 카페,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어 대는 사람들. 가져온 책을 꺼내 읽을까, 하다가 다이어리를 펼쳐 한 달 전으로 시간여행을 했다.






 

 인천에서 아침 비행기를 타고 13시간을 횡단해 프랑스에 도착했다. 혼자 비행기를 탄 것도 이날이 처음이었다. 가는 내내 해가 떠 있어서 시차 적응은 어렵지 않겠구나, 다행이구나 했던 것이 생각났다. 한국 시간으로 9시에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프랑스는 16시였으니. 그저 오전에서 오후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창밖으로 토독토독 빗소리가 들려왔다. 몽골에서는 비가 오면 귀한 손님이 오는 거라던 말이 오버랩됐다. 캐리어 깊숙이 처박은 우산이 생각났지만, 꺼내기 위해 캐리어를 전부 뒤집어 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럼 그냥 젖고 말자. 나는 내 몸보다 큰 23kg 캐리어 2개를 이고 10kg쯤 되는 배낭을 등딱지처럼 지고 공항철도를 타러 한 층을 내려갔다.  


 잘 도착했겠다, 수화물도 잘 찾았겠다. 나에게 남은 것은 미리 예매해 둔 기차를 잘 찾아 푸아티에 역에 내리는 것. 기차 번호를 찾으려고 전광판을 들여다보는데, 뭐, 이거 알아볼 수가 있어야지. 기차 도착과 출발을 알리는 전광판엔 온통 프랑스어가 적혀 있었다. 그림과 다를 게 없었다. 암만 봐도 내가 타야 할 기차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데, 웬 백발의 할머니께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가, 어디 가니?' 프랑스어 자격시험도 으레 자격증 시험처럼 세부적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나는 듣기 파트엔 완전히 잼병이었다. 눈치로나마 할머니께서 하시는 말을 이해했고, 나는 핸드폰을 내밀어 기차표를 보여 드렸다. 할머니께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뭐라고 말씀하시더니, 내가 못 알아듣는 표정을 보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손으로 엑스 자를 그리시며 기차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을 알리셨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때 할머니께서 'Pas encore, pas encore(아직이야, 아직)'라고 하셨던 것 같다. 알고 보니 기차가 지연돼 2시간 뒤에나 푸아티에로 출발할 수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Poitiers(푸아티에)에서 공부를 한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Il n'y a rien là!(거기 아무것도 없잖아!)' 내지는 그 작은 곳엔 무엇을 하러 가는지를 꼭 되묻는다. 젊은이에겐 돌아오지 않을 청춘을 낭비하는 곳이고 은퇴 후 노년기를 보내기엔 아주 적합한 곳이 틀림없었다. 젊음의 시기를 강렬하고 뜨겁게, 정신없이 보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창살 없는 감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푸아티에를 향하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학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클락션 소리에 밤낮없이 시끄럽고 자로 대고 반듯이 세운 듯한 고층빌딩이 많은 도시보다 소박하고 정감 있는, 촌스러운 시골을 더 좋아해서 다행이다.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올라가는지 훤히 다 알고, 옆집 피에르는 어쨌다더라, 비밀 없어 성가시고 극성맞다 할지라도.


  몸 담은 지 한 달 만에 마을 이곳저곳에 무엇이 있는지 다 파악될 정도라는 말을 먼저 할 것을 그랬다. 그래도 나는 이 마을이 좋다. 대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그렇게 한참을 상념에 사로잡혀 잠깐 시간여행자였던 나를 너무나도 현실의 나로 되돌려 놓았던 것은 아까 그 살바도르 달리 종업원이었다. 그는 3유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의 핫초코 한 잔을 건넸다. 다시 말하지만 한 잔이었다. 'Bonne soirée(좋은 저녁 되세요)'라는 말과 함께.


 앉은자리 그대로 시청과 그 맞은편에 세워진 작은 영화관, 프랑스 빈티지 타일을 열심히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겨울공기에 금방 방식을 핫초코를 홀짝였다.


 프랑스 도착 한 달째의 밤이 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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