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5. 꿈.
5. 네가 왜 과학관을 하는데?
첫번째로, 나는 내가 새로운 과학 사실을 발견해내는 것보다, 남들이 발견한 과학 사실을 습득하는 게 즐거웠다.
지금도 나는 논문 읽기가 논문 쓰기보다 좋다. 매일매일 논문 읽기만 하면 좋겠다. 연구를 하면서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하기도 했지만, 논문 쓰기를 하면서 나의 작문에 성취를 이루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가장 즐거운 건 논문 읽기였다. 책임과 노력없는 쾌락이랄까. 나는 100만개 샘플 노가다를 하지도 않았고, 정교한 논리 회로 설계를 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나 흥미로운 과학적 사실 발견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다니!
그래서 나는 논문을 이야기하는 세미나가 너무 좋다. 우선, 박사님들이 자신들의 연구를 설명하는 세미나. 우리 학교에는 금요일 오전마다 초청 박사님들이 연구 소개를 하는데, 나는 거기에 거의 매주 참석한다. 당연히도 내가 하고 있는 연구와 전혀 상관없는 연구가 70% 이상이다. 나와 상관없는 분야의 세미나를 들으면 신입생이 된 것처럼, 다 너무 재미있어 보인다. 다음, 내가 다른 사람의 논문을 설명하는 세미나. 우리 연구실은 3달에 1번씩은 논문 발표를 한다. 공부하면서 읽은 논문 중에서 소개하고 싶은 논문을 발표한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논문이 많다보니까, 나는 매번 여러 논문 중에서 뭘 발표해야 하나... 행복한 고민에 빠지고는 한다. 마지막으로는 내가 내 논문을 설명하는 세미나가 있는데... 이건 재미 없다. 나의 연구 논문 발표에는 나의 지난한 고생이 녹아있고, 빌어먹을 리뷰어들과 내 졸업을 막는 심사단을 뚫어야 하는 부담감이 나를 짓누른다. 그런 부담이 없다면 재미지게 발표할 수 있는데, 대학원생의 신분이니 이 발표는 재미가 없다.
한 때는 Cell, Nature, Science 등 세계적 과학잡지의 편집자가 되고 싶었다. 현직 편집자에게 물어보니까, 논문을 잘 읽고 많이 읽고 즐겁게 읽는 게 편집자의 제1덕목이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편집자의 제1덕목은 이미 충족했다. 대학원 중간에는 Nature 편집자가 되기 위한 포트폴리오도 잠깐 작성하고는 했다. 하지만 영어 실력도 부족했고, 무엇보다도 지도 교수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편집자로의 길은 더 시도할 수 없었다.
나는 미술 전시에 종종 다니면서 큐레이션에 관심이 갔다. 미술관에서 미술작품 그 하나 하나에 담긴 의미를 감상하고 이해하는 일도 흥미로웠고, 미술관이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한 데 모아서 전시를 기획하는 일은 더 흥미로웠다. 미술관은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전시할 작품들을 고르고, 전시관 하나를 특정한 테마로 세팅하여, 일련의 스토리를 따라서 그 작품들을 배치하고 편집한다. 전반적인 흐름을 위해서는 당연히 작품 하나하나의 의미를 잘 감상하고 이해해야 한다. 큐레이션은 개별 작품의 의미를 최대한 발휘시키면서, 전시의 이야기도 완결지어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최근에 아모레 미술관의 브래드포드 전시에서도 작품 큐레이션과 배치가 잘 된 것 같았다. 브래드포드 전시는 게이, 흑인 등 소수자로서 차별받으며 살아온 작가가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작품들을 촤르르 보여주었다. 작품들은 대부분 불타고, 어둡고, 찢겨지고, 눌러붙은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마지막 전시실에서는 소년이 거리를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여주는 영상으로 전시가 끝이 났다. 그 거리는 쓰레기도 굴러다니고, 아스팔트도 툭하니 퍼질러 있었다. 소년은 그 거리를 산뜻한 기분으로, 마치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처럼 걸어간다. 뒷모습만 보고 있는데도 소년의 밝은 얼굴이 그려진다. 전시의 맨 마지막에 이 작품을 배치한 이유는 확실히 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나아간다"라는 의미를 주고 싶었구나.
두번째로, 나는 3차원 공간과 구조에 대해 큰 관심이 있다.
내가 지금껏 읽은 책 중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 단 한 권을 꼽으라면 바로 "총, 균, 쇠"이다. "총, 균, 쇠"의 핵심 주장은 "지구의 지리적 특징에 의해서 인류가 각기 다른 속도로 발전했다."이다. 이 책을 읽고, 인간은 지리와 지형에서 큰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크게 깨달았다. 현대의 국제 정세도 지정학의 균형에 의해서 돌아간다고 느낀다. 이를 테면 중국은 두 개의 대형 강에 의해서 하나의 제국으로 나라를 통치하게 되었다. 또한 최근 들어서는 지리적 이유로 트럼프는 북극항로를 확보하기 위해 그린란드를 얻어내고 싶었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부동항을 얻고 싶었다. 그러고는 지리의 힘, 공간이 만든 공간, 등의 책을 읽으면서 지리와 공간이 인간의 행동과 사고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졌다.
미시적 수준의 3차원 공간이라고 하면, 내가 공부하고 있는 구조생물학을 빼놓을 수 없다. 구조생물학은 단백질의 3차원 구조가 어떻게 그 단백질의 기능을 유발하는지를 알아내는 학문이다. 예를 들어, 단백질이 한쪽 끝부터 반대쪽 끝까지 뻣뻣하게 뻗어있는, 막대기같은 3차원적 구조를 가진다고 하자. 그 단백질은 막대기 또는 기다란 무언가의 기능을 할 가능성이 높고, 막대기같은 형태의 튜뷸린 단백질은 세포 내의 여러 분자들이 이동하는 길의 역할을 하거나, 철근처럼 세포의 골격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각각의 단백질들은 여러 물질을 한데 모아주기도 하고, 세포 안 팎으로 물질을 수송하기도 하는 등의 다양한 일을 한다. 그 단백질들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언가를 담는 바구니같은 빈 공간이 있고, 물질 수송을 위한 통로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단백질의 3차원 공간적 구조가 망가지면 당연하게도 질병이 발생한다. 암이 발생하는 등의 표현형이 나타나거나, 산소를 운반시키는 등의 생물학적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은 근본적으로 단백질 3차원 구조 수준에서 설명된다.
나는 거시와 미시의 중간 단계인, 내 생활 공간에도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 내가 일하고 쉬고 노는 공간이 실제로 내가 제일 자주 보는 공간 스케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한민국, 서울에 살고 있지만, 그리고 단백질로 구성된 유기체이지만, 내가 체감하는 나는 오피스 데스크에서 앉아있고, 자취방 침대에 누워있고, 실험실에서 왔다갔다 한다. 그 공간들이 어떤지 계속 유의하며 살펴보고, 내가 원하는 쪽으로 공간을 수정한다. 침대에서는 책장으로 나의 시야를 막아놓음으로써 고요와 몰입을 가능케 한다. 오피스 옆 창문을 블라인드로 가리지 않아, 정원 공간을 보면서 마음을 편하게 한다. 어떻게 해야 좋은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을지 매일 생각하다보니, 당연히 인테리어에도 관심이 있다. 나의 유튜브 알고리즘의 한 축은 자취방, 인테리어, 건축시공이 차지하고 있다. 그 연장선으로 멋진 공간과 느좋 카페를 둘러보는 걸 정말 좋아한다.
미술관은 느좋 공간의 끝판왕이다. 나는 미술관에서 작품만큼이나, 미술관 공간 그 자체에 관심이 많다. 이 공간은 어디서 빛을 쏘는 건지, 빛은 왜 하필 이정도 색감과 밝기를 세팅했는지, 작품 배치를 이정도 높이와 간격을 두고 한 이유는 무엇인지, 이 넓은 공간을 비워둔 의도는 무엇인지, 왜 이 작품은 전시관이 아니라 통로에 배치했는지. 이런 점들이 너무 신기하다. 예를 들어, 최근에 방문했던 서울시립미술관은 강령과 귀신에 대한 전시를 했다. 그 전시는 전시관과 전시관 사이의 복도를 검은색 천으로 둘러싸서, 현실에서 벗어나 귀신들의 공간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주었다.
세번째로, 오프라인 공간 운영은 AI에 대체되지 않을 것이라 예측한다.
요즘 들어 AI에 대체되지 않는 직업/일이 무엇일지를 자주 고민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디지털 세계의 컨텐츠는 다 대체될 것 같다. 인터넷과 컴퓨터로 접할 수 있는 텍스트(논문, 소설, 자기계발서, 지식서적 ...), 영상(유튜브, 영화, 드라마 ...), 노래와 그림 등등의 컨텐츠는 모두 대체될 것 같다. 심지어 감정적인 면을 다루는 상담사나 애인의 역할 또한 AI가 대체하고 있다. 영화 Her 의 인공지능 여자친구 사만다는 더 이상 마냥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개인적인 예측으로는, AI가 할 수 없는 일은 물질적인 곳에 있다고 본다. 인공지능 여자친구 사만다가 있다고 한들, 사만다와는 손을 잡을 수 없고, 키스를 할 수 없다. 사만다의 온기를 (핸드폰 발열을 온기라고 한다면 할 말 없다) 느낄 수 없고, 사만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 음성, 텍스트, 영상으로 연락을 한다는 면에서 인공지능 애인은 롱디 커플과 비슷하다. 다만 롱디 커플은 언젠가 다시 물리적으로 만날 것을 전제로 하지만, 인공지능 애인은 절대로 만날 수 없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은 물질적인 감각에서 느끼는 마음의 동요에서 벗어날 수 없다.
AI가 발전할수록 오프라인과 아날로그 경험이 더 소중해질 것이다. 20세기 이전에는 음악을 콘서트장에서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LP, 테이프, CD, MP3, 스트리밍 기술이 발전했고, 현재는 일상생활에서도 매우 간편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AI시대에는 음악 제작 인공지능으로 디지털 음원을 꽤나 쉽게 생산하고 유포할 수 있게 되었다. 유튜브에 업로드된 AI시티팝을 들으면 버블경제 시대의 일본 분위기를 쉽게 느낄 수 있다. 디지털 AI 음원으로 감동을 받는 경험이 너무 흔해지고 쉬워지고 있다. 그런데 우습게도 사람들은 흔해지면 또 금방 싫증을 내고, 감동이 약해진다. 그래서 AI의 흐름에 역행하는 흐름도 생겨나고 있다. 무선이어폰으로 느끼는 감동과 돌비사운드로 잘 세팅된 LP 음악감상실에서 느끼는 감동은 차원이 다르다.그리고 음악감상실에서 느끼는 감동과 오케스트라 공연장에서 느끼는 감동은 또 한 번 차원이 달라진다. 공연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폭신한 의자, 흡음제로 가득 채운 희안한 나무 냄새, 연주자들의 또각거리는 입장 발소리, 첫 음이 연주되기 전의 적막한 분위기, 공연장이 치밀하게 계산한 리버브, 연주가 끝난 후에 내 두 손으로 치는 박수. 이런 것들. 오감을 다 사용해서 느끼는 경험은 대체되지 않는다. 나의 직접 경험은 오래토록 나에게 소중하게 남는다.
그래서 나는 오프라인 경험을 제공하고 싶다. 영상이나 텍스트화 되어 디지털로 편하게 볼 수 있는 컨텐츠가 아니라, 사람들이 불편하게 직접 와서 질감과 분위기를 느끼는 경험을 만들고 싶다. 집에서 편하게 유튜브로 반가사유상 영상을 볼 수 있지만, 굳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방문해서 그 공간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인스타로 힉스커피의 화성 분위기의 방이나, 카페쿠아의 과학소품으로 장식된 벽면을 볼 수도 있지만, 굳이 그 공간에 가면 느낌이 또 다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 공간에 모이는 사람들끼리도 네트워킹하면 좋겠다. AI 시대에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아도 되지만, 직접 만났을 때 느끼는 행복은 더 커질 것이다.
6. 진심이다.
과학문화공간을 만들겠다는 꿈은 진심이다. 진심의 정도는 내가 지금껏 작성한 모든 글 중에서 이 주제의 분량이 가장 길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과학커뮤니케이션을 본격적으로 했던 2018년 즈음부터 나는 어떤 과학소통을 할지 꽤 오랫동안 구상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의 교집합을 생각해보니 이런 목표가 나왔다.
김풍 아저씨의 망한 옾카페를 소재로 침착맨이 놀려먹는 꼴을 수백번이나 보고서도 자영업자가 되겠다는 거냐?! 김풍 아저씨가 카페하지 말라는 충고를 수백번을 했는데도 하겠다고? 심지어 그냥 카페에서 커피를 파는 것도 아니고 과학을 팔겠다니. 미쳤구만 미쳤어. 돈을 벌 생각이 없구나?!
그렇다. 돈을 벌 생각이 없다.
돈은 젊은 시절의 회사 월급과 재테크로 열심히 증식시켜서 벌어야 한다. 과학공간을 운영하면서 그간 벌었던 돈을 다 까먹을 작정이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열심히 돈 써가면서 운영할 심산이다.
인간은 언젠가 한 번 씩은 남이 시키는 일이 아니라,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본다. 그 일이 꼭 돈을 버는 자영업이 아니고, 그저 취미에서 시작한 일이더라도 말이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 일에서 성취감을 느낄 때 행복한 것 같다. 나에게는 그 일이 과학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언젠가 이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현재는 느좋 공간 레퍼런스를 쌓고, 과학문화 시장을 관심있게 바라보고, 오브제와 취향을 수집하고, 과학공부는 당연히 놓치지 않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을 많이 버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누군가 내 아이디어를 훔쳐서, 나 대신에 이 과학공간을 만들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다. 나는 그냥 그 공간에서 즐거움을 누리기만 하고, 금전과 업무와 책임은 그 사람이 모두 지는 것이다. ㅋㅋㅋㅋ 하지만 낭만 뿐이라서 돈이 되지 않는, 이 멍청한 과학공간을 할 다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내가 해야지.
지금까지는 내가 만들고 싶은 과학공간의 방향성/이념/이유를 다뤘다면 다음 글에서는 과학공간을 어떻게 실현시킬지를 다뤄보고자 한다. (다음 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