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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gsungg labnote Aug 24. 2024

너는 내 안에 굳어져 내가 되었다 <어떤 물질의 사랑>

★★★★★


너는 내 안에 굳어져 내가 되었다. - <어떤 물질의 사랑> 독후감


천 개의 파랑. 천선란 작가의 SF단편소설집. 천선란 작가의 사랑 이야기라는 기대를 가지고 소설집을 펼쳤다. 하지만 구성된 단편들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살짝 기대감이 낮아진 그 상황에 소설집과 동명의 단편을 읽었다. 그래! 이게 천선란의 사랑이구나! 단편집 자체는 크게 추천하지 않지만 (★★) 이 단편 하나만 본다면 굉장히 추천합니다! ★★★★★


주인공 라현은 배꼽이 없었다. 그리고 생식기가 없어, 남자 또는 여자로 구분할 수 없었다. 엄마는 그냥 라현을 딸이라고 불렀다. 라현이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남자 반장을 좋아했고, 라현은 점차 남자로 모습이 변했다. 여자중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선배를 좋아했고, 라현은 점차 여자로 모습이 변했다. 성인이 된 라현은 어느 날 몸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남자를 만난다.




'원래 그런 건 없어.' 당연한 것도 없고. 그러니까 애들이 당연하다거나 네가 이상한 거라고 하는 거 다 듣지마.


라현은 배꼽이 없었다. 라현의 엄마는 라현에게 배꼽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라현은 그냥 그렇게 태어났다. 사실 모두는 이상하게 태어난다. 나는 왼쪽 시력이 오른쪽에 비해서 너무 나쁘고. 멘탈은 남들에 비해서 특히나 잘 깨지는 유리멘탈이다. 모두는 언뜻 평범한 것 같지만서도 하나씩 이상한 점이 있다.


그 이상한 점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왜 저런대." 가 아니라 "저 사람은 저렇구나." 라고 수용할 수 있어야 했다. 저렇게 되어있는 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해야지. "너가 이상하니까 바껴야 해."라고 하면 안 된다. 그리고 바뀔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라현에게 갑자기 배꼽을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온전한 상대방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게 아닐까.




내가 지나쳤던 모든 사람과 사랑이, 실은 지나친 게 아니라 그렇게 내 안에 굳어져 내가 되었다는 것을 나는 라오에게 말하며 깨달았다.



라현은 외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갔다. SF적으로 구현된 라현 뿐만 아닌 모든 사람은 사랑하면서 상대방을 닮는다. 상대방이 특정한 스타일의 옷을 주로 입으면 나도 어느샌가 그런 스타일을 입고 있다. 특정한 말투, 제스처, 분위기가 서로 닮는다.


상대방을 사랑하면 외형적으로 닮을 뿐 아니라 마인드까지 닮아간다. A 덕분에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었고. B 덕분에 가볍게 도전하고픈 의지가 생겼고. C 덕분에 홀로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성적으로, 인간적으로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멀어지게 되었어도 그들은 나에게 고마운 마인드를 남겨주고 갔다.


나를 지나쳤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물들이고 나를 구성했다. 반대로 나도 상대방을 구성하는 한 사람이겠지. 나는 그들을 어떤 색으로 물들인 사람이었을까.




라현아. 끊임없이 사랑을 해. 꼭 불타오르는 사랑이 아니어도 돼. 함께 있을 때 편안한 존재를 만나. 그 사람이 우주를 가로질러서라도 너를 찾아올 사랑이니까.



함께 있을 때 편안한 존재. 언젠가 나타나긴 하겠지. 하지만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까지 기다리만 할 수는 없다.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시도 횟수를 늘리고 끊임없이 사랑을 해야 한다. 온전하게 그 사람을 사랑해야지. 서서히 상대방과 서로 물들어야지. 은은한 사랑을 하는 사람과 함께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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