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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gsungg labnote Aug 29. 2024

시간이 흘러 더 나은 존재가 될거야. <숨>

★★★★


<Exhalation 숨>은 9편의 중,단편 SF로 이뤄진 테드 창의 소설집이다. 테드 창은 영화 컨택트(영어로는 Arrival)의 원작  소설가로 유명하고, SF 분야에서 상도 많이 받은 작가이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이 다 너무 괜찮은 작품이지만 인상적이었던 2개 작품에 대해서만 독후감을 작성해보고자 한다. (책 읽은지 거의 1년은 된 거 같은데 밀리고 밀려서 이제서야 독후감을 쓰고 있다.)




The Lifecycle of software objects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디지언트'라는 온라인 세계의 애완동물이 있다. 이 애완동물은 유전자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실제 애완동물처럼 보살필 수 있는 객체들이다. 주인공 애나는 마르코와 폴로라는 디지언트를 사랑으로 훈련시킨다. 디지언트를 훈련시킬수록 이 디지언트에게 실제 세계의 애완동물만큼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로 나아가는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디지언트 서버를 유지보수하는 데에 문제도 생긴다. 이외에도 디지언트를 키우는 데 겪는 여러 문제들을 헤쳐나가는 마르코와 폴로, 그리고 애나의 이야기이다.


Software Development Life Cycle 에서 비롯된 제목 같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위해 문제를 디자인하고 코딩하고 배포하고. 배포된 소프트웨어에서 문제가 나오면 다시 디자인하고... 이런 시스템이라고 대충 이해하고 있다. 이 책은 겉으로 보면 메타버스 애완동물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메타버스 개발에 직접 의견을 제시하고, 다른 곳으로 서버를 옮기고, 메타버스 바깥으로 객체를 구현하는 등, 소프트웨어를 열심히 유지 보수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읽어보면 이 소설은 사랑하는 대상을 얼만큼 어떤 방식으로 존중해야하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반려견을 키우던 유튜버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강아지가 말을 한 마디만 할 수 있다면, '아파' 라는 말을 해주면 좋겠다." 이 소설에서는 그 소원대로 간단한 대화를 가르친다. 그리고 점점 더 그 대상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들이 구체화된다.


어떤 디지언트는 나를 하나의 법인체로 고려해서 나를 자유롭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 다른 디지언트는 나는 ~를 하면서라도 내 생존과 경제적인 활동을 하고싶다고 요청하기도 하고. 또 다른 디지언트는 계속 보호자와 같이 살고 싶다고 요청하기도 한다. 보호자의 시선에서 사회통념적으로 맞지 않는 일을 디지언트가 하고싶다고 했을 때, 그 디지언트를 컨트롤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해도 될까? 그리고 이 일이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에나 올바르거나 틀린 일이지, 디지언트의 입장에서는 별 문제되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


디지언트를 사랑하는만큼 이 디지언트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건 모든 보호자가 똑같다. 다만 그 마음을 얼만큼, 어떻게 표현할지가 관건이다. 자칫 잘못하면 집착과 구속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르게 하면 방임과 무관심이 되기도 하는, 상대방을 향한 그 관심과 기대를 어떻게 조절해야할 지가 인생의 어려운 줄타기다.



잭스를 키우면서 애나가 얻은 교훈이 있다면,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에서 이십 년 동안 살며 습득한 상식을 가르치고 싶다면, 그 일에 이십 년을 들여야 한다.
이에 상응하는 발견적 논리를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조합할 방도는 없다.
경험은 알고리즘적으로 압축할 수 없다.



메타버스 안에 있는 디지언트에게 알파벳을 가르치고 싶다면 알파벳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그 프로그램으로 디지언트를 학습시키면 된다. 빨리 가르치고 싶다면 메타버스 속 시간을 빨리 돌리는 법이 있을 수도 있다. 그 방식을 사용하면 디지언트 입장에서는 1년이나 흘렀지만, 실제로 바깥 세상에서는 1일 정도만 시간이 흐른다. 디지언트에게 있어, 디지언트와 보호자 사이의 유대감은 1년간 만나지 못한 만큼 감소할 것이다. 디지언트가 아무런 감정을 못 느끼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유대감, 사랑, 반가움, 아쉬움 등의 모든 감정을 느끼는 AI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디지언트에 나타나는 이 감정적인 현상을 에러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기능이기도 하다. 물론  사람이 감정을 가지기 때문에 그르치는 일도 많지만, 성공해내는 일도 많기 때문에 사람에게도 감정은 에러이자 기능이다. 감정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의문을 가지면서 놀라웠던 점이었다. "디지언트의 감정은 어떻게 프로그래밍 되었을까? 인공신경망에 어찌저찌 하다보니까 우연히 발생한 기능인걸까? 그래서 그 개발자들도 제대로 설명을 못하는 걸까? 현실세계의 사람에게 프로그래밍된 감정들은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걸까?"




Anxiety is the dizziness of freedom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프리즘이라는 기기가 있다. 프리즘이 작동하면 빨간 등이 나타나는 세계와 파란 등이 나타나는 세계로 두 개의 세계가 분기한다. 사람들은 프리즘을 작동해서 '빨간 등이 나오면 피자를 먹고, 파란 등이 나오면 치킨을 먹는다.'와 같이 간단한 선택을 하기도 하고, 훨씬 더 중차대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피자와 치킨을 먹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입자 하나의 움직임에 의해 만들어진 작은 공기 흐름은 날씨를 바꾸기까지 한다. 그로 인해 분기된 두 개의 세계에서 사람의 생사여부가 달라지기도 한다.


이 책을 읽을 때 즈음에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라는 영화를 감명깊게 봤다. 주관적인 2022년 올해의 영화로 꼽을 정도로 감동이었다. 마블에서는 혼란스럽게 풀어냈던 다중우주라는 개념을 이 영화는 무척이나 감동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와 견줄 정도의 다중우주적인 감동을 이 책에서도 받을 수 있었다.



우리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당신은 다음 번에도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건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게다가 당신은 이 세계에 있는 당신의 행동만 변화시키고 있는 게 아닙니다. 미래에 분기할 당신의 모든 버전들에게도 그런 변화를 심어주고 있는 거예요. 더 나은 사람이 됨으로써, 당신은 미래에 분기될 더 많은 평행세계에도 더 나은 버전의 당신들이 살고 있을 가능성을 보장하고 있는 겁니다.


이 세계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는 내가 다른 세계에서는 살인과 강도를 일삼는 범죄자일 수도 있고, 또는 굉장히 성공한 사업가일 수도 있다. 즉, 누군가가 프리즘을 가동하면 나의 상황이 달라진다. 이 다중우주 어딘가에 있는 나를 생각하면서 "나는 범죄자일 뿐이야..." 또는 "돈이 많을 수도 있었는데 지금은 왜 이러지..." 라며 허무주의에 빠져버릴 수도 있다. 지금의 평범한 나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을 모르고 말이다.

지금의 나는 과거에 존재했던 '나'들이 이런 저런 선택을 해서 형성된 사람이다. 과거의 내가 좋은 선택을 했을 수도, 좋지 못한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어찌됐던 현재 내가 인지할 수 있는 우주에 존재하는 인물은 다른 선택을 했던 '나'가 아니라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나'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고등학교 때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 담당 선생님께서 나에게 해주셨던 말씀이 있다.

"내가 입학하는 학교가 가장 좋은 학교다."

내가 떨어지는 학교도 있을 수도 있고, 여러가지 조건을 고려해서 등록하지 않는 학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입학할 대학교를 결정하고나면, 포기했던 다른 대학교 후보들보다 이게 가장 좋다고 마음을 먹고 다녀야 한다. 다른 학교를 다니면 어땠을까, 라는 마음 따위는 버려야 한다. 그리고 본인이 입시를 하면서 가장 머리를 골똘히 굴려서 선택한 학교니까, 가장 좋은 학교임에 틀림 없다. 그러니 그 최고의 학교에 최고의 학생(=본인)이 입학한 것이다. 그러니 본인 인생에서는 가장 좋은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분기된 다중우주의 나는 컨트롤할 수 없지만. 지금부터 분기하는 다중우주의 나는 선량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앞으로의 나는 지금으로부터 분기하는 모든 다중우주에서 범죄자가 되지 않고, 더 선량하고, 다른 사람에게 더 베풀고, 더 사랑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된다.

최근에 우연히 본 사진인데, 이 중편과 결을 동일하게 하는 사진이라 공유한다.


출처. https://x.com/chiefofstuffs/status/1416858281012695041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옳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설령 인류가 우주가 창조된 이유가 아니라고 해도, 저는 여전히 우주가 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떻게'라는 질문의 해답을 계속 탐구하겠습니다. - 옴팔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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