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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gsungg labnote Sep 07. 2024

좋은 공간에 살고 싶어요 <여름은 오래 그 곳에 남아>

★★★


(24년 7월에 작성한 독후감.)


이 책은 대학을 갓 졸업한 사키니시 군이 슌스케 선생님의 설계 사무소에 입사하여, 국립현대도서관을 설계하던 여름 별장의 나날들을 묘사하는 소설이다.


나는 최근에 5년 정도 살던 집을 떠나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면서 좋은 집, 좋은 인테리어, 좋은 공간이 뭘까 고민했다. 유현준 건축가의 책과 유튜브도 찾아보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집을 꾸몄나 궁금해서 '오늘의집'도 많이 구경했다. 이렇듯 최근, 공간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던 내가 건축가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게 되었다.



18장. "기분이 좋아서 주절주절 말할 때와, 멍하니 혼자 있을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거릴 때, 여러 가지 상황에 놓이는 것이 인간이니까, 방도 거기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는 게 좋다."


새로 이사온 집은 원룸이라서, 그 메인룸을 4개의 공간으로 분리했다. 첫번째 공간부터 반시계방향으로 설명하자면, 첫번째 공간은 옷장과 책상, 컴퓨터가 있는 서재 공간이다. 두번째 공간은 카페트가 깔려있는 좌식 공간이다. 세번째 공간은 소파가 덩그러니 놓여진 소파 공간이다. 네번째 공간은 침대로 가득찬 수면 공간이다.


소음이 필요할 때면 서재 공간에 앉아있는다. 맥주와 과자를 들고 유튜브를 시청한다거나, 게임을 하거나, 친구와 전화를 한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좌식 공간이다. 여기에 누워있거나, 좌식테이블을 펴고 밥을 먹는다. 요즘 취미로 기타를 치기 시작해서, 이 공간에서 기타를 치고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집에서 소파가 제일 아늑하기 때문에 이 소파 공간에서는 늘어지게 앉아서 책이나 읽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요즘은 이 소파에 앉으면 그 쿠션감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어둠의 수렁텅이에 빠져있는 듯한 기분이라서 잘 앉지 않는다. 자려고 들어가는 수면 공간에서는 이불을 걷어차면서 "그 때 그렇지 말았어야 하는데!"하는 새벽 감성에 빠지다가 복잡한 머리속을 겨우겨우 붙잡고 잠에 든다. 조금씩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고 있지만, 아직은 이 집과 살짝 어색하게 동거하고 있다.



12장. "사키니시 군이 지금까지 가본 도서관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은 어디지?"


어렸을 때 부모님과 자주 다녔던 도서관 중에서 도봉도서관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 도서관의 규모나 건물 자체는 다른 도서관들이 더 좋았다. 하지만 도봉도서관에서 부모님과 함께 있었던 여러 에피소드들이 도봉도서관을 좋은 도서관으로 기억에 남게했다.


도봉도서관은 콘크리트로 되어있다. 콘크리트의 낡은 느낌 속 도봉도서관의 어린이 열람실에 들어서면 중앙에 폭신하고 따뜻한 느낌의 원형 소파가 있었다. 지름은 5미터 정도 되고, 아이들이 바깥쪽으로 앉을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주요 사용자인 아이들은 누울 수도 있었다. 원형 소파를 지나면 4명이 앉을 수 있던 작은 책상들이 일렬로 4대 있었다. 그리고 한 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이 있었다. 000번~200번대 책이었던 것 같다. 책장의 오른쪽에는 창문이 있어, 바깥쪽 주차장과 작은 정원을 볼 수 있었다. 책장의 왼쪽에는 빽빽한 서가가 있어, 나머지 300번~900번대 책이 꽂혀있다. 아래에서 두번째 칸에 로알드 달 시리즈가 있어서, 거기에서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마틸다' 같은 책을 집어서 대출했던 기억이 있다. 다른 도서관에 비해서 작지만, 더 자유롭고 작은 장난 정도는 쳐도 괜찮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도봉도서관의 같은 블록 뒷 편에는 덕성여대가 있다. 덕성여대의 잔디밭에 앉아서 아버지와 원반던지기를 하거나, 인라인을 타거나, 네잎클로버를 찾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근처에 즉석떡볶이 집이 있었는데, 내 기억 속에서는 정말 맛있었다. 도봉도서관의 건너편 블록에는 솔밭공원이 있다. 솔밭공원에서 걸어만 다녔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할머니, 부모님 같은 어른들이 그냥 걸어다니기만 하는 걸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소나무에서 나오는 그 피톤치드의 상쾌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건축이 잘됐다는 이야기야."


"건축은 이용객과 그 시대에 의해 숨결이 부여되고 살아난다." 좋은 공간은 사람들이 돌아다닐 때 비로소 좋은 공간이 된다. 제아무리 좋은 건축을 해도 사람들이 찾지 않으면 좋은 공간이 될 수 없다. 70년대 여름 별장에는 슌스케를 비롯한 설계사무소 사람들이 함께 있었기에 좋은 공간이었고, 새로 지어진 게이이치의 국립현대도서관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좋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슌스케 설계사무소의 도서관 설계안 또안 직원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좋은 공간이다.


가족과 함께한 기억 덕분에 도봉도서관이 나에게는 좋은 공간으로 남았다. 마찬가지로, 새로 이사온 집이 좋은 집이 되려면 사람과 함께하는 좋은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나"라는 사람이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이 되도록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넣은 공간으로 더 다듬어야겠다.


그러고 나서는 타인을 집에 초대해보고 싶다. 나는 집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게 싫으면서도 누군가가 들어오면 좋겠다. 그냥 가벼운 타인이 아니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집에 방문하면 좋겠다.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있는 공간이 더 기억 속에 잘 머물테니 말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 집을 "우리 집"이라고 부르면 좋겠다.



결말에 대해서. (스포주의)


결국 국립현대도서관 경합에서 슌스케 사무실은 슌스케 선생님의 건강이 나빠 쓰러지면서 낙선한다. 주인공은 연애하던 마리코와 사이가 멀어지면서 헤어진다. 즉, 주인공은 프로젝트도 떨어지고, 사랑도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새드엔딩이라 느껴지지는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주인공은 어찌저찌 다른 설계사무소에서 일을 하며 번듯한 건축가가 되었고. 마리코가 아닌, 유키코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여름별장에서의 나날들이 끝난 그 당시에는 실패같겠지만, 이 모든 나날들과 기억들이 주인공을 성장시켰을 것이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결말에서 희도와 이진은 헤어지고, 희도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많은 사람들은 결혼할 것처럼 해놓고선 헤어지는 결말이 별로라고 말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고, 첫사랑과 결혼하는 일은 흔치 않으니까 말이다. 그 모든 사랑의 과정동안 희도와 이진은 충분히 성장했다고 본다.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 사키니시 또한 여름동안 큰 성장을 했다. 내가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이 책을 읽은 이번 여름을 기억할 때, "그 때 많이 성장했었지."라고 기억하면 좋겠다.



좋았던 문장들.


마지막에는 밀린다 해도 자기 생각은 말로 최선을 다해 전달해야 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생각하는 건축이 아무 데에도 없게 돼.


다만 이런 제안은 말로 설명하는 것만으로 납득시키기 어려워. 건물 디자인 그 자체로 설득해야 해.

관념적인 말, 추상적인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둘 다 어디까지나 구체적이고자 노력했고, 고객을 전문용어로 얼떨떨하게 만드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았다.


나눗셈의 나머지 같은 것이 없으면 건축은 재미가 없지. 사람을 매료시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래적이지 않을 부분일 경우가 많거든. 그 나눗셈의 나머지는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완성되고 나서 한참 지나야 알 수 있지.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덧. 책에서 건축물의 구조와 기능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계속 언급한다. 그 때마다 단백질구조학, 그리고 생명과학에서 항상 말하는 "Structure determines function." 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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