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러스트>는 1920년대 뉴욕 금융 시장의 큰 손 앤드루 베벨이 자산을 축적한 과정과 그의 아내 밀드레드 베벨과의 결혼 생활 이야기를 4명의 시각에서 쓰여진 소설이다. 첫번째 이야기는 소설 내의 소설가, 해럴드 배너가 작성한 소설. 두번째 이야기는 앤드루 베벨의 출판되지 못한 자서전. 세번째 이야기는 앤드루의 자서전을 작성하던 비서, 아이다 파르텐자의 이야기. 네번째 이야기는 50년 후에 파르텐자가 발견한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 두번째 이야기를 읽을때까지는 그저 그랬다. 똑같은 이야기를 주인공 이름만 바꿔서, 조금 더 주인공을 옹호하는 느낌으로 적어 놔서 살짝은 지루했다. 하지만, 세번째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로웠고, 왜 2023 퓰리처상을 수상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사건이 여러 화자들의, 여러 형식으로, 여러 사실들이 추가되면서 기록되었고, 이야기는 다층적으로 흥미로워졌다.
즉, 그들은 모두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이야기는 들을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자신들의 말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야 마땅하다고, 자신들의 결점 없는 삶에 관한 이야기는 반드시 전해져야 한다고. 그들 모두가 내 아버지에게 있던, 바로 그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야 말로 베벨이 글로 옮기고 싶어하는 확신이라는 걸 알았다.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진 배너의 입장에서 소설이 흥미로우면 장땡이다. 앤드루의 입장에서는 본인의 이야기가 위인전이나, 위대한 자서전으로 읽혀지길 바랬다. 파르텐자의 입장에서는 앤드루의 위선적인 모습을 드러 내면서, 본인을 변호했다. 밀드레드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배출하고 싶어했다. 각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자신이 작성하고 싶은대로 기록한다.
10대 때 학원 선생님이 늘 말씀하셨다. "적자생존! 내가 말하고 판서하면 공책에다가 적자! 필기하고 적어놔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거야!" 맞는 말이다. 선생님은 필기를 열심히 하라는 적자생존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자기 이야기를 가감없이 열심히 기록해야 한다는 적자생존을 떠올린다.
그래서 세번째, 파르텐자의 이야기가 가장 흥미롭게 읽혔다. 그녀는 헛소리하는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부터 모든 집안일을 도맡았다. 어려운 가정사를 가진 그녀는 우습게도 아버지의 헛소리덕분에 베벨그룹의 비서가 될 수 있었다. 비서로 취업한 이후에도 그녀는 익명의 집단에게 협박을 받기도 하고, 무엇이 옳은 일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세번째 이야기는 화자의 성공 뿐 아니라 불평, 불안, 그리고 모든 고민이 적혀 있었다. 반면 두번째, 앤드루의 이야기는 큰 굴곡없는 삶을 살아온, 성공한 사람의 무용담, 조금 더 과장하자면 꼰대의 자기자랑 이라고도 느껴졌다. 글에서 글쓴이의 삶이 와닿을때, 독자들은 크게 공감하며 읽는다.
이것은 수십 년이라는 시간 지연을 거친 대화다. 이 페이지들은 평생 누군가 읽어주기를 기다려왔다. 읽힐 수만 있다면 말이다.
밀드레드는 그녀의 이야기를 일기로 남겨두었고, 파르텐자가 그 일기를 읽음으로써 그녀의 진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녀가 일기를 작성한 덕분이었다. 그녀가 일기를 작성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목소리는 영영 앤드루에게 묻혀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일기를 포함해서 이것저것 많이 끄적거린다. 책을 읽고나서 필사나 독후감도 쓰고, 내 머릿 속에 드는 잡생각들을 에세이처럼 풀어내기도 한다. 나는 머리 속에 잡생각이 많아서 이 잡생각들은 어딘가로 배출하지 못하면 그 생각들이 내 뇌를 턱턱 막아 둔다. 잡생각들을 글로 써버려야 그 잡생각들이 더 이상 머리속에 남아있지 않게 된다.
글을 쓰고 싶은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SNS 계정을 만들었다. 직업이 아무래도 과학 연구직이다 보니까 내가 SNS 에 쓰는 글은 과학자, 연구직, 이공계 생활에 대한 글이다. 그래서 연구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알만한 단어, labnote 를 계정 이름으로 설정했다. 랩노트는 연구실에서 행했던 모든 실험기록을 상세히 적어두는 노트이다. 내가 내 랩노트를 읽으면서 과거에 진행한 실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이 내 랩노트를 읽으면서는 연구윤리적으로 부정 행위가 없음을 증명할 수 있다. 랩노트는 진실되게 작성해야 그 의미가 있다.
SNS 속 labnote 의 나는 내 일상과, 일상에서 든 생각을 진실되게 적어둔다. 파르텐자처럼 나의 고민과 불안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실패만 계속하는, 너무 부정적인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일부러 긍정적이거나 성취한 내용도 업로드하고는 한다.
팔로워들에게 보여주고, 하트를 많이 받고 싶은 마음도 있다. 팔로워를 늘리려고 작정하는 글을 어떻게 쓰는지 머릿 속으로는 알고 있다. 사람들의 불안감을 이용하고, 부정어를 사용하며 호기심을 유발하라는 그런 내용들 말이다. 하지만 내 손끝으로 그런 글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런 글은 왠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 때문에 한 문장, 한 문장이 턱턱 막힌다. 나는 나에게 있어서는 거짓되지 않은 이야기를 쓴다.
아주 가끔씩은 내가 예전에 썼던 글들을 읽어본다. n 년 전의 나는 조금 더 여유 있는 사람이었고, 본업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네. 이런 행복과 저런 불안을 가지고 있었구나. 그럴 때는 웃기게도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서 위로를 받고 잘해보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고는 한다.
좋았던 문장들.
내 일은 정답을 맞히는 거야. 언제나. 조금이라도 틀리면, 나는 모든 수단과 자원을 동원해서 내 실수가 더 이상 실수가 아니게 되도록 하네. 현실을 조정해서 내 실수에 맞도록 구부리지.
그건 내 이야기였다. 저녁을 먹으며 탐정 소설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 베벨은 내 글에서 그 내용을 읽었다.
모든 걸 만드는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데, 한 가지 물건을 만드는 곳에서 일할 이유가 있을까요? 돈이 바로 그거잖아요, 모든 것.
모든 경적, 모든 휘파람, 모든 고함이 욕설이었다. 모든 창문에서 증오가 흘러나왔다.
덧. 밀드레드의 이야기는 어디까지 사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