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지난 날을 떠올리는 일상 1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던 딸이 얼마 전에 좋은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받는 수준의 1.5배 급여로 수업을 맡아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연히 하겠지 생각했더니 뜻밖에도 딸 아이가 제안을 거절해야 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알고 보니 토요일에 하는 수업이라 하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아니, 이 좋은 제안을?’이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이내 딸의 결정에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딸이 나가고 나서 아까 했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는데, 문득 저의 젊은 시절의 한 날이 떠올랐습니다.
딸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를 돌아볼 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요즘은 부쩍 과거를 떠올리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예전이 그리워서 그 시절이 생각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금 제 삶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거든요. 그런데도 몇십 년 동안 잊고 지냈던, 제가 딸 아이 나이 정도였던 20대의어느 날이 불현듯 떠오르곤 합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1996년 4월 즈음이었던 어느 날,학교 수업을 마치자마자 청파동 언덕을 급히 걸어 내려와 남영역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6시부터 시작되는 아르바이트에 늦으면 안 되었기에 그날 저녁 식사는 건너뛰기로 했습니다. 제가 했던 일은 성악 콩쿨을 준비하는 아이들의 노래를 지도하는 것이었습니다. 4월은 콩쿨이 시작되는 시즌이어서 아직 대학생이었던 저에게도 개인 교습이 꽤 들어왔습니다. 3월~5월은 성악 전공생이었던 제가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시기여서 학부모들이 원하는 시간이나 요구사항을 잘 맞춰야 했습니다. 사실 그때 제 처지가 레슨을 맡겨주는 것만도 감사한 상황이었거든요. 용돈은 물론이고 더 벌 수 있다면 학비까지 마련해야 했던 저에게 콩쿨 시즌 성악 레슨은 정말 ‘꿀알바’였습니다. 만약 가르치던 아이가 좋은 상이라도 받게 된다면 계속해서 이 일을 할 수 있을 테니 더욱 열심을 낼 수밖에 없었지요.
6시부터 시작된 4명 아이의 레슨을 끝내고 나니 깜깜한 밤이 되었습니다. 4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노래를 부르고 말을 했더니 목 안이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졌습니다. 배도 고팠습니다. 고민할 겨를도 없이 ‘보름달’ 하나를 사서 입 안 가득 마른 빵을 씹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갔습니다. 입 안에 흐르는 단물이 메마른 목을 적셔주었습니다.
벌써 30년 전의 기억이 어쩌면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인지 신기합니다. 빵을 씹으며 걸었던 거리의 밤 공기, 하루 일을 다 끝냈다는 안도감, 한 달 치 레슨비를 받아든 뿌듯함…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개인 교습을 계속했는데, 유독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 것은 참 이상합니다.
저의 20대가 고단함을 견디고 이겨낸 시간이었다고 해서 딸 아이에게 그것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오늘 딸의 결정에 동의하지 못하는 모순된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지금의 수고가 너를 더 성장시켜 줄 거란다. 조금만 더 참아보렴.’ 이 말이 목 끝까지 차오름을 느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살아왔던 시간과 딸이 살아온 시간은 엄연히 다른 사연을 담고 있으니까요. 저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기억 조각이 딸 아이에게 영감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늘 아침 딸의 결정에 대해 아쉬움을 내려놓지 못하는 저는 아무래도 ‘꼰대성(性)’을 가진 엄마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