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괜스레 마음이 힘들어지는 그런 날이 있다. 무슨 일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런 마음이어서 작은 일에도 발끈해 버리고 상처받는 날이. 여자들은 그러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 일이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한 달에 하루쯤은 내 마음 나도 모를 때가 온다. 그럴 때 샤워가 도움이 된다. 샤워를 하는 동안 근심의 8할은 사라진다고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그래 목욕 문화를 너무 사랑하신 우리 조여사. 내가 기억하기로 평생을 달목욕을 끊으셨고 그걸 그리 즐기셨다. 목욕바구니를 옆에 끼고 그다지도 경쾌한 발걸음이라니.
"힘들고 고단할 때는 그냥 뜨거운 물에 들어가는 거야 그러면 웬만한 화들은 다 녹아 버리지"
함께 동네 목욕탕을 찾을 때면 엄마가 늘 하는 말이었다. 온몸이 녹을 듯 뜨겁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에 들어가 있으면 그 말이 절로 납득이 되었다. 뜨거운 물은 나를 구하고 또 얼마간은 잘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절대 루틴이었던 엄마의 달목욕은 코로나 때 잠시 휴식기가 있었을 뿐, 곧 다시 재개되었고 나는 그 이후로 대중탕을 포기하고 집에서 샤워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조여사와 오랜 세월에 거쳐 체득한 목욕세러피는 늘 효과가 있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갖은 스트레스에 노출되었을 때나 결혼을 하면서 가뜩이나 모든 것이 얼떨떨한데 사는 곳마저 낯선 곳으로 옮겨와 마음이 서걱거렸을 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세상 시름이 녹아 사라지고 단박에 만족감이라든가 행복이라는 단어가 둥실 떠오르곤 했으니까.
서성이는 마음을 끌어안고 싶지 않은 오늘 욕조는 아니지만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한동안 그대로 있는다. 세상에 이렇게 따뜻한 것이 있다니.. 이렇게 다정한 것이 있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감사할 일은 차고 넘치지만 샤워를 할 때 나는 더 자주 감사한 마음이 되는 것 같다.
틀면 어김없이 물이 나온다는 사실이, 바람이 불고 땅이 어는 추운 날에는 따뜻한 물이, 땀이 비 오듯 숨 막히는 여름날에는 시원한 물이 나온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며 더더군다나 전쟁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오늘날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미사일이 날아들고 피난을 간다는 뉴스를 접하다 보면 이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오늘의 샤워를 감사히 여기다 문득 나를 위로해 주고 데워준 이 물들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쪼르륵 배수구로 모인 물은 땅 속 거대한 파이프를 지나 강과 바다로 흘러 들어가겠지.. 바다 생물과 산호초가 있는 바다에 내가 쓰는 비누 내가 쓰는 샴푸들이 매일 어느 정도씩 섞일 거라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다는 정화작용이 되나? 갑자기 바다의 안부가 염려되기 시작한다.
클렌징 폼에 섞여 흘러 내려간 자외선 차단제가 오늘따라 자꾸만 신경 쓰인다. 햇살이 쨍할 때 말고도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에도 자외선 차단만큼은 꼼꼼하게 발라야 한다는 정보들은 이제 잔소리로 여겨질 정도로 무한반복된다. 나조차 자외선 차단제 없이 외출한다는 건 어색할 정도가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발라 제낄까.
실제로 매년 수천통이 넘는 선크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고, 그로 인해 자외선 차단제에 들어있는 옥시벤존, 옥티노세이트 같은 화학 성분들이 산호를 굳어지게 하는 백화현상을 일으킨다는 기사를 보고 뜨끔했던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당장 샤워를 하고 싶었던 조금 전의 기분 따위는 너무나 사소한 일이 되고 만다.
많은 생물들이 산호초에 의존해서 살고 있고, 산호초가 파도를 막아주는 천연 방파제 역할도 한다는데 죽어서는 안 될 일이다. 선크림을 포함해 우리가 매일같이 쓰고 있는 화장품들이 피부는 물론 환경적으로 좋지 않다는 것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당장 내 나라에 폭탄이 떨어지지 않는 한 남의 나라 전쟁에 둔감한 것처럼 바다는 넓고 넓다고 여기다보니 '나 하나라도'보다는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자외선 차단제 사용의 심각성을 의식하게 된 이후로는 수영장에 풀 메이크업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도 전보다 집요한 시선이 갔다. 저런, 화장품에 들어간 오일이라든가 실리콘 왁스, 색소들이 그대로 바다로 흘러 들어갈 텐데, 그러니 반드시 화장을 지우고 샤워를 하고 이용하는 것이 맞을 텐데 왜 저러고 들어올까. 나몰라라는 태평한 얼굴로 인생 사진 건지는데만 열을 올리는 모습이 안타깝고 불편할 때가 많아졌다.
뭐가 됐든 조금이라도 자세히 알게 된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 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서는 도저히 아무 선크림을 슥슥 쓸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 모든 것이 애정이 있고 관심이 있다는 증거다. 결국 좋은 마음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걸까. 이미 시중에는 덜 해로운 자외선 차단제가 너무나 많았다. 광물성으로 이루어진 무기 자외선 차단제, 재활용 용기에 담긴 것, 포장재를 최소화한 것,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제품, 산호초에 안전하다는 리프 세이프 인증받은 것까지 피부도 지키고 환경도 지키고자 하는 착한 제품들이 놀랄 만큼 많아서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선택하기까지 꽤 시간과 성의를 바쳐야 했지만 다양한 제품들을 살피면서 세상에는 이렇게 열정과 사랑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사실에 뭉클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나는 그저 가장 쉬운 소비자일 뿐, 투덜거릴 입장이 아니었다.
덜 해로운 제품을 찾기 위해서는 성분 표시를 꼼꼼히 살펴야 하고 그럴 때마다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성분 표시를 휴대폰으로 찍어 확대해서 봐야 하는 건 번거로운 과정이었지만 그러는 동안 좋아하는 허브향이나 몸에 좋을 것 같은 한약 냄새가 나는 새로운 제품이나 플라스틱이 아닌 친환경 종이 소재로 만든 독특한 제품을 만나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고 그런 제품들을 주변에 선물하면서 함께 나누는 즐거움이 컸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중 영원한 것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지킬 수 있을 때 지키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니 지켜졌으면 좋겠다. 지구까지는 모르겠지만 목욕을 너무 사랑하고 바다를 너무 좋아하니까. 손톱만큼이라도 보태고 싶다.
보잘것없는 작은 실천이지만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매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샤워하는 물을 좀 더 아끼려고 노력할 수 있을 것이고, 얇고 긴 옷을 이용해 선크림 사용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도 있고 그래도 써야 하는 제품은 선택함에 있어서 좀 더 세심할 것, 고작 그 정도지만.
물론 빠릿빠릿한 청춘들과 달리 선크림 하나 검색하는데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뭐 그래도 괜찮다.
나는 요즘 시간이 많으니까.